55화. 신곡 (1)
“복수요?!”
정진은 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침마당놀이에 출연하는 게 복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어린이니까 꿈과 희망을 얘기하는 건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복수라니?
정동희는 정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잘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그리고 여전히 아주 잘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
“그게 널 조롱하고, 꼬맹이라고 우습게 봤던 세상 사람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복수 아니겠니?”
신바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게 가장 처절한 복수지! 하하, 친척 형이 좀 아네?”
아…….
이제야 나도 정동희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정진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그러니까, 신바람 선생님 같은 분들한테 복수하라는 거죠?”
“뭐어? 야! 내가 언제 널 조롱했냐!”
“…….”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알려 준 것뿐이었지.”
정진은 굳은 얼굴로 대꾸하지 않았다. 나 또한 신바람이 정진을 조롱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쨌든 당사자는 불쾌함을 느낀 적이 있었나 보다.
원래 사람은 자신의 민감한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것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법이니까.
“그 사연 좋아요. 형, 저 정말 뼈를 갈아서라도 준비해 볼게요.”
정진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야, 야, 너무 그렇게 무섭게 말하진 말고.”
정동희는 웃으며 정진을 바라봤다.
“어쨌든 그런 파이팅은 좋다. 잘하면 정진이 이번 무대에서 키맨이 될 수도 있겠는걸?”
“맡겨 주세요, 앞구르기라도 할 테니까!”
활활.
정진은 타오르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침마당놀이 자체에 거부감을 느껴 했었는데.
정동희의 몇 마디 말에 정진의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정동희에게 불씨에 장작 집어넣는 재능이 있나?
만약 이걸 노리고 한 말이었다면…… 우리 친척 형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한데.
정동희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너무 나갔네요, 하하. 그냥 방송 출연 설명한다는 걸.”
그리고 정동희는 김 부장을 바라봤다. 이제 그가 나설 차례였다.
“…….”
김 부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희야.”
“네, 삼촌.”
“네가 알아서 다 해라.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만 중간에 나한테 알려 주고.”
“네?”
“나 먼저 일어날게. 내가 있으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
그리고 나와 신바람을 슬쩍 바라봤다.
“삼촌! 아직 결정해야 할 게 많은데요?”
“네가 다 알아서 하래도?”
“그래도…….”
“괜찮아, 너 하는 거 보니까 그래도 될 거 같다.”
김 부장은 곧바로 빵집을 나갔다.
나가면서 뭔가 중얼거렸는데.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
“팀원들이 너 같기만 하면, 잔소리할 일도 없을 텐데…….”
팀원?
전생의 나는 정동희 같지 않았기 때문에 졸라게 갈궜다는 건가?
이상하게 기분 나쁘네?
역시, 민감한 사항에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건가.
* * *
김 부장이 나가고 나서.
나, 신바람, 정진은 정동희만 바라봤다.
1 대 3의 구도.
정동희는 약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자리 좀 다시 잡아야겠다.”
난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정동희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정동희의 허벅지를 두들기며 말했다.
“형, 그다음 얘기해 봐. 궁금해.”
“응? 으응.”
내가 마주 보고 싱긋 웃자, 그제야 정동희의 표정이 풀렸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게 ‘선곡’이거든요?”
선곡…….
“특히, 경연 대회에서의 선곡은 매우 중요합니다.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는 한정적이고, 노래 한 곡으로 최상의 것을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죠.”
2005년만 해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잘 없었다.
2009년 슈퍼스타K를 시작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워낙 인기가 많았었고, 나 또한 전생에 일부 프로그램은 챙겨 보기도 했었다.
그래서 잘 안다. 선곡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보도 없었을 텐데 정동희가 이런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게 좀 신기했다.
“전 어릴 적부터 경연에 나갔어서 잘 알거든요. 별의별 콩쿠르를 다 경험해야 했으니까. 한정된 시간에 최고의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건 비슷하거든요.”
아…… 경험이 없는 게 아니구나?
하긴, 방송에서의 경연만이 경연은 아니겠지.
그런 수많은 경연과 경쟁을 통해서 서울대까지 입학한 사람이니…….
더 신뢰가 가네.
“혹시 생각한 선곡이 있나요?”
신바람도 정동희를 인정한 것 같았다. 나이는 어려도, 예의를 갖추어 물었다.
“없습니다. 아무래도 트롯 부분에서는 신바람 선생님께서 잘 아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
“선곡은 신바람 선생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신바람은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며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흠…… 알겠습니다. 혹시 생각하신 컨셉은?”
정동희는 불편했는지, 신바람에 말했다.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하시죠. 저 이제 겨우 24살입니다.”
신바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게 편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불편한데…….”
아버지뻘인 신바람에게 깍듯하게 존댓말 듣는 게 불편한 모양이다.
“흠, 그럼 말씀은 나중에라도 천천히 놓아 주세요.”
“…….”
“제가 생각한 컨셉은…….”
정동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서는 말했다.
“아이들다운 걸로 갔으면 합니다. 어른스러운 컨셉으로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주 시청자가 주부님들이고, 연령대도 높기 때문에 아이다운 귀여운 컨셉으로 가는 게 더 어필이 될 것 같아요.”
“…….”
“그리고 보통 출연자들 중에 젊은 사람도 잘 없거든요? 대부분 출연자가 중장년인데, 어리고 귀여운 컨셉으로 가는 게 차별화도 확실히 될 거 같고요.”
이 말을 듣고 정진이 중얼거렸다.
“빽바지에 빽구두는 포기해야겠네.”
“핑크 정장도.”
우리는 여름의 트롯 여행에서 밤무대 가수처럼 옷을 입고, 성인 가요를 부르며 다녔었다.
하지만 정동희가 말한 컨셉대로라면, 이 전투복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정동희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옷은 괜찮을 거 같아. 쫙 빼입고 밝은 노래 부르면 더 귀엽지!”
신바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감해 하는 표정.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해도 밤무대에서 귀엽고 깜찍한 곡을 불러 본 적은 없을 테니.
곡 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바로 떠오르는 곡은 없군요.”
“네, 당장 말씀해 달라는 건 아니니까요.”
정동희는 우리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이틀 뒤, 월요일에 다시 만나는 걸로 하고요.”
“…….”
“그때까지 신바람 선생님은 곡 정해 주시고요. 두 가수님께서는…….”
정동희는 날 향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목 관리만 잘하셔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가수는 노래만 신경 쓰면 돼요~!”
난 정동희를 향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 * *
다음 날은 집에서 그냥 쉬었다.
신바람, 정진, 정동희와는 내일 만나기로 했고.
가수는 다른 거 할 거 없이 목 관리만 잘하며 푹 쉬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딱 한 가지.
마음의 준비만 하고 오라고.
정동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일부터는 달릴 거니까. 벼락치기 알지? 아, 너희들은 아직 잘 모르겠구나.’
당연히 나는 벼락치기가 뭔지 안다. 하지만 모른 척해야 했다.
‘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단기간에 온 힘을 집중하여 준비하는 거를 말하는 거야.’
그렇다, 시간이 많지 않다.
내일부터는 집중해서 달려야 한다.
그래서 난 오늘 푹 쉬려 한다.
나뭇결로 된 거실 바닥.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난 거실 바닥에 누워서, 산들산들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을 느꼈다.
“아들~ 사과 깎아 줄까?”
주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머니.”
어머니는 깎은 사과를 내 앞에 놓으셨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려 하셨다.
“어머니, 잠깐만요!”
난 어머니가 가지 못하도록 손으로 잡아끌었고.
어머니는 웃으며 내 옆에 앉으셨다.
그리고 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웠고.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덕후가 웬일로 어리광이야?”
“아~ 좋다.”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평화로움.
내일부터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기대가 되기에, 지금의 평화로움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머니, 저 잘할게요.”
“잘 못해도 돼~”
앞으로가 기대된다.
다시 신바람, 정진과 함께 무대에 설 그날이…… 너무 기대된다.
다음 날 오후, 대학로 연습실.
매주 주말에 연습하는 곳.
정동희와 함께 도착했다.
방송 출연 날까지 이곳에서 연습한다고 했다.
“흠…… 오시겠지?”
약속 시간 10분 전.
아직 신바람과 정진은 도착하지 않았다.
“형, 걱정 마. 둘 다 프로야. 약속 시간은 칼이니까.”
“그래?”
“응, 신바람 선생님 교육 방침 중 하나거든. 약속 시간은 정확히 맞추라고. 빨리 오지도 말고.”
“빨리 오지도 말고?”
“응, 빨리 오는 것도 실례일 수 있다고.”
정동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말했다.
“글쎄다, 가수가 리허설 생각하면 좀 빨리 다니는 습관을 갖는 게 좋지 않나?”
“그러면 리허설 시간까지 고려해서 약속 시간을 정해 주면 된대.”
“아…….”
정동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시간 스케줄을 빨리 잡으라는 거지?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오기를 바라지 말고.”
“응,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오는 건 호의인 건데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시간 맞춰 오면 욕먹는다고.”
훗.
정동희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너네 선생님 대단하시다. 노래만 가르치시는 게 아니네?”
“응, 인간관계는 서로 길들여 가는 거래.”
덜컹.
약속 시간 정확히 3분 전.
신바람과 정진이 들어왔다.
“아이고~ 찾기 힘드네요.”
난 신바람의 스타일을 알기에 웃으며 말했다.
“아까 도착했는데, 밖에서 기다리다가 시간 맞춰서 들어오시는 거 아니에요?”
흠칫! 신바람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내게 핀잔을 주었다.
“얀마, 선생님 봤으면 인사부터 해라.”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냐~ 하하.”
우리는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난 정진을 봤다.
“형, 왔어?”
“응, 덕후야. 일찍 왔나 보구나.”
“어쩔 수 없었어. 동희 형이랑 같이 오느라.”
“아~!”
정동희는 신바람과 정진을 향해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연습실 끝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자마자 정동희는 이것부터 확인했다.
“신바람 선생님?”
“네.”
“어떻게, 선곡은 잘 해 오셨나요?
“아, 그게…….”
신바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설마 선곡을 못 해 온 건가.
“해 오긴 해 왔는데…….”
“…….”
“이 두 녀석이 부를 밝고 귀여운 컨셉의 트롯 가요를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정동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뭐, 곡 들어 보고 어느 정도 손을 좀 봐야겠죠.”
“편곡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제 주변에서 도움받으면 편곡 정도는 어렵지 않거든요.”
“트롯 편곡은 좀 다르긴 한데…… 뭐 어쨌든.”
신바람은 투명 케이스에 담긴 CD를 건네었는데.
케이스에 조그만 글씨가 써 있었다.
‘데모 #14’
데모?
혹시, 노래 제목이 데모 #14는 아니겠지?
뭘 선곡했길래…….
근데 정동희는 케이스를 받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난 두 사람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서, 눈을 켜고 지켜봤다.
신바람은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곡을 하나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