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제안(2)
그리고 난 더 말하지 않았다.
난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은 내렸지만, 쉽지 않은 결정을 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김 부장이 어떤 제안을 할까.
혹시 자신을 아버지로서 적극적으로 사랑해 달라는…… 그런 제안을 하지는 않겠지?
“덕후야, 왜 말이 없어?”
정동희가 말했고, 그 옆에 있던 송사무엘이 피식 웃었다.
“진짜 집안 분위기 대박이다. 이게 아빠와 아들의 대화야? 더군다나 덕후 얘, 7살이야.”
정동희는 송사무엘의 말에 살짝 김 부장 눈치를 보았고.
“야야, 다 들려. 큰삼촌 성격 장난 아니야.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
송사무엘은 이 말에 곧바로 입을 닫아 버렸다.
근데 정동희는 김 부장이 성깔 있는 걸 어떻게 알지? 뭘 본 게 있었나?
“덕후야, 내 말 안 들려?”
정동희가 채근했다.
벌써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대기하고 앉아 있은 지 20분은 지났다.
이제 된 것 같다. 난 김 부장을 바라봤다.
“제안을 얘기해 봐, 이 정도면 아빠도 충분히 생각해 봤을 것 같은데?”
“…….”
“들어 보고 결정할게. 물론 웬만하면 받아들일 생각이야. 하지만 너무 무리한 제안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얼마든지 생각은 바뀔 수 있으니까.”
헛…….
내 말에 송사무엘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쟨 7살이 아니야.’
김 부장도 지지 않았다.
“이건 양방 합의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집안에서 공식적인 허가는 없다.”
“…….”
흠…….
김 부장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첫 번째는 아까 말했듯 오디션은 참가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그 시기는 내가 결정한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너무 어려.”
“…….”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 같았다.
사실 나 또한 반드시 오디션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니까, 임시방편으로 고려해 봤던 것이다.
“다음은?”
난 부정을 안 하는 것으로 긍정을 표현했다.
김 부장은 다음 제안을 얘기했다.
“두 번째는 내가 제안하는 방식으로 음악 활동을 한다. 선생님 선정부터 교육 방식까지 모두 내 의견을 따라야 해.”
“…….”
“넌 그 틀 안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 된다.”
틀 안에서 자유롭게?
그게 자유로운 건가.
“시기는?”
“주민등록증 나올 때까지.”
흠…… 그건 너무 늦다.
이건 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중학교 졸업까지로 해. 그리고 아빠의 방식을 따르겠지만, 나도 의견 개진은 할 수 있어야 해.”
“흠…….”
김 부장은 신음을 내며 잠시 고민하더니…….
“좋아, 대신에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알지?”
“…….”
“중학교 졸업까지 결정권은 아빠한테 있는 거야.”
난 살짝 고개를 까딱하고는 말했다.
“다음은?”
김 부장은 목 스트레칭을 하고선 말했다.
“물 한 잔 마시고 하자.”
“좋아.”
* * *
난 송사무엘, 정동희와 함께 바람 쐬러 잠깐 나왔다.
“아오~ 숨 막혀.”
송사무엘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너, 아빠랑 무슨 밀거래 하니?”
“…….”
“그냥 좀 다정하고 사이좋게 얘기하면 안 되는 거야?”
송사무엘이 이 특수한 관계를 알 수가 없다.
하긴…… 이 세상에 나 외에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지.
“집안일이라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는 점 양해해 줘.”
“아오~ 숨 막혀. 나한테까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정동희는 송사무엘의 반응에 웃으며 말했다.
“덕후야, 다행이다. 어쨌든 음악 하는 쪽으로 얘기되는 거니까.”
“응. 형.”
정동희는 머쓱하게 웃고는 말했다.
“너, 저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느끼는 점이 많네. 하하.”
“뭐가?”
“내가 너라면 이렇게 용기 있게 말 못 꺼냈을 거 같거든. 마침 친척 형도 왔겠다, 형 뒤에 숨어서 도움을 요청했을 것 같은데.”
“…….”
“문제는 피하는 게 아니라 맞서는 거라고? 하하, 네가 그렇게 말했었잖아.”
정동희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의 말에 나 또한 피식 웃었다. 정동희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어째 꼭 형처럼 말한단 말이야. 하여간 대단해.”
35년 더하기 7이니까.
42년. 인생을 42년 살았다.
거기다 한번 죽었다가 태어났다.
내가 형이 맞기는 해.
“형들~ 머리 다 식혔어? 이제 들어가 볼까?”
송사무엘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아오~ 그냥 너 혼자 들어가면 안 되냐?”
“편할 대로 해!”
난 성큼성큼 집으로 들어갔고, 결국 송사무엘도 따라 들어왔다.
집 안 거실.
김 부장은 아까 자세 그대로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빨리 얘기하자. 곧 있으면 9시네. 잘 시간이야.”
“…….”
“내가 오늘 좀 피곤해서.”
내 말에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말했다.
“세 번째, 학업은 유지해라. 음악 한다고 해서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돼.”
“수준은?”
“최소 평균은 해야 한다.”
“…….”
“내 생각엔 네가 평균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건 일도 아닐 거야. 성실성의 문제지.”
김 부장은 내가 명석한 아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평균은 해야 한다는 건 그 이상도 상관없다는 뜻 맞지?”
“맞아, 1등을 해도 상관은 없다.”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송사무엘이 정동희에게 말하는 게 들렸다.
“이 부자는 무슨 1등 하는 걸 참 편하게 얘기하네?”
“삼촌이 우리 학교 차석으로 입학한 사람이거든. 덕후도 3살 때부터 글 읽었어. 뭐…… 대충 그림 나오잖아.”
“…….”
송사무엘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네 번째는, 본격적인 음악 학습은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터 시작한다.”
김 부장은 이번엔 송사무엘과 정동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전까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음악 학습은 하지 않는다. 이게 네 번째 조건이다.”
왜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부터일까?
난 내심 궁금하여 물었다.
“왜 그때부터 해야 한다는 거지?”
“이유는 묻지 마라. 넌 그저 그전까지는 아이로 사는 삶에 충실해라.”
“…….”
“친구들과 뛰어놀고, 책도 읽고, 놀러 다니고. 그냥 그렇게 지내는 거야.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는다.”
지금이 10월이니까. 적어도 8개월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아, 이건 좀 받아들이긴 힘드네.
빨리 배우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는데.
“음악을 듣거나, 노래 부르는 건 상관없지?”
“놀이나 취미의 목적이라면 상관없다.”
흠…… 그렇다면.
날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아직도 더 남았어? 조건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이제 마지막이다.”
“…….”
마지막 조건.
김 부장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꿀꺽.
거실에 있는 모든 사람은 김 부장의 입만 집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
“절대로, 절대로.”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강조를 하는 거지?
“중간에 관두지 마라.”
‘…….’
“음악을 일단 시작했으면 절대로 관두지 말고, 반드시 끝장을 봐라. 무슨 일이 있어도.”
김 부장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이게…… 마지막 조건이다. 이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줘야 해.”
“…….”
김 부장의 마지막 말에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난 붉어진 김 부장의 눈을 마주했다.
큰 고모에게 과거 얘기를 들어서일까.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 정도에 감정에 휩싸일 내가 아니지.
“알겠어, 아빠가 말한 조건 받아들일게. 단 나도 조건이 있어. 딱 두 개야.”
“네가 조건이 있다고?”
“이건 합의라고 했잖아. 일방적인 거 아니라며.”
옆에서 송사무엘이 혀를 내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좋아, 들어 보자.”
난 김 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할 음악 장르는 스스로 결정할 거야. 그에 대한 교육 방식은 아빠가 정하겠지만, 어쨌건 장르는 내가 정할 거야.”
“생각해 둔 장르가 있는 거냐?”
“있어.”
‘트롯’을 할 것이다.
난 벨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생각해 둔 장르가 있다는 말에 정동희와 송사무엘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아직 두 사람에게도 말 안 한 부분이니까.
“지금 말하기 싫다는 거지?”
지금은 아니다.
중요한 협상에서 불필요한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 받아들이마. 하지만 적어도 내년 3월까지는 알려 줘야 해.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하니까.”
“알겠어.”
“나머지 하나는?”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이걸 내가 관여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한배를 탄 이상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맘이 편할 것 같았다.
“이번 주 주말에 회사 야유회 있다고 했지?”
“갑자기 그건 왜?”
“거기 나 가도 되지? 주말에 하는 거면 가족 참여 가능할 것 같은데.”
“권장 사항이긴 하지. 근데 진짜 네가 거기에 간다고?”
김 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전엔 김 부장이 그렇게 가자고 해도 절대로 안 갔었다.
“마지막 조건은 거기서 말할게. 없을 수도 있어.”
이 말에 김 부장은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었고.
“걱정 마, 우리 집 가계에 영향이 갈 텐데. 절대 깽판 안 놔.”
이 말에 김 부장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중요한 얘기는 다 끝났다.
하지만 내심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음악을 극도로 멀리한 거였을까?
하고 싶었던 음악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서?
아니면 할머니 마음 아프게 하기 싫어서?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정말 그 이유 때문일까?
“아빠.”
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내 부름에 멈췄다.
“얘기해.”
“왜 음악이 싫어?”
“…….”
김 부장의 풀어졌던 얼굴이 다시 굳기 시작했다.
아, 괜한 걸 물어봤나.
“어서 씻고, 잘 준비해라.”
김 부장은 대꾸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도봉산의 다락원 캠프장.
회사 야유회.
야유회는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진행됐다.
지금은 2004년. 난 2015년 입사자였기 때문에, 나의 입사 년도 기준으로 무려 11년 전이다.
아는 얼굴들은 당연히 없었고, 알 듯 말 듯 한 사람들도 내가 근무할 당시와는 시차가 많이 나서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김 과장~!”
과장이구나. 대리 아니면 과장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성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어이쿠~ 웬일로 가족들을 다 데리고 왔네?”
“하하, 네. 날씨도 좋고 해서 다 데리고 왔습니다.”
김 부장은 가족들을 인사시켰다.
“여긴 제 와이프고요, 첫째 딸 지아, 둘째 아들 덕후입니다.”
“어~ 그래, 제수씨, 반가워요. 너희들도 반갑다~!”
배가 볼록 나온 성 부장이라는 남자.
얼굴이 생소한 걸 보니, 내가 입사 전에 퇴사했나 보다.
“어서 인사들 해, 우리 영업 2팀 팀장님이셔.”
“안녕하세요~!”
우리 가족은 공손히 인사했다.
“하하, 에이스 김 과장이 가족들을 데려오니까 더 좋은데? 마음껏 즐기다 가세요~!”
“네!”
높고 푸른 하늘.
공기는 선선하지만 따뜻한 태양.
가을 하늘 아래 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에서, 우린 즐겁게 지냈다.
직원들은 다양한 게임을 하며 야유회를 즐겼는데, 내가 회사 다닐 때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나 때는 개인주의가 심하고 몸 쓰는 거 안 좋아해서 야유회라는 거 자체가 거의 없었다.
좀 번거로움은 있겠지만 이 시절만의 낭만이 있는 것 같다.
반쯤은 취해서 해롱거리며 게임을 하는 직원들을 보는 게 재밌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난 계속 김 부장을 관찰했다.
응?
김 부장은 족구 게임을 마치고, 어느 구석진 곳으로 갔다.
난 뭔가 싶어서 따라가 봤다.
혹시 이때도 그랬을까, 설마?
우거진 나무 뒤로 김 부장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 앞에는 젊은 남자 직원 세 명이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