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연락이 오다 (1)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김 부장이 선생님을 만나러 들어간 지 20분은 지난 거 같다.
무슨 얘기를 하길래…….
텅 빈 공간에 혼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특히 불과 2시간 전쯤에 봤던 충격적인 모습.
김 부장이 소형 앰프와 기타를 들고 등장하는 장면부터.
기타를 두들기며 울부짖는 듯한 김 부장의 놀라운 노래 솜씨.
트롯을 제일 좋아하기는 하지만 김 부장 덕분에 락이라는 장르에 호기심이 생길 정도였다.
오늘 본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마 이번 2회차 인생을 사는 동안에 평생에 남을 기억이 아닐까 싶다.
“덕후야.”
저벅. 저벅.
김 부장이 나타났다.
오늘따라 김 부장이 다르게…… 정확히 말하자면 좀 멋있게 보여서.
시선을 두기가 불편하다.
“오래 기다렸지? 저녁 시간 다 됐는데, 배고프겠네.”
“…….”
“어서 가자.”
학교 밖.
학교에서 집까지 우리는 걸어서 이동했다.
5분여 정도를 아무 말 없이 가다가.
김 부장이 내게 물었다.
“왜 얘기 안 했냐?”
“뭘?”
“선생님이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했었다며?”
“…….”
아…… 선생님이 그 얘기를 했나 보구나.
“그냥…… 불안했어.”
“불안?”
“응, 변화가 생길까 봐. 난 지금 학교생활 만족하거든.”
김 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건 불안이 아니라, 두려운 거 아니냐?”
“아니야! 불안한 거야!”
나도 모르게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요즘 학교생활이 약간 힘들어지고 있었다.
보는 시선이 많아서, 뭘 할 때마다 부담스럽고 신경 쓰이는데.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기길 원치 않았다.
멈칫.
김 부장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앞에 쪼그려 앉아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양손으로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아빠는 무조건 네 편이다.”
“…….”
“네가 잘못되는 길만 아니라면, 난 덕후가 원하는 걸 다 해 주고 싶어.”
김 부장은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난 네가 잘되길 바랄 뿐이다.”
뭉클.
짧은 몇 마디의 말이지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이런 게 진심의 힘인가.
주체할 수 없는 따뜻함이 온몸에 퍼져 가는 것 같았다.
“앞으로 또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오라거나 하시면, 여러 생각 말고 바로 얘기하면 돼.”
“…….”
“아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지?”
난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 *
어느덧 집에 도착했고.
김 부장은 뭔가 후련해하는 얼굴이었다.
“다녀왔습니다~!”
김 부장답지 않은 밝은 목소리에 가족들은 의아해했다.
“어서 와라, 잘하고 왔냐?”
할아버지의 물음에 김 부장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뭐, 적당히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김 부장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선생님 멱살 잡을 듯 난리 치길래 걱정했더니만. 별일 없었나 보구나?”
“하하,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땐 그냥 당혹스러워서 그런 거죠.”
아니다. 그때는 분명 진심이었다. 애들 학예회에 부모가 장기자랑 하는 경우가 어딨냐며 몹시 흥분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며, 내가 수작 부린 거였다는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김 부장은 오늘 공연에 만족했던 것 같다.
상황에 등 떠밀려서 나선 것이긴 했지만, 분명 연주하고 노래 부르며 즐거워했다.
“근데…… 아비야.”
옆에서 잠자코 있던 할머니가.
김 부장의 손에 든 앰프와 어깨에 멘 기타 가방을 가리키셨다.
“설마 너 오늘…… 한 거니?”
할머니뿐만이 아니라, 거실에 모여 있던 가족들은 김 부장의 행세를 보고 긴장했다.
김 부장이 절대 손대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럼 어떡해요?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는데, 제가 할 줄 아는 건 이거밖에 없는데.”
“…….”
“애 기죽일 수는 없잖아요.”
가족들은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중 할머니는 놀란 표정 안에 수심 또한 담겨 있었다.
“이번 한 번뿐이지?”
할머니 입에서 어이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게 무슨 의미야? 갑자기 이 말씀을 왜 하시지?’
훗.
김 부장은 할머니의 말에 씁쓸히 웃고는 말했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아들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
“다시는 또 만질 일 없을 거예요.”
김 부장은 소형 앰프와 기타 가방을 현관문 쪽에 놔두며, 막냇삼촌을 불렀다.
“진우야, 내일 이거 반납 좀 해 주라. 주소 알려 줄게.”
“알았어, 형.”
이후 우리 가족은 평상시와 같았다.
김 부장은 여느 때처럼 회사를 열심히 출근하고.
난 그저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항상 똑같은 견고한 일상. 그 안에 분명 공간이 생겼다.
약간의 틈.
난 그 틈을 통해 김 부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김 부장의 표정도 예전에 비해 약간 밝아졌다.
이번 학예회.
나와 김 부장 사이에 무언가 의미가 생긴 것 같다.
* * *
♪♬♪♪ ♬♬♬ ♪♬♪♪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서울 음대 연습실.
쇼팽 발라드 4번.
정동희는 유려한 손길로 쇼팽 곡을 연주하며 문득 김덕후를 떠올렸다.
작년 이맘때쯤.
김덕후는 테스트를 보러 학교에 왔었고.
송사무엘과 피아노 테스트 중.
7살 김덕후는 요상한 타법으로 쇼팽 발라드 4번을 디스코 버전으로 만들어 버렸었다.
피식.
연습하다 말고, 그때 생각이 나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내일이면 덕후 보겠구나.’
김덕후는 8살 꼬마지만 정동희는 그를 나이만 어린 친구 같다고 생각했다.
김덕후의 재능이 신기하기도 하고,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아서 기타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만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도 너무 잘 통하고.
심지어 간혹 본인보다 어른스럽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특히,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면…….
‘동희 형, 도전해야 해. 그리고 큰물에서 놀아야 해. 학교에서 피아노만 열심히 치면 그냥 서울대 나온 피아노 학원 선생님 되는 거야.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형이 원하는 삶은 아니잖아?’
‘너 같은 애들 가르칠 수 있다면 학원 선생도 괜찮을 거 같은데?’
‘형, 나 같은 애는 없어.’
그리고 정동희가 나태해질 때면 검지를 치켜들며 아주 설득력 있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형, 그러다가 피아노 잘 치는 회사원이 되는 수가 있어.’
정동희도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웃어넘길 수 없었다.
벌써 주말마다 김덕후와 만나 기타 연습을 한 지 몇 주가 지났다.
피아노 덮개를 내리고 연습실을 나가려다가.
‘피아노 잘 치는 회사원’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젠장,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정동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피아노 덮개를 다시 열었다.
“에이~ 조금만 더 연습하고 가자.”
손을 건반 위에 올리려는데.
위이잉―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연습할 때는 전화받지 않지만, 시작하기 전이라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네. 혹시 김덕후 보호자 되십니까?
‘뭐? 보호자? 왜 나를 찾어? 혹시 무슨 일 생겼나?!’
정동희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보호자는 아닙니다만 덕후의 친척 형이긴 합니다. 누구시죠? 갑자기 보호자는 왜요? 덕후한테 무슨 일 생겼습니까?”
―아~ 맞네요~ 그때도 친척 형이라고 하셨었어요. 하하, 저 기억나실 지 모르겠는데.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났었거든요?
‘마로니에 공원?’
―JBS 김태섭 작가라고 합니다. ‘아침마당놀이’에 섭외하고 싶다고 그때…….
정동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다.
“네~ 안녕하세요. 기억합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하하, 연락이 없으시길래 흐지부지된 줄 알았어요.”
김 작가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하실 만하죠. 당시에 바로 출연하는 계획이었는데, 한 달 이후로 출연을 원하셔서 일정이 꼬였었습니다. 예정된 출연자들이 있어서, 스케줄이란 게 마음대로 잘 안 되거든요.
“아~ 네.”
정동희는 방송일은 잘 모르기에 그러려니 했다.
―이제 출연 일정을 잡았으면 해서요, 괜찮으시죠?
‘큰삼촌이랑 대화해 봐야 하는데.’
정동희는 김 부장을 떠올렸지만, 한 달 이후라고 했던 게 이미 훌쩍 지났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괜찮습니다.”
―녹화방송을 매주 월요일에 하거든요? 그러니까 다다음 주 월요일인데…… 10일 뒤네요.
‘10일…… 얼마 안 남았네?’
―자세한 스케줄은 추후에 다시 안내해 드릴게요. 우선 출연자들 바로 연습시켜 주시고요. 출연자 인적 정보와 곡이름 좀 부탁드릴게요.
꿀꺽.
디테일하게 들어오니까, 정동희는 순간 긴장이 확 올랐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두 명 이상이 출연하는 게 좋습니다. 그게 강제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대부분 출연진이 그렇게 하니까요. 아마추어라 그런지 혼자 무대에 서면 맛이 안 살더라고요.
“아…… 네.”
‘시간이 얼마 없다. 큰삼촌에게 빨리 알려야 해.’
―다음 주 월요일까지 알려 주실 수 있죠?
“뭘요?”
―출연진 인적 정보랑 곡이름이요.
“아, 아 네. 알겠습니다.”
―네에~ 그럼 확정되면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뚝.
정동희는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연습실을 나갔다.
* * *
저녁 7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저녁 7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집의 가장이신 김 부장 사마께서 그 시간 집에 오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먼저 먹겠다고 땡깡을 놓아도.
이 집의 막내인 내가 땡깡 부려서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밥시간 룰만큼은 불변이다.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김 부장이 올 때까지 밥숟가락 절대 안 드신다.
우리 집 모든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에 대한 존중의 룰이랄까.
그래서 난 달리기 출발선에 선 것처럼, 바로 먹을 준비를 하고 벨 소리가 울리길 기다린다.
띵동!
“아싸아~!”
7시 3분, 오늘 좀 일찍 왔네?
난 바로 밥숟가락을 들었는데.
“동희야, 네가 웬일이니?”
뭐야? 김 부장이 아니었어?
난 바로 현관문 앞으로 나가 보았다.
“동희 형~!”
난 한달음에 다가가 와락 안았다.
“어쩐 일이야~? 어서 와~ 형!”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착한 형.
“아이~ 잠깐만!”
정동희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난 빨리 들어오라고 팔을 잡아끌었다.
“덕후야, 형, 넘어지겠다.”
결국 어머니가 핀잔을 주셨지만.
난 어쩔 수 없었다. 동희 형 얼굴을 보자마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있어서.
이 나이, 어쩔 수 없다.
“큰삼촌 계세요?”
정동희는 대뜸 김 부장부터 찾았다.
“아직이다. 연락하고 온 거니?”
막냇삼촌의 물음에 정동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뵙고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아직 안 오셨구나.”
“거의 올 때 됐어.”
정동희의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 있나?
약 5분 뒤.
띵동!
“다녀왔습니다~!”
서류 가방을 든 김 부장이 여느 때처럼 찌들은 얼굴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바로 서류 가방을 받아 드셨고.
“아~ 배고프다. 오래 기다리셨죠? 어서 식사하시…… 어?”
들어오자마자, 김 부장은 정동희를 발견했다.
“동희 왔냐? 웬일이야?”
“큰삼촌, 안녕하세요.”
“어, 그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김 부장은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뭔데 그래? 밥은 먹었냐?”
“아직이요.”
“그래,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밥상에 앉자마자, 정동희가 말했다.
“아침마당놀이에서 연락 왔어요.”
음?!
난 놀라서 눈을 번쩍 떴고.
김 부장은 밥숟가락을 들다가 멈췄다.
“뭔 소리야? 아침마당놀이? JBS 방송 말하는 거야? 거기서 왜 동희한테 연락을 해?”
큰삼촌이 되물었고.
그 옆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그거 어멈이랑 매일 보는 건데. 특히 토요일에 하는 노래자랑이 재밌어.”
“…….”
“왜? 동희, 거기 노래자랑 나가냐?”
할머니의 물음에 정동희는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아니요, 저 말고 덕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