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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77화 (177/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77화

177. 그가 있어야 할 곳(2)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 은퇴한 대표이자 이름값이 지나치게 커져 버린 내 입장, 그리고 얼마 전 김형철과 만났을 때 나누었던 이야기까지.

차혜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침묵했고 잠시 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날 생각이구나?”

그건 여러 고민의 핵심을 관통하는 정답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정답, 하지만 내 입엔 단 한 번도 담아본 적 없던 정답.

그래서였을까? 차혜민에게서 정답을 들었을 때 여러 고민 들로 복잡했던 머리는 맑게 개었다.

“네.”

돌아간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그래. 알겠어.”

그래서 반대나 반박 따윈 돌아오지 않는다.

“시기는 언제?”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가능한 한 빠르게 정리하고 싶어요.”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천천히 걸어 다가간 곳은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차들이 전시된 진열대.

포트에 물을 담아 끓이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차를 고르는 모습을 난 그저 묵묵하게 바라보았다.

물이 끓고 고른 차를 다기에 담고 조심스럽게 차를 우린다. 그렇게 우려낸 차를 준비된 두 개의 컵에 나누어 담는다.

“재스민이야.”

그중 하나를 내 앞으로 내린다. 컵을 두 손으로 잡으니 막 우려낸 차의 따뜻함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온다.

“다른 허브 종류보다 향이 강해, 마시면 한동안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하지.”

자기 몫의 차를 끌어당기며 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들어 올린 잔을 코에 가져다 댄다. 언젠가 경험해 본 적 있던 차향이 코끝으로 진하게 전해져 온다.

“이 녀석을 보면 늘 네 생각이 났어. 어디에 있든 늘 진한 존재감을 풍기는 녀석.”

그녀가 내게 눈을 맞춰온다.

“오래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 뽑아놓고 처음 밥 사 주던 날 그랬거든, 너한테 좀 특별한 걸 봤다고. 그때 대표님한테 너 뽑자고 많이 우겼거든.”

기억난다. 광인 기획 막 출근을 시작하던 시기. 정직원도 아닌 계약직이라는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그녀는 이유 대신 저렇게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 체했었죠.”

“그래, 그랬었지.”

차혜민이 웃는다.

“그 특별함 덕에 다들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내 안목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서 많이 뿌듯했었어.”

가벼운 음성 뒤에 묵직한 음성이 이어진다.

“고마워, 안덕모.”

고개를 숙이게 된다. 내게 카피라이터로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사람, 그녀가 없었다면 난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나 이제 은퇴 번복했던 거 후회 안 해. 그대로 은퇴했다면 결국 망한 회사의 본부장으로 남았겠지.”

하지만 전해야 할 말이 있다. 그래서 고개를 들었다.

“회사를 조금 더 이끌어주세요. 대표님.”

어려운 이야기였다. 몇 번이나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말해왔던 그녀였으니까.

“그래, 그래야겠지.”

하지만 대답은 선선하다. 작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아쉽다. 보름만 있으면 신사옥 이전인데,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같이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차혜민의 말끝이 흐려진다.

“제 방은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아니. 만들 거야.”

“네? 왜…….”

“너도 나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까.”

고마운 마음씀씀이, 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혜민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대표님.”

감사와 존중의 의미를 가득 담아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묵묵히 인사를 받은 차혜민의 입술이 뒤늦게 열린다.

“차는…… 다 마시고 가.”

“아…….”

찌푸려지는 미간, 그녀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네 어미가 그러더냐? 내가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고?”

노배우의 음성은 세트장을 쩌렁쩌렁 울린다. 박력 넘치는 목소리에 극의 주연인 어린 여배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아뇨…….”

하지만 그녀도 프로 연기자, 흔들리던 눈동자는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하여 대본이 원하는 독기 어린 눈이 된다.

“엄마 아니에요. 다 당신 옛 동료들한테 들은 거예요.”

“…….”

“버리고 떠났으면 보란 듯이 잘 살고 있어야지…….”

여배우가 노배우의 남루한 옷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게 뭐야, 이러면 당신이 이러면…….”

날카로운 목소리가 세트장에 울려 퍼진다.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잖아!”

주르륵 흘러나오는 여배우의 눈물, 노배우의 얼굴에 폭풍 같은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을 들키지 않게 하려 함인지 황급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뒤돌아선다.

“컷!”

떨어진 감독의 사인.

“아우, 좋아요. 두 분 다 아주 좋았어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감독이 짝짝 박수를 친다. 지나친 몰입 덕에 눈가에 가득한 눈물을 닦아내며 노배우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박준 씨,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해요. 드라마 시청률 30퍼센트 넘긴 거 다 박준 씨 덕분이라니까요?”

옆에선 황아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에게 부탁해 세트장 어두운 구석에서 박준을 바라보고 있는 중.

“박준 씨 씬은 끝난 것 같은데, 잠깐 부를까요?”

황아람이 묻는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네? 만나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만나긴 할 겁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지만 제가 부를게요. 둘만 봐야 할 일이라서요.”

“아…….”

주미의 매니저 역할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녀다. 아마 박준과 나에 대한 이야기로 알고 있는 듯하다. 걱정이 찾아온 얼굴이 작게 끄덕인다.

“네. 그럼 천천히 만나고 오세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시구요.”

“네.”

핸드폰을 꺼내 박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차 근처로 다가온다. 청바지에 수수한 외투, 챙이 큰 모자를 눌러쓴 노배우.

차창 너머 날 발견한 그가 주춤대며 고개를 숙인다.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의 반대편으로 다가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댁까지 모셔다드리고 싶은데. 타시겠어요?”

“네.”

그의 거처에 대한 정보는 황아람에게 들은 적 있다.

박준에겐 정해진 거처가 없다. 촬영이 생기면 촬영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소속사가 구해주는 대로.

그것이 대부분의 삶은 홀로 살아온 박준의 특이한 거주 형태였다. 과연 지금 지내고 있는 거처 역시 촬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0분 정도의 이동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였을까? 박준은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탈출하듯 차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날 배웅하듯 깍듯하게 두 손을 모은다.

“얘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다면 집으로 올라가실까요?”

망설였는지 대답이 나오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네.”

박준의 원룸, 난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침대가 아닌 매트리스가 하나, 한쪽에 가지런히 쌓인 의상들, 그게 다다.

원래부터 원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구들을 제외하면 박준의 것이라고 할 건 보이지 않는다.

냄비 하나, 그릇 하나 없는 식탁과 주방. 책상 위엔 대본과 사용감 가득한 두툼한 연습장 하나가 놓여 있을 뿐.

“드라마 때문이었나요?”

“…….”

오늘 그의 연기를 보며 알게 되었다. 그가 현재 출연하고 있는 시청률 30퍼센트의 대박 드라마.

[아버지의 그림자.]

즐겨보던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그를 만나기 전 대략적인 내용은 봐 두었다.

놀음 빚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사라진 아버지, 하지만 세월은 흘렀다. 아내는 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하나뿐인 딸자식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다. 가족이 겪은 고통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부정이란 무서운 것. 아버지는 딸의 그림자가 되기를 택했다. 홀로 살아가기도 버거운 아버지는 사력을 다해 딸을 돕기 시작한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힘들 때마다 기댈 곳이 되어준 아저씨가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고 드라마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드라마의 내용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극 중 인물과 배우인 자신, 두 사람이 너무도 닮아 있다는 걸.

세월이 지나도 가족을 잊지 못한 극 중 인물처럼 박준 역시 가족이 생각났을 거다. 드라마의 전개처럼, 갈등 끝에 화목해질 결말을 기대하면서.

“당신과 비슷한 역할을 해보니 결심이 무뎌지던가요?”

그가 입을 연 건 한참의 침묵이 지난 뒤였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연기가 아닌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박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세월이 지나보니 알겠더군요. 끊어버릴 수 없는 게 가족이라는 걸요.”

그와 어머니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왜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냐 같은 질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 싶으신 겁니까?”

“네. 염치없지만…….”

그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칸에서 그가 생물학적 아버지임을 알게 된 뒤 그가 살아온 세월을 고민해 보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기 위해 모질게 가족을 잘라냈다. 그가 본명이 아닌 박준이라는 가명을 썼다는 건 그가 느꼈을 고통과 죄의식을 대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과는 나빴다. 가족을 버렸어도 무명 배우 생활은 이어졌다. 그럴수록 가족을 버렸다는 사실은 무거운 굴레가 되어 자신을 더 힘든 상황으로 몰아붙였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는 결국 자식이 만들어준 발판을 딛고 배우로서 성공을 이루어 냈다. 날 볼 때마다 숙이던 고개, 죄인처럼 뒷걸음질 쳤던 모습. 박준의 그런 행동은 그가 가진 죄의식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박준이 어머니에게 돌아가길 선택했다. 얼마만 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지만.

“네, 정말로 염치가 없으시군요.”

“…….”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전 당신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드라마의 각본처럼 다시 돌아왔다는 이유로, 그림자가 되어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박준을 안지한으로 용납하는 건 불가능하다.

“죄송합니다.”

또다시 흘러나오는 사과.

“하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그간 어머니와 주미에게 노력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자식의 뜻과 상관없이 어머니는 당신을 용서한 것 같더군요.”

그를 만나자고 한 이유, 그건 책망과 원망 같은 걸 터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감정 같은 건 이미 오래전에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의 곁에 돌아온다는 건 결국 그와 나와의 관계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

“박준 씨…….”

순순히 받아들인 생각은 없다. 그것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뜻이라 할지라도.

“당신에게 요구할 것이 있습니다.”

숙였던 고개가 천천히 올라온다. 그리하여 마주친 눈동자에 기대감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떤 겁니까?”

“기자 회견을 하세요.”

“예?”

“기자들은 제가 모아드리겠습니다. 그들 앞에서 당신이 벌였던 일, 이름을 숨기고 박준으로 살아온 이유를 남김없이 밝히세요.”

주름진 그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박준이 아닌 안지한이 되세요. 제가 당신을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요구 조건입니다.”

냉랭하게 전해진 말. 박준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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