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연락이 오다 (2)
“덕후?”
할머니는 눈이 크게 뜨며 반문했다.
“덕후가 어딜 나가? 아침마당놀이를 나간다고?”
난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덕후가 거길 왜?”
할머니는 웃지 않았다.
당연히 놀랄 만한 일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놀라시는 거 같아서 당혹스러웠다.
내가 대답하려는데, 정동희가 나섰다.
“길거리 캐스팅됐어요. 그럴 만하죠. 이 조그만 녀석이 기타를 치며 그렇게 노래를 불러 대니.”
“…….”
“어느 정도 예상했었어요. JBS 관계자가 직접 컨택할 줄은 생각 못 했지만.”
음?
이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동희를 바라보았고.
그는 날 향해 씩 웃었다.
뭐지? 방금 노린 것 같은 뉘앙스였는데?
설마, 캐스팅을 노리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자고 한 건가?
“와아~ 우리 조카님이 그 정도로 잘해?”
큰삼촌은 정동희의 말을 듣고는 밥알을 튀기며 좋아했다.
“하하, 대박인데? 야~ 난 너 여름방학 때 트롯 여행인지 뭔지 하고 다닌다고 해서 허파에 바람 들어간 줄 알았는데…… 조그만 녀석이 벌써부터 정신이 나갔다고.”
“…….”
“진짜였구나? 삼촌이 몰라봤다~ 이야~ 방송국에서 먼저 다가와서 섭외했으면 말 다 한 거지 뭐!”
참 심플하다. 역시 큰삼촌답다.
이것저것 필요 없고, 그냥 방송국 관계자가 컨택했으면 끝난 거구나.
어쨌든 인정해 주니 고맙긴 했다.
“너, 성공하면 삼촌에게 차 한 대 뽑아 줘야 해!”
“…….”
“아니면 결혼할 때 가전이라도 하나 해 주든가.”
대답할 틈도 없이 쏘아 대는 큰삼촌.
큰삼촌의 눈을 보았다.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내 성공을 기대하며, 콩고물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방송의 힘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기대해 줘서 고마워 큰삼촌.”
옆에서 잠자코 있던 막냇삼촌도 말했다.
“덕후야, 나도 잊지 마라. 난 큰 거 안 바란다. 아나운서 한번 만나게 해 줘.”
“…….”
흠…… 그게 더 어려울 거 같은데?
놀라운 소식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으로 정동희와는 대화 나눌 틈이 없었다.
결국 김 부장이 정동희에게 조용히 말했다.
“동희야, 식사 다 하고, 삼촌이랑 따로 얘기하자.”
“네.”
이렇게 김 부장이 얘기를 끊고, 식사를 이어 가려는데.
“아비야.”
할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김 부장을 불렀다.
‘아침마당놀이’를 들은 이후, 수저도 내려놓으시더니 표정이 안 좋았다.
“거기에 진짜 덕후 내보낼 거 아니지?”
* * *
“…….”
내 방송 출연 소식에 왁자지껄하던 밥상.
할머니의 말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특히, 큰삼촌과 막냇삼촌이 김 부장의 눈치를 살폈는데.
김 부장은 묵묵히 밥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다시 김 부장을 불렀다.
“덕후 아비야.”
“…….”
“애들 방송 출연시키는 거 아니란다. 아비도 잘 알잖니?”
옆에서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결국 핀잔을 주었다.
“당신도 참, 그때랑 지금이랑 같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식사나 하시게.”
약간 흥분한 할머니는 ‘아비’가 아닌 김 부장의 이름을 불렀다.
“진하야, 난 정말 네가 이해가 안 되는구나. 누구보다도 네가 나서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니니?”
예전에 큰고모에게 김 부장의 과거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어릴 적 방송 출연을 하여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었고.
어느 때부턴가 부침을 겪다가 고등학교 이후로 음악을 아예 놨다는 얘기.
자세한 원인은 못 들었지만, 할머니의 영향이 꽤 큰 듯한 뉘앙스로 말했었다.
꿀꺽.
밥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실수했나 봐요, 식사 다 하고 얘기할걸.”
눈치를 보던 정동희는 본인의 입을 때리며 자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번 기회에 배웠을 것이다.
밥상머리에서 민감한 얘기 꺼내면 안 된다는 걸.
탁.
김 부장은 밥그릇을 비운 후.
숟가락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죄송한데,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진하야!”
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 잡고 앉은 후 할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
“진하야,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하니? 어릴 적에 방송 출연시키는 거 아니야.”
김 부장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어머니를 나직이 불렀다.
“어머니.”
“…….”
“제 자식이에요.”
김 부장의 짦은 한마디.
이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고.
할머니는 놀라서 그저 입이 벌어졌다.
많은 걸 꾹꾹 누르고 뱉어 낸 한마디였다.
“…….”
할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고.
할아버지 또한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동희야, 식사 다 했으면 어서 따라와라.”
“아, 네 삼촌.”
정동희의 밥그릇에는 밥이 반도 넘게 남아 있었지만.
5분 대기조 출동하듯 김 부장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쫄은 것 같았다.
* * *
김 부장과 정동희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너, 식사 다 한 거 맞어?”
“……네, 다 했어요.”
“흠…… 그래, 하려던 거 마저 얘기해 봐라.”
“덕후는요? 덕후도 같이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수가 노래만 잘 부르면 됐지. 필요 없어.”
“아, 네.”
정동희는 작가에게 들은 대략적인 일정을 얘기해 주었다.
“우선 녹화 날은 10일 이후라고 했고요.”
“10일?”
“너무 짧죠?”
“뭐가 짧어? 출연할 거 알고 있었잖아.”
“아…… 네, 그리고 녹화 날 이틀 전에 리허설 한다고 했어요.”
“노래자랑인데, 리허설을 해?”
“소수의 팀이 참가하는 노래자랑이라서요. 좀 성격이 다른가 봐요. 전국 노래자랑 같은 경우는 못 하는 사람도 올라가고 하잖아요?”
“흠…….”
“아침마당놀이 노래자랑은…… 그러니까 아마추어나 준프로들이 나와서 공연하는 것 같달까요? 실제로 잊힌 가수들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것의 모습을 보여 주기 보다는 무대 자체의 퀄리티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에요.”
“프로그램 이름이랑 좀 안 어울리네.”
“그렇죠, 이름은 마당놀이면서…….”
정동희는 말을 이어갔다.
“방송국 측에서도 노래 편곡이나 연주 등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거든요?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방송국의 태도에 대한 얘기가 나올수록 김 부장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래서 선곡을 빨리 알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선곡과 참가 가수는 3일 뒤까지는 알려 달라고…….”
“흠…….”
정동희는 김 부장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고는 살며시 물었다.
“큰삼촌, 왜 그러세요?”
“방송국에서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 보면 진짜 꽤 실력자들이 나오는가 본데…….”
“장난 아니에요. 보통 중, 장년층이 많이 나오는데, 정말 가수 뺨쳐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봤니?”
“계속 봐 왔죠. JBS 명함 받은 날부터.”
김 부장은 놀란 눈으로 정동희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큰삼촌도 회사만 아니면 계속 모니터링하셨을 거 같은데. 하하.”
아침마당놀이는 회사 출근 시간에 한다.
주부가 타깃인 프로그램이다.
“어쨌든 동희야. 고맙다, 너도 바쁠 텐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고.”
“아니에요, 삼촌. 제가 좋아해서 하는 거예요. 제가 덕후 1호 팬이거든요.”
“하하, 그래?”
‘덕후 팬’이라는 말에, 김 부장은 퇴근 후 처음으로 웃었다.
“흠…… 준비 철저히 해야겠네. 방송 출연 끝날 때까지만 함께 신경 써줄 수 있겠니?”
“물론이죠, 삼촌. 제가 부탁하고 싶은걸요.”
정동희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매니저라고 생각해 주세요. 중간고사도 끝났고, 저 요즘 시간 많아요. 하하.”
김 부장은 정동희의 대답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고맙구나.”
정동희는 빙그레 웃다가.
“아, 맞다! 중요한 얘기를 안 했네.”
뭔가 생각난 듯 빠르게 말을 시작했다.
“대부분 듀엣으로 참가한대요.”
“…….”
“솔로가 안 된다는 건 아닌데. 보통 사연 있는 사람들끼리 팀으로 참가를 하니까, 솔로로 나오면 임팩트가 없나 봐요. 가급적이면 듀엣 이상으로 참가하기를 추천하더라고요.”
정동희는 심각하게 말했지만 김 부장은 여유 있게 들으며 살며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뭐…… 좋은 생각 있으세요? 전혀 안 놀라시네요. 당황하실 줄 알았는데.”
“하하.”
김 부장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늘의 뜻인가? 덕후가 운이 따라 주네.”
“네?”
김 부장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덕후는 이미 팀으로 활동하고 있거든.”
“음?”
‘덕후가 팀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정동희는 김 부장의 말이 황당했다. 팀 활동 같은 건 전혀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김 부장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도 쌈마이한 팀명을 듣고 한 번 더 놀랐다.
“방울형제라고…….”
* * *
다음 날. 토요일.
어제 정동희는 방송 출연 얘기를 하러 왔다면서.
김 부장과 속닥대더니, 나에게는 아무런 얘기도 안 해 주고 돌아갔다.
두 사람이 있던 방 안에 들어갔더니.
‘가수는 노래만 신경 쓰게 해 주자고.’
이러면서 둘이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그런 말은 안 들리게 하든가!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덕후야~ 내일 보자.’
그러고는 가 버렸다.
얘기가 다 끝나면, 정동희가 설명해 줄 줄 알았는데.
‘뭐…… 뜻이 있겠지. 착한 형이니까.’
약간 서운했지만 정동희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후 4시 무렵.
“다녀왔습니다~!”
김 부장이 들어왔다.
휴일에도 김 부장은 종종 회사에 간다.
평소보다 일찍 와서 물었다.
“어?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김 부장은 아무리 빨리 돌아와야 7시다.
“왜? 일찍 와서 불만이야?”
“어, 불만이야.”
김 부장은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하여간 짜식이 한결같아. 줏대 있어.’
“어서 옷 입고, 나갈 채비해라.”
“나?”
“그래.”
“아빠랑?”
“응.”
“싫은데?”
난 밖에 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움직여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후회?
“아빠 옷 갈아입을 동안 준비 안 되어 있으면 혼자 갈 거야.”
이러면서 김 부장은 슬쩍 웃었다.
뭐지? 좀 이상한데?
김 부장과 단둘이 외출하는 건 싫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는 말이 신경 쓰여서, 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노원역 근처의 한 빵집.
빵집 앞에서 정동희와 마주쳤다.
“엇? 형?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인마~ 너랑 볼일 있어서 왔지.”
“아~ 진짜? 뭐야? 바쁘다며.”
정동희가 바쁘다고 하여, 오늘 오전에 기타 연습은 송사무엘과 둘이 했었다.
어제 헤어질 때, 오늘 보자고 하고는 연습에도 안 나오더니.
“오늘 보자는 말이 그래서 한 거였구나~”
“하하. 그래~ 너랑 방송 출연 얘기하려고.”
“와~ 씬나! 거기다가 빵집! 나, 팥빙수 먹을래!”
“하하, 그래~ 형이 사 줄게. 많이 먹어.”
난 신나서 재잘거리며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
.
.
.
왈칵!
눈물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난 앞뒤 안 보고 달려 나갔다.
“선생님~!”
노란 정장의 신사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덕후야~ 하하!”
“선생님~!”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가 몸이 부서져라 안겼다.
“으아앙~ 선생님!”
신바람! 신바람이었다!
언제 볼까 싶었는데.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난 눈물부터 나왔다.
“하하, 이 녀석아. 반가운데 왜 울고 그러냐?”
“선생님~!”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덕후야, 잘 지냈어?”
신바람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가려져서 안 보였었는데.
“혀엉~!”
정진! 내 영혼의 단짝!
정진 또한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혀서는 날 꼭 끌어안았다.
“덕후야, 보고 싶었어~!”
“형~!”
겨우 한 달여 만인데.
이산가족 만난 것마냥, 우리 세 사람은 난리였다.
정동희는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큰삼촌, 저 덕후가 저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봐요. 엄청 의미 있는 여행이었나 봐요.”
“그러게,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김 부장은 마음껏 기뻐하는 김덕후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