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만남(2)
“아니요, 배운 적 없는데요?”
“진짜?”
정동희는 신기하다는 듯 김덕후를 바라봤다.
“그럼 방금 뭐야?”
김덕후는 정동희의 질문이 황당했다.
‘뭐냐고? 그냥 논 건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집에서 혼자 있기가 너무 심심해서요. 그냥 피아노 가지고 논 거예요.”
딩동. 딩동.
김덕후는 건반을 여러 개 눌러 본 뒤에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너무 재밌던데요? 저 피아노 처음 만져 보거든요.”
정동희는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려 봤다.
사실 그는 방에 10분 전쯤 들어와 있었다.
조그만 남자아이가 한 손으로만 건반을 두들기는데 뭔가 신기했었다.
“배운 적이 없는데, 음을 알아?”
“모르죠.”
“근데, 어떻게 그렇게 쳐?”
“그냥 듣기에 좋도록 누른 건데요?”
“…….”
대화를 나눌수록 정동희는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너, 검은 건반도 누르던데.”
“네.”
“검은 건반이 무슨 뜻인지 아니?”
“글쎄요…….”
김덕후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얀 건반의 사이음 같던데요?”
“…….”
“하얀 건반만 눌러서 듣기가 안 좋을 때가 있더라고요. 흠…….”
김덕후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 여자가 눈물을 흘린다고 가정했을 때,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거나 절규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
“그 사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감정을 누르며 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드라마 보니까,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갔을 때 그렇게 울던데.”
김덕후의 표정이 신나 보였다. 음악 얘기를 하는데,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검은 건반이 그런 역할인 거 같아요. 감정의 사이.”
“감정의 사이라…….”
정동희는 김덕후의 말을 되씹었다.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를 쳐 왔고, 지금은 국내 최고의 음대를 다니고 있다.
검은 건반을 두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처음 들어 봤다.
“재밌구나, 너랑 대화하는 게.”
“하하. 저도요.”
정동희는 철저한 학원 교육의 온상이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계획하에 자랐고, 재능보다는 노력으로 차근차근 올라왔다.
그는 음악을 하면서 성과를 얻었을 때, 혹은 어머니가 칭찬했을 때 기쁨을 느꼈다.
그게 음악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었다.
어리긴 하지만 김덕후의 기대에 가득 찬 눈빛. 생기 있는 얼굴.
그리고 본인은 갖지 못했던 재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신선했고, 부러웠다.
그리고 이 아이가 궁금해졌다.
“저…… 동희 형.”
“응?”
김덕후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정동희를 바라봤다.
“저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응? 뭘?”
“저…… 음악을 하고 싶어요.”
“…….”
설익은 말이 아니었다.
단 한마디지만 김덕후는 진심을 담아 간절히 말했다.
‘음악을 하고 싶다.’
이 말이 정동희의 귀에 꽂혔다.
너무나 간단하고 대단한 거 없는 말이지만.
스스로 잊고 살았던 말.
‘나도 음악을 하고 싶었던가?’
순수한 열정 앞에 정동희는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뭐든 좋으니까요. 형.”
김덕후는 간절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말했고, 정동희는 황당한 듯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 물건이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데?”
* * *
“네?”
어떤 음악을 하고 싶냐고?
하긴…… 음악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그런 건 생각 못 해 봤다.
“그건 앞으로 생각해 보려고요. 지금은 뭐든지 좋아요.”
다행히 정동희는 사람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내가 35년을 살았는데, 대충 인상 보면 느낌이 온다.
“하하. 뭐든지 좋아?”
“네.”
그리고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근데, 형 몇 살이에요?”
“23살이야~ 지금 4학년.”
23살인데, 4학년이라고?
좀 시기가 애매한데?
“군대는요?”
“아직 안 갔어~ 근데 뭔 7살짜리가 대뜸 군대부터 물어보냐? 안 그래도 요즘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인데.”
“앗. 미안요.”
20대 초반을 만나면 군필부터 물어보게 된다.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정동희는 날 보고 피식 웃었다.
“자식, 귀엽네. 바가지 머리 해서는…… 요즘은 샤기컷인데.”
“…….”
샤기컷은 내가 싫다.
차라리 바가지가 낫지.
“흠…… 음악은 하고 싶은데 어떤 음악을 할지는 모르겠다는 거지? 음악이면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거고.”
“네.”
난 주먹을 꽉 쥐고 정동희를 바라봤다.
정동희는 뭔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내 바람을 무시하거나 애매한 대답을 한다면 이 방을 못 나가게 할 생각이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지금으로서는 정동희를 통해 뭐라도 연결이 되는 게, 유일한 가능성 같아 보였다.
“그럼…….”
정동희는 날 향해 싱긋 웃었다.
“내일 형이랑 같이 학교에 가 볼래?”
“학교요?”
정동희는 웃으며 말했다.
“형 주변에 음악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너 한번 보여 주고 싶네.”
“…….”
“어때, 가 볼래?”
정동희네 학교, 서울대를 가자고?
“물론이죠! 하하.”
난 방방 뛰면서 온몸으로 기뻐했다.
“하하. 자식. 애는 애네.”
정동희는 날 보며 활짝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
배고파서 일찍 갔는데, 큰 고모를 쏙 빼닮은 한 남자가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
내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여전히 시선을 신문에만 두고 있다.
“뭘 봐? 왔으면 앉아.”
내 쪽은 보지도 않고 말하는 남자.
찬바람이 쌩쌩 분다.
“…….”
난 인사도 못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큰 고모의 둘째 아들 정재희 같은데.
“오~ 덕후~ 잘 잤어?”
정동희가 하품하며 식탁에 앉았다.
“아줌마~ 저 밥 많이 주세요!”
“하하, 그래~!”
정동희는 정재희를 향해 말했다.
“야야, 사람이 왔으면 좀 아는 척 좀 해라. 신문은 식탁에서 좀 보지 말라니까.”
“…….”
“너, 덕후랑 인사는 했냐?”
“…….”
그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정동희는 정재희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에휴…… 덕후야, 인사했니? 얘는 내 동생 정재희야.”
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형, 안녕하세요. 바빠 보이셔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김덕후라고 합니다.”
난 최대한 깍듯하게 인사했다.
둘째도 음악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서울대 음대 수석 합격자라고 들은 것 같은데.
“하핫. 하여간 재밌는 녀석이라니까. 조그만 게 인사하는 거 봐.”
그제야 정재희도 살짝 고개를 들어서 날 보았다.
피부가 하얗고, 눈매가 살짝 올라간 게 차갑게 생겼다.
“그래, 반갑다.”
“…….”
정동희는 정재희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끝?”
“…….”
“야~ 너는 좀 누가 왔으면…….”
난 정동희를 만류했다.
“아니야, 형. 됐어. 어서 밥 먹자. 재희 형 바빠 보이는데.”
“…….”
“형, 몇 시에 출발해? 나 바로 씻고 준비해야 하지?”
“…….”
정동희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날 바라봤다.
“근데 너, 왜 갑자기 반말이니?”
“반말?”
난 물끄러미 정동희를 바라봤다.
그럼, 내가 23살짜리한테 존댓말 해야 하나?
촌수가 나보다 높은 것도 아니고.
“어제는 초면이라 존대한 거고, 사촌끼리 편하게 지내면 좋잖아.”
“헛…….”
“젊은 형아가 왜 그래~ 하하.”
그때, 정재희가 다시 날 바라봤다.
* * *
대학교 정문.
싱그러운 여름. 캠퍼스는 활기찼다.
“형 오늘 오전 수업 있는 거야?”
“아니, 우리 지금 방학인데.”
아…… 그렇지. 대학교는 방학이 길지.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너 때문에 일찍 왔지 인마.”
서울대는…… 전생에 친구와 관악산 왔다가 한번 스쳐 지나간 것 말고는 처음이다.
확실히 캠퍼스가 꽤 크긴 하네.
난 연신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음악대학으로 가는 거야?”
“맞아. 형 친구가 너 테스트해 주기로 했거든.”
“응?”
난 궁금함에 정동희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형 친구를? 그리고 테스트?
의아해하는 내 눈빛을 보고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야, 그럼 널 우리 교수님 소개해 주랴? 7살짜리를? 하하.”
“…….”
“내 친구가 영재 음악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거든. 일단 네가 어떤 녀석인지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아…….”
“형 생각에는 너 좀 뭔가 있어 보이거든?”
“…….”
“그게 재능인지 재주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친구가 애들 전문이니까 만나 보면 알겠지.”
애들 전문…….
썩 내키는 표현은 아니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고마워, 형 좋은 사람이구나?”
“뭐 인마? 하하.”
정동희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음악대학의 한 강의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강의실 한쪽에 피아노가 한 대가 있고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옆에 한 남자가 있는데.
이 남자도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음대생은 단발머리를 꼭 해야 하는 건가?
“동희야~!”
“어, 먼저 왔구나.”
두 단발머리 남자는 어깨를 두들기며 서로 맞이했다.
“얘니?”
“어~ 맞아.”
정동희의 친구는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안녕~ 우리 친구 이름이 어떻게 될까?”
“……김덕후요.”
완전 아이 대하는 듯한 이 태도…… 뭐지?
거부감 드네.
“이야~ 이름 멋지네~ 우리 친구~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친다며?”
“형이 그렇게 말했어?”
난 정동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배운 적 없는 거치고는 좀 친다고 얘기해 줬지.”
그 남자는 옆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선생님은 송사무엘이라고 해~ 반가워~!”
송사무엘? 뭔 이름이…….
“……본명이에요?”
“그건~ 비밀~ 호호.”
그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런 그를 보는 게 좀 어색했다.
전생에서는 집, 학교, 회사 말고는 몰랐다. 약간 독특한 사람 만나 봐야, 게임에 빠진 것 정도?
이 정도로 개성이 강한 사람을 보는 게 낯설긴 했지만, 뭐 예술 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편하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선생님이요? 형 친군데?”
“호호. 난 그게 편하구나~ 꼬맹이 친구들은 다 날 그렇게 부르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송사무엘은 정동희를 바라봤다.
“그럼 동희는 옆에서 참관만 해 줄래? 내가 아주 기본적인 거 몇 가지만 확인해 볼게.”
“그래.”
정동희가 옆으로 물러난 뒤, 송사무엘은 피아노 의자에 앉고서 옆자리를 가리켰다.
“덕후야, 이리 온.”
젠장. 말투라도 좀 어떻게 하면 안 될까.
무슨 강아지 부르는 것도 아니고.
터벅터벅.
일단 송사무엘 옆에 가서 앉았다.
“4가지 항목에 대해서 체크리스트를 작성해 볼 건데, 그냥 편하게 하면 돼.”
“네.”
“음…… 우선 첫 번째로.”
송사무엘은 파일철을 보았다.
[1번. 음악에 대한 관심과 흥미도가 높은가?]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음악이 좋니?”
“네.”
“얼마나 좋니?’
난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좋냐고?
“그냥…… 제 존재 이유 같습니다.”
“존재 이유라…… 그건 너무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추상적인 대답인데? 호호. 우리 친구~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래? 선생님이 궁금하당~!”
송사무엘은 웃으며 바라보았고, 김덕후는 꿈꾸듯 대답했다.
“음악을 들으면,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희열이 느껴집니다. 몸이 떠다니는 것 같고, 그 순간만큼은 현실감이 들지 않아요.”
7살짜리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평생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제 귀에 들리는 리듬과 멜로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송사무엘과 정동희도 20살이 넘도록 음악에 대해 갖지 못했던 확신.
김덕후 어린이는 약간의 의심도 없었다.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오…… 동희 말이 진짜구나.”
사실 송사무엘은 정동희로부터 김덕후를 처음 만났을 때 얘기를 자세하게 들었었다.
1번 항목에 대한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었다.
송사무엘은 미소를 지으며 점수를 매긴 후, 다음 체크리스트를 확인했다.
[2번. 리듬감, 박자감이 뛰어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