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집으로
버스에 오르지 않고, 계속 머뭇거리자.
신바람은 우리를 꼭 안아 주었다.
“항상 건강해라. 너희들은 반드시 잘될 거야, 잘 될 수밖에 없어.”
“…….”
정진이 신바람에게 안긴 채로 말했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 이제 진짜 새로운 삶을 살아 보겠습니다.”
“그래, 넌 다시 일어서야지.”
정진이 겨우 10살이긴 하지만 성공을 맛본 뒤 좌절을 겪은 아이다.
애늙은이 같은 말이지만 나와 신바람은 그의 과거를 알기에 이해가 되었다.
신바람은 머리를 젓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다, 넌 이미 일어났어. 항상 겸손해라, 넌 겸손하기만 하면 돼.”
“네, 선생님.”
신바람은 정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난 조심스럽게 신바람을 불렀다.
“선생님…….”
할 말은 많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보다는 자꾸 울음이 나오려 했다.
의연하게 헤어지고 싶은데.
가끔 내 의지와 상관없이 8살 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특히 툭 하면 눈물이 나오는데.
지금 내 아랫입술이 떨리며 눈가에 물이 자꾸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8살은 8살이다.
어쩔 수 없다.
“어이구~ 우리 막둥이, 또 우는 거야?”
신바람은 웃으며 내 엉덩이를 토닥였다.
“덕후야, 넌 크게 될 놈이야. 무리수만 두지 마라. 그러면 돼. 내가 보기엔 넌 정진처럼 나대지도 않을 거 같고.”
“무리수라면 어떤 걸까요?”
“음…… 글쎄다.”
신바람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서두르는 것?”
서두르는 것이라…….
“나아가야 할 때, 한 번 만 더 생각해라. 넌 아직 밀어붙일 때가 아니야.”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 약간은 이해되었다.
정진은 우리가 뭔 소리 하는지 눈만 끔뻑였다.
“이 요물 같은 녀석, 역시 넌 알아듣는구나.”
“…….”
신바람은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타세요~ 버스 출발합니다.”
버스 기사 목소리가 들렸다.
자꾸 망설이는 우리를 신바람은 등 떠밀었다.
“어서 가라! 담에 보자!”
“네, 선생님.”
“조심히 올라가고! 정진아, 동생 잘 챙겨라!”
“염려 마세요, 선생님.”
정진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고.
위이잉―
버스 문이 닫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신바람의 모습.
노란 정장을 입은 멋진 신사.
그는 우리를 향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슴을 가진.
헤아릴 수 없는 슬픔도 가졌으며.
하늘 끝까지 오르는 흥도 가진 남자다.
전생까지 합쳐서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 중 가진 멋진 사람.
난 오늘 이 멋진 선생님과 이별했다.
토닥, 토닥.
정진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젠장, 8살은 원래 이런 건가.’
* * *
휴게소 도착했다.
정진과 나는 밖 벤치에 앉아 츄러스를 하나씩 물었다.
―쟤네들 뭐야?
―연예인인가?
―엄마, 저도 저런 옷 사 주세요!
하얀 정장을 입고 있는 정진과 핑크 정장의 나.
“형, 옷을 갈아입고 갈까?”
“아니야, 됐어. 오랜만에 가족들 만나는데 가장 멋진 옷을 입고 가야지.”
“근데 영 불편하네…… 사람들 쳐다보는 게.”
“치.”
정진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얀마, 벌써부터 뽕 물이 빠지는 거야? 여태껏 훈련한 건 뭐야?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면 어떡하냐?”
“하하.”
그의 말에 신나게 웃다가.
정진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되는구나.”
“…….”
“우리 그동안 재밌었다, 그치?”
“맞아, 나도 형이랑 선생님이랑 즐거웠어.”
정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미당부터 안동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꿈처럼 느껴지네.”
“…….”
원미당에서의 훈련, 대낮에 마당에서 춤추고, 할머니 집에 밥 얻어먹으러 가고.
김천 자두 포도 축제에서 첫 무대를 서고, 노인정 공연, 돌잔치 공연, 손가락 박수 등등…….
지난 3주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또한 현실이었는데 왜 꿈처럼 느껴질까.
생각할수록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씁쓸했다.
그 소중하고 재밌던 시간도 결국엔 지나간 것이니.
“덕후야, 우리 서울 가서도 자주 보자.”
“물론이지, 우린 듀엣이잖아? 방울형제.”
“하하, 그렇지. 우리 같이 공연도 다니고~ 재밌게 활동하자.”
“완전 좋지.”
버스 앞에서 승객 찾느라 기사가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어이쿠야, 빨리 가야겠다.”
우리는 츄러스를 입안에 털어 넣고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
어느덧 1시간이 흘러.
조금씩 높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도 많아지고, 도로도 커지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조금 더 가자 한강이 보였다.
그리고 곧 올림픽 대교가 보였다.
“형, 이제 곧 도착하겠다.”
“응?”
“올릭픽 대교잖아, 동서울 터미널은 저거 보이면 거의 다 온 거야.”
“그래? 너 왜 이렇게 잘 알아? 서울 벗어나는 거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었냐?”
“…….”
실수했다, 괜히 아는 척했네.
“TV에서 봤어.”
“음…… 그래?”
정진은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넘어갔다.
사람의 적응력이라는 게 참…….
고작 3주 벗어나 있었다고 서울이 이렇게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지다니.
수많은 차와 건물.
창가 쪽에 앉은 나는 신기한 듯 계속 창밖을 구경했다.
올림픽 대교를 건너.
버스는 동서울 터미널로 들어갔다.
끼이익.
도착했다.
두근, 두근.
이제 내리면 되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릴까?
“덕후야, 가자.”
정진이 먼저 일어나며 말했다.
“어, 형.”
내가 일어나자 정진은 날 꼭 껴안았다.
“음?”
“우리 작별 인사는 여기서 하자, 왠지 내리면 정신없을 거 같아서.”
“그래. 형.”
나도 정진을 안아 주었다.
“난 집에 걸어갈 거야. 바로 앞이라서.”
“부모님 안 나오셔?”
“응, 항상 바쁘셔.”
그래도 아들이 3주 만에 오는데.
어쨌든 남의 집 사정이니 더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또 보자, 형 먼저 갈게.”
터미널에 도착하자 정진은 좀 서두르는 느낌이었다.
“어~ 형, 곧 봐~”
“그래!”
정진은 환하게 손을 흔들며 차에서 내렸다.
나도 짐을 챙기고 버스를 내렸다.
휴우~!
내리자마자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확실히 공기 향이 다르다.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려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와락!
누군가 빠르게 다가와 날 세차게 껴안았고.
내 몸이 하늘로 들렸다.
으응?!
“아이고~ 우리 아들!”
어머니 목소리였다!
* * *
“덕후야~!”
어머니는 날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데 눈가에 물기가 어려있었다.
“으아앙―!”
어머니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난 울어 버렸다.
젠장!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눈에서 수도꼭지 틀어놓은 듯, 펑펑 울었다.
“엄마앙―! 으아앙~!”
“아이고~ 우리 아들,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흑흑.”
급기야 어머니도 우셨고.
우리는 꼭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너무 보고 시퍼써요~”
아…… 이상하다, 왜 갑자기 혀가 짧아지지?
“나도~ 우리 아들 보고 싶어서 혼났어~!”
“엄마앙―!”
난 어머니를 꽉 껴안았다.
너무 따뜻하고 포근했다.
턱.
그때,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데.
“덕후야, 잘 다녀왔니?”
김 부장이었다.
난 멍하니 그를 바라봤고.
그는 반가움과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젠장…… 나도 반가웠다.
거부감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반가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김 부장 앞에서 이렇게 아이 같은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
난 눈가를 훔치고 짧게 대답했다.
“잘 갔다 왔어.”
차갑게 뱉은 한 마디에 김 부장은 약간 서운해하는 듯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도 인사해라.”
“응?!”
김 부장 뒤에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삼촌들도 다 와 있었다.
“어이쿠~ 우리 강아지!”
“짜샤~ 하하!”
내가 왔다고 온 가족이 다 마중 나온 것이다.
할머니는 날 꼭 안아 주셨고, 삼촌들은 내 엉덩이를 향해 아프지 않게 발길질을 했다. 애정이 듬뿍 담긴 발길질.
“이야~ 덕후 많이 컸네?”
큰삼촌의 말에 막냇삼촌도 웃으며 말했다.
“야, 근데 옷은 좀 오바다, 트롯 하는 거 티 내고 다니는 거야? 꼬라지가 이게 뭐냐? 하하.”
“하하.”
난 따라 웃으며 가족들을 찬찬히 보았다.
어머니는 좀 수척해지신 것 같고.
다른 가족들은 다 3주 전과 비슷해 보였다.
근데……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한 여자가 계속 우리 가족 뒤에 서 있었다.
내가 이상한 듯 바라보자 막냇삼촌이 웃으며 말했다.
“아~ 덕후는 처음 보겠구나? 네 큰삼촌 여자친구다.”
“으잉?!”
난 놀랐고.
큰삼촌이 살짝 부끄러워했다.
여자친구라 불린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와~ 큰삼촌!”
현재 33세의 큰삼촌 김진만.
명절 때마다 노총각이라고 눈치를 많이 받았는데.
우리 가족에 큰 변화가 있었구나!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 올 정도면…… 꽤 진전이 있는 사인 거 같은데?
“작은엄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김덕후예요!”
난 반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고.
‘작은엄마’라는 말에 큰삼촌과 여자친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얀마, 작은엄마는 무슨…….”
말은 이러면서도 큰삼촌은 좋아했다.
내 말에 다들 즐거워했지만 유독 할머니 표정만 좋지 않았다.
“자자, 이제 집으로 가자. 덕후 배고프겠네.”
김 부장이 앞장섰다.
* * *
3주 만에 온 집.
너무 좋았다. 그냥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바깥 생활을 하면서 집과 가족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이번 주말만 지나고 나면 바로 개학.
밀린 방학 숙제를 해야 했다.
숙제 자체는 너무 쉬웠지만 노가다나 마찬가지였다.
“덕후야, 누나가 도와줄게.”
누나 김지아.
비교적 내게 잘해 주는 편이었지만 숙제까지 대신해 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3주간 집을 비운 변화 중의 하나였다.
누나는 내게 너무나 잘해 주었다.
“누나도 내일 개학이잖아.”
“난 다 했어. 너 놀다가 온 거 아니잖아.”
오자마자 숙제하느라 씨름하는 내가 안쓰러웠던 건가.
“나머지는 누나가 할 테니까, 나가서 친구들 만나고 와. 정훈이 만난 지도 오래됐잖아.”
그럴 염치는 없었다.
누나와 함께 방학 숙제를 서둘러 했고 다행히 잠들기 전에 끝마칠 수 있었다.
그중 일기 쓰기가 가장 빡셌다.
3주 분량의 일기를 하루 만에 쓰려니…….
* * *
다음 날, 등교했다.
음악에 집중하고자 스스로 외톨이처럼 지냈었다.
오랜만에 온 학교지만 내게 반갑게 아는 척하는 친구는 없었다.
3주간의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
“친구야~ 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어?”
내가 먼저 다가가 밝게 인사하자, 친구들이 어색해했다.
‘사람은 소중하다는 것.’
“야~ 너희 김천 가 봤어? 거기 자두 포도 축제가 있는데…….”
내가 먼저 재잘거리며 말을 걸기 시작하니, 친구들이 조금씩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함께 잘 지내고 싶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모든 사람은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