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필승엔터테인먼트(2)
아…… 이 냄새.
아침부터 익숙한 냄새에 살며시 눈을 떴다.
“엇?!”
7시.
벽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늦잠을 자다니!
난 놀라서 화들짝 일어났다.
“어라?”
역시 이 익숙한 향은 라면이었다.
식탁 위에 놓인 컵라면에 신바람이 물을 따르고 있었다.
“아, 선생님.”
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신바람과 훈련을 시작한 이후로 늦잠을 자 본 건 처음이다.
“죄송합니다…….”
“됐다. 일부러 안 깨웠다. 공연 다음 날은 쉴 수 있으면 푹 쉬는 게 좋지.”
그러고 보니…… 정진도 자고 있었다.
“쉴 수 있으면요?”
“그래, 유명세를 탄다면 바빠질 거고, 공연 마치면 다음 스케줄을 따라가야 해서 쉴 시간도 없거든. 더군다나 너희는 어리니까 잘 쉬는 것도 중요해. 어제 무대에 서면서 온몸에 기운이 다 빨렸을 거다.”
그러면서 라면을 끓여 주는 건 뭐지.
후루룩.
신바람은 피식 웃으며 라면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정진도 깨우고. 어서 와서 먹어라.”
“네, 선생님.”
후루룩.
나와 정진은 정신없이 라면을 털어 넣었다.
매일 먹는 라면인데도 오늘 참 잘 들어간다.
난 라면을 입에 넣으며 묵묵히 신바람을 바라보았다.
어제 우리가 무대에 선 시점부터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다.
아침에 늦잠을 자게 해 주는 것도 그렇고, 어제 무대 끝난 후 따뜻하게 안아 줬던 것도…….
지금까지 한 치의 틈 없이 몰아세웠던 사람이었는데…… 좀 이상하다.
“다 먹었냐?”
그런 생각을 해서일까? 목소리 톤도 좀 달라진 기분이다.
“네!”
“어디 보자…….”
신바람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했다.
“여보세요? 아, 네. 신바람입니다.”
어젯밤처럼 전화기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잡았다.
“아직 출근 전이시죠? 네, 네. 덕후 깼습니다.”
누구지? 불안한데.
“네, 잠시만요.”
신바람은 내게 핸드폰을 건네었다.
“자, 받아라.”
“…….”
왠지 받고 싶지 않은데?
“누군데요?”
“네, 아빠.”
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받았다.
“네, 김덕후입니다.”
[아들아.]
헛…… 뭐지?
날 부르는 첫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 같다.
설마…… 김 부장 목소리가 반가운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근데 자꾸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서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
“…….”
신바람은 휴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눈물이 맺히고 있다는 사실을 난 애써 부정했다.
휴우―!
난 심호흡을 하고 간신히 입을 뗐다.
“……왜 전화했어?”
[잘 지내나 싶어서. 어디 아픈 데 없지?]
“……없어.”
[…….]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김 부장은 뭔가 할 말을 생각하는 듯했다.
[가족들 모두 잘 지내고 있고, 매일 덕후, 네 얘기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가족 생각하면서 힘내렴.]
“…….”
[아빠도 회사 일 하다가 힘들 때는 그렇게 하거든.]
아무래도 전화를 끊어야 할 것 같았다.
더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
김 부장은 내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 입을 떼기가…….
[그래. 건강한 거 알았고. 목소리 들었으니 됐다. 이만 끊자.]
“…….”
김 부장은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아빠.”
[응?]
“걱정하지 마…… 말라고, 가족들한테 그렇게 전해 줘.”
훗.
전화기 너머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냐, 알았다.]
“…….”
뚝.
전화를 끊은 후. 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토닥. 토닥.
누군가 내 등을 두드리는데, 정진이었다.
“으이구, 우리 막둥이. 집 나와서 고생이 많네.”
“…….”
고마웠다.
정진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신바람은 피식 웃고는 우릴 향해 말했다.
“숙소에서 잠깐 쉬고 있어라. 선생님은 볼일 있어서 잠깐만 나갔다 올게.”
* * *
모텔 근처의 한 제과점.
조필승 사장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신바람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아, 네. 안녕하세요.”
신바람은 어제 김 부장과의 통화 후, 조필승과 바로 약속을 잡았다.
김 부장으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활용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니 신바람 선생님 뜻대로 하시되, 연은 유지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데뷔시키지는 말고요. 아직 덕후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필승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덕후 아버님은 긍정적인 답변을 주셨나요?”
“흠…… 긍정적이긴 하죠, 좀 애매하긴 하지만.”
“……말씀해 보시죠.”
신바람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필승엔터테인먼트가 사장님 말씀대로 실력 있고 유망한 곳인 건 알겠어요. 하지만 덕후를 지금 그곳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어립니다.”
“에이~ 염려 마세요. 요즘 기획사는 육성 시스템도 있고, 더군다나 저희는 소수 정예로 운영하기 때문에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을 겁니다. 관리하는 가수도 몇 명 없어요.”
관리하는 가수가 몇 명 없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부풀려 말하기 십상인데.
신바람은 이런 점을 높게 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어쨌든 너무 어릴 적부터 기획사에 교육 주도권을 넘기지 않겠다는 게 덕후 아버님 방침입니다.”
“…….”
조필승 사장은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신바람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죠? 거절하실 거면 이렇게 만나자고 하진 않으셨을 거고?”
“추후 김덕후 데뷔할 때 우선 협상권을 드릴 테니, 지금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협상권? 그게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입니다. 동일한 조건이면 필승엔터테인먼트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거죠.”
“아니, 그 말인즉슨 다른 기획사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당연히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죠.”
“헛, 이건 너무 좀…….”
조필승은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싫으세요? 싫으시면 안 하면 됩니다. 이만 일어날까요?”
신바람은 전혀 아쉬운 게 없어 보였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필승은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헤이~ 얘기나 한번 들어봅시다. 뭘 원하시는데요?”
신바람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덕후가 지금 훈련 중이고, 무대에 많이 서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의 계획을 차근히 설명해 주었고, 조필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뭐, 어려운 건 아니네요. 근데…… 정진이라는 아이도 꼭 같이 다녀야 합니까?”
“당연하죠, 묶음 세트입니다.”
“아, 한 명한테 집중하는 게 좋은데…….”
신바람은 이 말에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요. 함께 성장해야 훨씬 더 잘 큽니다.”
“아…… 뭐 알겠습니다.”
조필승은 떨떠름하게 대꾸하고는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잡아 드리면 될까요?”
“당장 내일부터요. 최대한 빡빡하게.”
“흠…… 알겠습니다.”
신바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가능성 높은 투자라고 생각하세요, 덕후 무대 보셔서 알잖아요?”
“흠…… 그래요.”
조필승은 신바람의 손을 꼭 잡았다.
“근데…… 신바람 씨, 듣던 것과는 좀 다르네요?”
“쓸데없는 소리는 마시고. 그럼 먼저 갑니다. 무대 잡히면 문자로 알려 주세요.”
신바람은 곧바로 제과점 문을 나섰다.
* * *
덜컹.
어이쿠, 깜짝이야.
“잘들 쉬고 있었냐?”
모텔 방에 있다 보니, 이렇게 갑자기 누가 들어오면 깜짝 놀라게 된다.
신바람은 체크아웃 시각 직전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오늘 어딘가로 이동하는 거겠지?
“자, 다들 나가자. 오후 훈련 나간다.”
오후 훈련?
난 의아하여 물어봤다.
“오늘도 김천에 있는 거예요?”
“왜, 빨리 이동하고 싶으냐?”
“아니요, 그게…… 여기 더 있을 일이 없는 거 같아서요.”
신바람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우리는 내일 이동한다. 오늘 하루 김천에 더 있을 거야. 너희들, 긴급하게 배워야 할 게 있거든.”
“…….”
그 말에 나와 정진은 마주 보았다.
배워야 할 게 있다고?
왠지 불안한데.
* * *
연화지.
신바람이 데려온 곳은 연꽃으로 가득한 연못이었다.
그리고 연못 가운데에 오래된 정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엔 ‘봉황대’라고 쓰여 있었다.
연못이 크지는 않았지만, 연꽃으로 가득 채워진 게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주변 풍광이 참 평화로웠다.
“여기가 조선시대 때 풍류객들이 시를 읊고 놀던 곳이란다.”
신바람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유를 갖고 삶을 즐기는 모습. 이런 게 진정으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 아니겠느냐?”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릿결을 날렸다.
나이 오십에 매 끼니 라면만 먹고, 주거 불안, 고용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신바람은 말 그대로 불안 덩어리인데, 안정적인 삶을 사는 직장인들보다 얼굴이 더 평화로워 보인다.
탈모도 없고.
머리도 아주 풍성하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저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습니다.”
나 또한 진심으로 말했다.
하지만 신바람은 정색했다.
“나처럼 살라고 말한 건 아니야. 절대로 김진하 씨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교육 이상하게 했다고 선생님 큰일 난다.”
“…….”
정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화지를 바라봤다.
“아니, 이게 뭐 볼 게 있다고……. 덕후야, 넌 이게 좋냐? 사람도 없고…….”
하긴, 어린아이의 시선으로는 별 감흥이 안 느껴지겠지.
“선생님! 뭐 가르치실 건데요? 빨리하고 가죠!”
“따라와라.”
우리는 신바람을 따라서 연화지를 가로질러 봉황대 안으로 들어갔다.
봉황대 정자 안에 우리 셋은 나란히 앉았다.
“자, 내가 너희들에게 오늘 알려 줄 것은…… 기술이야.”
“기술?!”
정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놀랍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본만 얘기하던 신바람이…… 기술을?!
“어제 너희들은 연주가 있는 무대에 섰잖아?”
“네.”
“스피커도 있고, 반주도 빵빵하게 나오고.”
“…….”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괜히 불안하게.
“자고로 가수라면 음향 지원이 안 되는 곳에서도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해.”
“…….”
신바람의 표정은 진지했다.
“무반주에서도 음정은 머릿속으로 기억해서 해내기 쉽지만, 박자까지 맞추는 건 어렵거든. 특히나 듣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박자도 고려해야 하는데…… 관객과 나의 박자를 맞춘다는 게 쉽지 않아.”
“…….”
“그래서 박자만큼은 제삼자의 도움이 필요하지.”
“근데 방금 악기가 없는 경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정진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아니, 난 음향 지원을 말한 거지. 악기라는 건 우리 몸에도 있다.”
씩―!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는데.
느낌이 싸했다.
“잘 봐라, 손과 발을 이용해 박자를 맞추는 거야.”
쿵. 쿵.
신바람은 발을 몇 번 굴렀다.
“발은 굵은 박자를 치는 거야.”
쿵. 쿵. 쿵.
그리고 신바람은 발을 몇 번 더 세게 굴렀다.
“…….”
나와 정진은 황당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딴 걸 스킬이라고…….’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자, 그리고 손으로 메인 박자를 탄다.”
툭. 다다다닥. 툭. 다다닥. 툭다락. 툭다락.
헐…….
왼손을 아래에 받치고, 그 위로 오른손을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 손가락을 뻗으면서 때리는데.
오른손 모양에 따라서 박자 소리가 미묘하게 달랐다.
게다가 동작도 뭔가 신났다.
박자를 맞추는 춤 같은 느낌?
“자 여기에 발 박자를 추가해서 함께하면…….”
툭 다다다닥 쿵. 쿵. 툭 다다닥 쿵. 툭다락 쿵. 툭다락 쿵.
신바람은 어깨를 들썩이며 박자를 맞췄고.
내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정진은 어느새 문워크를 추고 있었다.
툭 다다다닥 쿵. 쿵. 툭 다다닥
신바람은 피리 부는 사나이.
우리는 뱀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