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78화 (178/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78화

178. 그가 있어야 할 곳(3)

잠실 대형 호텔의 컨벤션 룸. 기자회견 시간이 다가오는 로비엔 삼삼오오 모인 기자들이 보인다.

“무슨 일이래?”

“몰라. 김 기자도 얘기 못 들었어?”

“전혀.”

“뭐지? 결혼 발표라도 하려나?”

한 기자의 목소리에 기자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오, 결혼?”

“하긴, 나이가 되긴 했지.”

관심 끄는 이슈의 등장에 주변 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모인 십여 명의 기자들, 그리하여 시작된 이번 기자회견에 대한 예상.

“혹할 만한 이슈긴 하지만…… 안덕모는 공인이 아닌데?”

“하긴.”

기자회견을 통해 결혼 사실을 알리는 건 주로 연예인들의 영역이다. 어느 연예인보다 유명하지만 그는 공인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기자회견을 할 까닭이 없다.

“아니지. 상대가 공인이라면 말이 되지.”

“아!”

또다시 일제히 집중되는 시선.

“친동생이 안주미야. 제일 잘 나가는 탑스타라고. 동생 라인 타고 접근해 오는 연예인이 없었을까?”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안덕모, 그 사람 재산이 얼마지?”

“뭐 대부분이 주식이라 평가액이 매일 변하지만…….”

경제 쪽에 정통한 기자 한 명이 손가락으로 슥슥 턱을 긁었다.

“최근 기준 하면 한 천억쯤?”

상장된 DNP 주식의 계속된 상승, 엄청나게 커진 시총으로 인해 회사는 어느새 코스닥을 리드하는 대표 기업이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DNP를 중소기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단하네.”

“잡기만 하면 완전 로또지. 젊고 잘생겼지, 능력 있지, 돈 많지.”

기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부럽네.”

“신경 꺼. 우리랑 상관없으니까.”

“야, 시간 다 됐다.”

“슬슬 가보자고.”

“그래 어떤 여자가 로또를 잡았는지 확인해 보자고.”

기자들의 동의에 의해 기자회견은 결혼 발표로 결정되었다. 회견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기자 중엔 연예부 기자와 통화를 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회견장은 인산인해라는 말이 딱 맞는 광경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자회견마다 엄청난 이슈를 터트려온 안덕모였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회견을 요청했다. 대한민국 언론사란 언론사는 다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정숙해 주십시오. 이제 기자회견 시작하겠습니다.”

가득 찬 좌석, 빼곡하게 거치된 카메라.

웅성임이 잦아든 회견장 문 이리 열고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안덕모다.”

“찍어, 찍어.”

안덕모의 등장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기사를 적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하지만 걸어오던 그의 발길은 멈춘다.

함께 들어온 남자, 안덕모는 단상에 오르라는 제스처를 그에게 보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단상에 오른다.

“누구지?”

“많이 본 얼굴인데…… 아! 박준.”

“박준?”

“그래. 안덕모랑 두 번이나 광고 같이했던 페르소나, 저 사람 드라마에서 잘나가잖아.”

“맞다! 아버지의 그림자.”

“설마 광고 제작 발표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추측이 난무한다. 단상에 올라서 긴장된 얼굴로 기자들을 바라보던 박준, 그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든다.

마이크에선 중후한 배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박준입니다.]

안덕모의 결혼 발표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영문 모를 상황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진 회견장.

[안덕모 대표님을 통해 여러분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는 오래전 있었던 일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올려놓은 종이를 바라본다. 분명 거기 준비한 멘트가 쓰여 있을 것이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기에 기자회견을 연 사람은 적힌 멘트만 정확하게 읽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이상하다. 질끈 두 눈을 감은 박준이 올려둔 메모지를 접어 다시 품에 넣었던 것.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기자들, 의아해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박준은 말했다.

[박준, 아니, 본명 안지한은 이십오 년 전 아내와 자식을 버린 파렴치한입니다.]

커지는 기자들의 눈, 기사를 적어나가는 바쁜 손놀림, 박준의 얼굴을 새하얗게 바꿔놓을 만큼 동시에 터져 나온 카메라 플래시.

하지만 박준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였다. 쏟아지는 플래시도 경악한 기자들의 눈동자도 응당 자신이 감당해야 할 벌인 것처럼.

[그리고 제가 버린 친자식이 바로…….]

박준의 얼굴이 굳어진다. 마이크가 올라와 있는 테이블 위 두 주먹은 단단히 쥐어졌다. 모두 그가 중요한 결심을 굳혔음을 대변해 주는 증거들이었다.

[안덕모 대표입니다.]

폭탄이 떨어졌다. 기자들 한복판에서 터진 폭발의 여파는 순식간에 회견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안덕모?”

“도망친 아버지란 말이야?”

“뭐야? 어디 갔어?”

놀란 기자들이 안덕모가 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가 이미 자리를 떠났음을. 떠난 그의 뒤를 쫓겠다는 듯 몇몇 기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지만.

[가족을 버려고 연기를 택했지만 박준은 무명배우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정말 과분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비천한 연기실력을 높이 평가해 주시고, 칸 라이언즈에 출품하는 중요한 광고 주연으로 캐스팅해 주신 분도 바로…….]

떨어진 엉덩이는 다시 의자에 달라붙었다. 박준과 안덕모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안덕모 대표였습니다. 그분은 뒤늦게 제가 아비라는 걸 아셨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광고에서 연기를 펼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버림받은 자식.

절절한 이야기에 회견장은 다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 * *

회견장을 빠져나와 걸어가는 길. 조용한 로비에 앉아 멀리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치 다가올 사람이 나뿐임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런 사람을 왜…….”

BK엔터의 황아람 매니저다. 나와 오랜 시간 모델 섭외로 손발을 맞춰온 사람이자, 박준의 소속사 직원으로 짧게나마 그의 매니저 생활을 했던.

허공을 향했던 시선을 거둔 그녀가 눈을 맞춰온다.

“시상식에서 아셨다면서요? 미웠을 텐데, 죄를 뉘우치게 만들고 싶으셨을 텐데. 설마 다 오늘을 위해 계획하신 거였나요?”

뭘 물어보는지 알고 있다. 난 박준의 정체를 알면서도 BK엔터와 계약을 연결해 주었고 조이스 콕이라는 대형 광고의 주연으로 발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기 조연 박준을 만든 일등공신은 나, 그리고 그를 논란에 휩싸이게 만든 것도 역시 나다.

“아뇨.”

“그럼 왜 그렇게 엄청난 기회를 주신 거예요?”

“좋은 배우잖아요.”

“네?”

“걱정 마세요. 박준은 몰락하더라도 안지한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

황아람의 얼굴이 복잡해진다. 상관없다.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 역시 진실이니까.

“대표님은 안 오셨나 봐요?”

“아, 네. 도저히 못 오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 회사의 굵직한 배우 하나가 논란에 휩싸여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현장을 직접 보고 싶은 대표란 없을 테니까.

“결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건 직접 만나서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직접?”

황아람이 쓰게 웃는다.

“미뤄둔 저녁 식사, 오늘 꼭 하자고 하시네요.”

“하하.”

웃었다. BK 대표와의 식사는 아쉽지만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약속이다.

“아쉽지만 저녁은 못 해요. 미안하지만 매니저님이 전해주세요.”

“왜요?”

“저 일 그만두거든요.”

황아람의 얼굴에 찾아왔던 미소가 와장창 깨어진다. 표정이 굳어지고 빠질 듯 커지는 두 눈.

“……그게 무슨?”

그때 날 향해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황아람이 날 알아보았듯 나 역시 그쪽을 보지 않고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다들 기다리세요.”

오늘 은퇴식을 위해 날 데리러 온 김다미.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크게 치켜뜬 눈으로 황아람이 나와 김다미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김다미가 해주었다.

“선배, 오늘 자로 은퇴하세요.”

“아…….”

“그만 가요.”

“그래.”

경악한 황아람을 뒤로한 채 김다미를 따라 로비를 벗어났다.

* * *

DNP로 돌아가는 길. 겨울이 찾아온 서울 도심, 도로를 가득 채운 차로 막히는 길, 차창 너머 대형 광고판에 속보가 흘러나온다.

[배우 박준의 충격 고백, 나는 가족을 버린 아버지였다.]

[기자회견을 통해 드러난 DNP 전 대표 안덕모의 비극적 가족관계, 쏟아지는 관심과 동정 여론.]

[박준, 아버지의 그림자 하차하나. 드라마와 판박이인 주연배우의 과거에 혼란에 휩싸인 관계자들.]

“난리네요.”

운전대를 잡은 김다미의 목소리.

기자회견장에서 발표된 내용은 언론사로 전달되어 속보 마크를 달고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탑 배우의 스캔들, 그것이 안덕모라는 유명인사와 관련된 것이었기에 뉴스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다미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녀석을 불렀다.

“네. 선배.”

“광고 일 하면서 제일 재미있었을 때가 언제였어?”

의외의 질문에 녀석이 곰곰 생각에 잠긴다. 사거리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고 차가 출발했다.

대답이 들려온 건 다음 사거리에 차가 멈췄을 즈음이었다.

“필동에 있었을 때요.”

씨익 웃음이 나온다. 녀석의 대답이 나와 같았으니까.

“나도 그래.”

동남풍 애드 솔루션이 있던 필동의 작은 사무실, 책상 다섯 개를 놓았을 뿐임에도 발 디딜틈 없던 그 작은 공간.

일감이 없어 이러다 망하겠다는 고민을 하고, 현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광고에 뛸 듯이 기뻐하던 그때가 우리 두 사람에게 가장 즐거웠던 때로 기억되고 있다.

“힘든 상황에도 광고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고, 돈이 되지 않아도 난 즐겁게 광고를 만들고, 다시 그렇게 광고를 만들고 싶어.”

지나가는 전광판에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단어들, 안덕모, DNP, 충격 그리고 관심.

“선배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은퇴가 결정되었을 때 가장 격하게 반발했던 녀석이었다. 불투명한 일인기업 동남풍 애드 솔루션에 용감하게 투신했던 1호 직원, 고난과 역경의 시기 내 옆을 가장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었던 동료.

오늘날 DNP가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일등공신.

보장된 꽃길 대신 안덕모라는 사람을 믿고 지금까지 따라와 준 소중한 파트너.

그게 김다미다. 은퇴 후 계획을 말했을 때 녀석은 단 일 초도 고민 없이 날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계획에 동료는 없다. 더구나 회사의 주축 팀장이자, 기획본부장이 내정된 김다미는 더더욱.

그러니 녀석의 반발 역시 정당하다. 그래서 입 밖으로 흘러나간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진실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운전석 녀석의 옆모습, 어제보다 한층 성숙해져 버린 녀석의 한쪽 입술이 슬며시 말려 올라간다.

“자주 찾아갈 거예요. 그땐 바쁘다는 핑계 대기 없기요.”

그 미소는 내게도 옮아온다.

“그래. 약속할게.”

“다 왔네요.”

고개를 돌렸다. 앞엔 DNP의 새로운 사옥, 이사가 한창인 사옥 앞에 도열한 사람들이 보인다.

끼익.

차는 도열한 사람들 앞에 멈추었다. 이쪽으로 하나둘 다가오는 사람들. 이미 각오했지만 눈앞에 다가온 이별 앞에 흘러나오는 한숨.

“가세요.”

한숨 사이로 들려오는 응원의 목소리.

“안덕모답게요.”

중요한 발표가 있던 어느 날, 녀석과 내가 나누었던 응원이 떠오른다.

“그래.”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가는 내 모습 또한 그때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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