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고모들의 방문(1)
어린이집 생활은 순탄했다.
동훈과의 사건 이후로 모두 내 아래로 단결했고.
난 모두가 동등하고 평화로운 하늘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중앙집권체제의 장점은 지혜로운 군주 아래서는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고, 7세가 되었다.
설 연휴 이후에 난 반 이동을 한다.
유치원은 어린이집과 교육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난 더 반갑다.
조금은 덜 유치하게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한가지 꺼려지는 게 있다면…… 동생들에게 권력 이양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내 집권하에 하늘반은 평화로웠다.
단임제의 장점은 권력의 집중을 막을 수 있지만, 정권이 교체되면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형~ 안 가면 안 돼?”
꼬맹이들은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 많았다.
편 가르지 않고 놀게 했으며, 인원수에 맞는 공간 배정을 했다.
예를 들어 힘센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3명밖에 안 되는 미끄럼틀 파가 가장 넓은 중앙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업적은…… 꼭짓점 댄스.
하늘반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집의 공식 댄스가 되어 버렸다.
놀다가 심심해지면 YMCA를 틀었고, 그러면 모두 모여 꼭짓점을 이루어 스텝을 밟았다.
일종의 놀이 문화가 된 것이다.
하늘반의 대표이자 자랑인 내가 떠나는 걸 동생들은 몹시 아쉬워했다.
“혀엉~!”
어머니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떠나는 날 동생들은 계속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이거 놔라, 헤어짐은 또 다른 시작인 거야.”
“형아,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놓으라는 뜻이야.”
내 팔을 붙잡고 있던 동생들이 손을 놓았다.
“힝~ 난 형이랑 계속 놀고 싶은데.”
정필두. 6세. 하늘반에서 내 후계자로 양성해 왔던 녀석이다.
어제 난 정필두를 하늘반 리더로 공식 선언했다.
“필두야, 그동안 형이 해 왔던 거 잘 보라고 했었지?”
“응…….”
“그대로 하면 돼. 별거 없어.”
“난 형처럼 못 해…….”
“아니야, 할 수 있어.”
난 정필두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가 새로운 리더…… 아, 아니지. 대장이야.”
“…….”
“민주주의를 위한 중앙집권체제라고 생각을 해. 그러니 권력을 막 휘두르면 안 돼.”
“형 자꾸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네 멋대로만 하지 말고, 친구들 동생들 말 잘 들어 주란 뜻이야.”
“응, 알았어.”
덜컹.
문을 열었다.
“그럼 난 간다.”
―형아 잘 가~!
―자주 놀러 와야 해!
난 뒤돌아보지 않았다.
쿨 하게 오른손 한번 들어 준 후, 어머니 손을 잡고 집을 향해 걸었다.
“어머니, 저 왕꿈틀이…….”
“안 돼.”
요즘 자꾸 단 게 당긴다.
* * *
집 도착.
내일부터 설 연휴 시작이다.
어머니는 음식 준비를 하시고, 난 블록 놀이를 하고 있는데.
덜컹, 문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오후 3시.
난 현관문에 들어선 사람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니는 아는 척을 했다.
“왔어요?”
“응~!”
하아~ 김 부장.
설 연휴 내내 봐야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퇴근을 겁나 일찍 했다.
“덕후야 아빠한테 인사 안 하고 뭐 하니?”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어머니의 채근에 난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근데, 왜 일찍 왔어?”
“내일부터 설 연휴라고 회사에서 일찍 끝내 줬단다~!”
“아…….”
짜증 나게 좋은 회사네.
하긴 우리 회사가 그러긴 했었지. 이런 게 대기업의 좋은 점이긴 하다.
“하하, 이제 유치원에 간다며?”
“…….”
“유치원 가니까~ 더 형아답게 행동해야겠네? 우리 아들~!”
“형아 다운 게 뭔데?”
“응?”
“내가 철딱서니 없어 보여?”
“…….”
김 부장이 무슨 말만 하면,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이 나간다.
김 부장은 물론이고, 우리 가족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자자, 그만들 하고 당신은 어서 손발 씻고 나오세요. 사과 깎아 줄게요.”
어머니가 나섰고, 김 부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알았어. 아~ 사과 맛있겠다.”
“어머니, 전 따로 주세요.”
“덕후야, 쓰읍―!”
어머니는 안광을 쏘셨고, 난 바로 눈을 깔았다.
김 부장은 조금 달라졌다.
가까이하면 나와 더 안 좋아진다는 걸 알고, 요즘엔 일부러 거리를 좀 두는 것 같았다.
혹은 눈치 100단인 사람이라서.
가까이 있으면 내 장난에 힘들어진다는 걸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니 뭔가 건수가 잘 안 생긴다.
전략을 바꿔야 할까?
* * *
설 전날.
우리 집은 정신이 없었다.
김 부장은 장남이며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명절 때는 일가친척들이 자주 방문을 한다.
친척들이 방문하는 것은 명절 일상이기에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이번 설은 좀 달랐다.
집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머니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형님들, 언제 오신다고요?”
“내일이나 모레 올 것 같은데.”
“네…….”
고모들이 온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는 명절에 고모들이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모들 또한 한 집의 며느리기에 명절에 바쁘기도 했겠지만, 뭔가 특수한 관계가 얽혀 있는 것 같았다.
짐작은 되지만…… 아직 확신은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설날 아침.
난 한복을 입었다.
우리 집에서 한복 입은 사람은 나랑 할아버지밖에 없었다.
왠지 부끄러워서 입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결정하신 거라 안 입을 수가 없었다.
“아이고~ 우리 덕후, 부잣집 도련님 같네~ 하하하.”
막냇삼촌은 날 보며 웃었다.
“크하하, 좀 사이즈가 맞는 걸 입지. 꼭 어른 옷 입혀 놓은 거 같잖아.”
어머니는 몇 번 입지도 못하는 거, 3년은 입어야 한다며 아주 큰 거로 샀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김 부장이 방에서 나왔다
“아버지, 시작할까요?”
“그래, 지금 지내자.”
설날 아침. 여느 명절처럼 우리는 차례를 지냈다. 그리고 곧 내가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다.
내 나이 7살로서의 유일한 수입원.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일 년 중 단 한 번의 기회.
올해도 친척들이 우리 집에 많이 오셔야 할 텐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
난 세배할 때 ‘부자되세요’라는 말을 덧붙인다. 부자 되면 세뱃돈 더 줄 거고, 세뱃돈 많이 달라는 내포된 의미도 있다.
“야야, 너무 대놓고 그러지 마라. 일수 뜨러 왔냐?”
난 세배를 끝내자마자, 바로 코앞에 다가가 앉아서 기다린다.
큰삼촌은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세뱃돈을 건넸다.
“하여간 덕후는 요물이야. 3살 때부터 세배만 하면 저랬던 거 같은데, 내가 뭐 빚진 거 같다니까?”
막냇삼촌으로부터도 세뱃돈을 받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금액이…… 좀 아쉽다.
“삼촌…… 꼭 부자 되어야 해, 알겠지?”
난 받은 세뱃돈을 보며 중얼거렸고, 막냇삼촌은 인상을 찌푸렸다.
“새해 복 받으라는 건지, 새해부터 엿 먹으라는 건지…… 아~ 덕후 절 받기 싫어.”
점심때부터 친척들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고, 난 열심히 절을 했다.
한 친척 어르신이 날 보며 물었다.
“얘, 너 무릎에 뭐니?”
난 롤러블레이드 탈 때 쓰는 무릎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오늘 절을 좀 많이 할 것 같아서요.”
“참나…….”
관절은 나이 들면 훅 간다.
어릴 때부터 관리해 줘야 한다.
그렇게 설날을 보내고 있던 늦은 오후.
띵동!
“누구세요~!”
―올케~ 우리 왔어.
“…….”
이 목소리에 집 분위기는 싸해졌다.
고모들이 왔다.
* * *
“여보~!”
김 부장은 안방에서 할아버지, 삼촌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덜컹!
“여보! 안 들려요?!”
어머니는 다급하게 김 부장을 불렀고, 김 부장은 쓰리고 중이라 정신이 없었다.
“아, 미안. 잠깐만.”
“고모들 왔어요.”
“지금?!”
김 부장과 삼촌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광 팔고 있던 할머니도 일어났다.
할아버지만 태연할 뿐이었다.
“왔으면 왔지, 뭔 호들갑이냐.”
김 부장은 곧바로 현관으로 향하며 말했다.
“아버지, 누님들 모시고 올게요.”
삼촌들도 김 부장을 따라서 우르르 현관 앞으로 몰려갔다.
덜컹.
돌잔치 이후 4년 만에 보는 고모들.
여전히 고급스러운 옷과 빽으로 치장하고 있었고, 그때보다 더 젊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고모들 뒤로 아이들도 따라 들어왔는데.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두 명 있었다.
하늘색 남방을 입은 남자아이와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가슴팍에 막대기 잡은 말 그림이 있었다.
[FOLO.]
쪼그만 것들이 벌써…….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김 부장은 깍듯이 인사했고, 큰 고모가 도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와서 불편한 거 아니지?”
“불편하긴요. 와 주셔서 감사하죠.”
“오늘 어머니 차례는 지냈니?”
“네, 명절에 항상 같이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 차례?
하아…… 이상한데?
아침에 차례 지낼 때 명패가 여러 개 보이긴 했는데.
“누님도 어서 들어오세요.”
김 부장은 큰 고모 뒤에 서 있는 작은 고모를 향해 말했다.
새하얀 피부에 밝은 표정.
그녀는 김 부장과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호호. 그래. 진하야. 오랜만이네.”
김 부장은 작은 고모 옆에 있는 두 아이에게 말했다.
“하윤이, 하원이 오랜만이다~ 삼촌 기억하지?”
“안녕하세요.”
“너희 둘이 악기 연주를 그렇게 잘한다며? 영재 났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하하.”
김 부장의 덕담에 작은 고모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얘~ 영재는 무슨. 이제 꼬맹이들인데.”
“하하. 잘 왔다. 어서 들어와라.”
김 부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 고모는 집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버지 어디 계시니?”
“방에 계세요. 이쪽으로.”
김 부장은 고모들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건강하셨어요?”
“오냐, 오랜만이구나.”
큰 고모는 할아버지 옆에 있는 할머니를 향해서는 고개만 살짝 까닥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니?”
고모들은 세배를 드리려 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란히 앉아서 기다렸다.
큰 고모는 분명 세배를 하려다가 뭔가 못마땅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하니? 어서 해라.”
할아버지가 채근하자.
“어머니. 같이 받으시게요?”
“…….”
“세배 받으시려고요?”
분위기가 또 싸해졌다.
큰 고모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가족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고.
할머니만 어쩌지 못하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얘야, 그냥 새해에 하는 인사인데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어서 해라.”
“…….”
결국 할아버지가 나섰고, 큰 고모는 마지못해 세배를 올렸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할머니는 함께 허리까지 숙이며 맞절을 했다.
“덕후야.”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김 부장이 날 불렀다.
그는 뭔가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할머니만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입술은 꽉 다물고, 주먹 쥔 손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왜.”
“무릎 보호대 빼라.”
“싫은데?”
김 부장의 눈은 여전히 고모들과 할머니를 주시한 상태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고모들한테 세배해야 해. 어서 무릎 보호대 빼라.”
“세배하려고 무릎 보호대 한 건데?”
흡!
그때 김 부장이 날 내려다보았고.
눈빛이 매서웠다.
꿀꺽.
“지금 네 장난 받아 줄 기분 아니다. 어서 빼.”
눈에 핏발이 곤두서 있는데.
뭔가 억울하고, 울분이 가득 찬…… 묘한 얼굴이었다.
김 부장에게서는 처음 느껴보는 모습.
“어서.”
김 부장 표정이 불안하다.
지금 고모들 앞에서 깽판 한번 쳐? 효과 제대로일 것 같은데.
주위를 한번 살피다가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 또한 김 부장 못지않게 표정이 좋지 않았다.
흠…… 어떻게 할까.
아직 파악하지 못한 집안 사정이 있으니 한 발 물러서서 분위기를 지켜보는 게 낫겠다.
자고로 현명한 장수는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
이건 그냥 작전상 후퇴이다.
“알았어.”
난 살며시 무릎 보호대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