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76화 (176/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76화

176. 그가 있어야 할 곳(1)

찌릿.

시선이 고울 리 없다. 그래서 날아간 날카로운 시선.

“…….”

상대는 대꾸도 못 한 채 황급히 시선을 회피한다.

“그러니까…….”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준 씨가 왜 그 시간에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건가요?”

“죄…… 죄송합니다.”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고개를 돌렸다. 거긴 병원 베드에 몸을 눕힌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

“…….”

“안 주무시는 거 알거든요?”

역시나 대꾸는 없다. 나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두 눈을 질끈 감을 뿐.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진짜.”

박준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난 어이없는 얼굴로 죄인이 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나 했던 심각한 상황은 피했다. 쓰러지신 이유는 누적된 과로,

가게 일이 지나치게 바쁜 나머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영양제를 맞고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의사의 진찰 결과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나와봐.”

내 어깨를 잡은 손의 주인은 안주미. 갑작스러운 소식에 함께 차를 타고 달려온 녀석이었다.

“얘기 좀 하자.”

“후…….”

어차피 더 이상 추궁을 해봐야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자.”

몸을 일으켰다. 병실을 빠져나가는데 내 눈치를 살피는 시선 두 개가 느껴진다. 난 옮기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박준 씨는 기다려 주세요. 어디 가지 마시고.”

“아…… 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박준.

“아, 나오라고!”

안주미가 날 잡아끈다. 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새벽이어서인지 병원 근처는 한산했다.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개를 뽑아 적당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후…….”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입김은 계절이 어느새 겨울로 접어들고 실감 나게 해준다.

틱.

따듯한 캔을 따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을 바싹바싹 마르게 하던 갈증이 조금 가신다.

“…….”

얘기 좀 하자고 불러놓고 섣불리 입을 떼지 못하는 녀석. 난 멀리 어둠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냐?”

“어?”

“박준 씨 엄마 다시 만나는 거 알고 있었냐고.”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보여준 녀석의 반응도 그렇고 무엇보다 엄마와 딸이란 생각보다 많은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니까.

“……그래.”

역시.

“나도 처음엔 반대했어. 한 번 안 좋게 헤어진 사이, 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근데 생각 바뀌었어. 엄마 인생이잖아.”

두서없이 흘러나온 안주미의 말, 그걸 통해 내가 미국에 가 있던 반년간 일어난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지난여름, 박준이 어머니를 찾아왔다. 수십 년 등 돌리고 살았던 인간이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는 모른다. 문전 박대를 당했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하지만 박준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 아마도 촬영이 없는 날이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어머니를 찾아왔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채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기다렸다. 오래전 버렸던 아내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봐 주기를.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다만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갈 즈음. 오래전 끊겼던 부부의 연은 결국 다시 이어졌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안주미에게 어머니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안주미는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 박준과도 만났고 두어 번 저녁도 함께했다.

박준을 만난 후 밝아진 엄마의 모습에 안주미는 결국 그를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얼굴 보는 사이인 거냐?”

“아니.”

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진지하게 재결합 생각하고 계셔.”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안주미에게 그것을 토해낼 수는 없다.

뜨거운 걸 되삼켰다. 그래서 냉랭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나한테 왜 말 안 했냐?”

“너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야…….”

뜨거워진 속 때문이었을까? 아직 영하의 날씨는 아니지만 입김을 더없이 자욱하게 흘러나온다.

“엄마의 인생? 장난해? 그 인간한테 버림받은 게 엄마뿐이야?”

박준, 실명 안지한은 어린 아들과 배 속의 딸을 버리고 집을 떠났다.

“그 사람이 엄마를 다시 만나는 거, 다시 너랑 내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야. 이십 년이 넘도록 가족을 버렸던 사람에게 면죄부 주는 거라고.”

지난 칸 라이언즈에서, 조이스 콕 광고에서 박준은 내가 만든 광고에 출연했다. 그가 내 아비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아버지로서 그를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박준은 내 아버지가 아니니까. 앞으로도 아버지의 타이틀을 돌려줄 생각 따윈 없으니까.

안덕모는 광고를 만드는 카피라이터, 박준은 안지한이 아닌 능력 있는 중년 배우로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와 다시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건 용서를 뜻한다.

“난 용납 못 해.”

“용납 못 한다고? 아냐. 엄마 저렇게 된 거 우리한테도 책임 있어.”

“무슨 소리야?”

“서울 살 때 한 번도 헤어진 적 없던 세 가족이야. 보령으로 내려온 거? 너랑 나 같이 내려간다고 해서 결심하셨던 일이야. 근데 지금은 어때?”

조용하던 안주미의 목소리가 후욱 커진다.

“넌 맨날 일로 바빠, 뻑하면 해외 나가서 몇 달씩 얼굴 보기 힘들어. 연기 시작하면서 나도 그렇게 됐잖아.”

녀석의 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슴을 찔러온다.

“결국 엄마 혼자 여기 남았어. 오늘 엄마 쓰러지셨고. 만약 박준 씨 없었다고 생각해 봐.”

적지 않은 나이시다. 과로로 쓰러지셨기에 망정이지 다른 이유로 그러셨다면 오늘처럼 상황이 좋을 거라고 절대로 장담할 수 없다.

“감정만 내세우지 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박준, 아니, 안지한, 우리 아빠. 유일하게 엄마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야.”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녀석의 말대로 박준을 받아들인 마음 역시 들지 않는다.

찌르르.

때늦은 풀벌레의 희미한 울음소리만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때 병원으로 차 한 대가 들어선다. 병원 앞에 멈춰 선 차에서 한 사람이 내린다. 우릴 발견한 그가 이쪽으로 달려온다.

“안주미 씨.”

BK엔터의 황아람 매니저였다.

“아, 같이 계셨군요.”

그녀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촬영 때문에 오셨나 보군요.”

“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안주미의 손을 잡는다.

“어머니는 좀 어떠셔?”

“아. 다행히 괜찮으세요. 과로 때문에 쓰러지신 거라.”

“다행이네. 그래도 걱정될 텐데 촬영 취소할까?”

“아뇨. 빠지면 안 되는 촬영이잖아요.”

황아람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렇긴 하지.”

“지금 출발해야겠네요.”

“괜찮겠어?”

고개를 끄덕인 안주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묵묵히 날 내려다본다.

“봤지? 너나 나나 엄마 옆에 있어주기 힘들어.”

녀석의 목소리는 내게 가혹한 채찍질을 가해온다.

“나 먼저 갈게. 올라가서 또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너도 그만 올라가.”

안주미를 보냈다. 녀석은 내게 올라가라 했지만 그렇게 떠날 수는 없었다.

병실로 올라오니 여전히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이 보인다.

천천히 걸었다. 보호 자석에 자리하고 있던 박준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일단 감사부터 드리죠. 덕분에 큰 탈이 없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박준이 휘휘 손을 내젓는다.

“두 분 얘기는 주미한테 다 들었어요.”

“덕모야.”

들려오는 어머니의 당황하신 목소리.

“지금은 저도 제 마음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요.”

혼란스럽다. 그걸 숨기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먼저 올라갑니다. 미안하지만 어머니 곁을 조금만 더 지켜주세요. 박준 씨.”

“아 네…… 네.”

“조만간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난감한 두 개의 시선, 걸어가는 발걸음은 무척 무거웠다.

* * *

다음 날 아침. DNP의 임원과 팀장들 그리고 기획 3팀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슬슬 시작해 볼까요?”

단상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얼마 전 팀장이 된 주희정이었다. 회사의 급성장기에 입사해 특유의 괄괄한 성격과 주당 기질 덕에 직원들 사이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낸 녀석이다.

“그럼 원라이프 생명 광고 내부 시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대형 광고주는 기획 1팀이, 가전 분야 광고주는 기획 2팀이 맡고 있다면 기획 3팀은 신규 고객을 타깃으로 한 팀이다.

원라이프 생명은 기획 3팀이 오랫동안 공들여온 대형 광고주로 오늘 임원 회의에서 내부 시사가 잡혀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참석자들의 이목이 화면에 쏠린다. 화면에 주름진 얼굴 하나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노인, 시골에서 아내와 함께 집 밭 텃밭을 일구며 살아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복을 입고 대문 밖을 나서는 그의 모습이 흑백 화면을 연상시키는 옅은 채색의 화면에 그려진다. 그리고 인터뷰 형식의 노인의 목소리가 화면 너머에서 들려온다.

“밭일, 힘들어도 보람 있어요. 내 손으로 키워낸 먹거리잖아요.”

노인이 밭을 일군다. 고랑을 따라 잡초를 뽑고 작물을 다듬는 노인. 고된 일이다. 쨍쨍 내리쬐는 태양, 잠시 허리를 편 그가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낸다.

“내다 팔 재주는 없어요. 서울에 있는 애들한테 보내고, 우리 내외 먹고, 남은 건 이웃들하고 나누고, 그 재미에 하는 거죠.”

아내가 새참을 들고 왔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무 그늘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행복해요. 젊을 땐 집사람하고 일주일에 한 번 밥 같이 먹기도 힘들었거든요.”

그가 아내를 바라본다. 뭐가 웃긴지 노부부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보험이요? 쓸데없다고 생각했어요. 깨기 귀찮아서 가지고 있었죠. 근데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이야.”

아내와 함께 그릇을 정리하는 노인, 그 아래 자막이 떠오른다.

“김상식 씨는 원라이프에서 매달 200만 원의 연금 보험을 수령하고 있습니다.”

김상식 씨가 일찍 밭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씻고 나온 그가 집 앞 정원으로 나온다. 아담한 정원에 자리한 파라솔, 그늘 아래 놓인 테이블과 의자. 아내가 건네준 시원한 아이스커피에 뿌듯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럼요. 자식보다 낫죠.”

의자에 앉은 김상식 씨, 안경을 쓴 그가 책을 읽는다. 글귀를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이 다시 줌인되고.

“고마워요. 원 라이프.”

파라솔 아래 한적한 오후를 보내는 노부부, 아담한 정원과 집, 그리고 그 너머 그들이 가꾸는 작은 텃밭이 화면에 잡힌다.

공중에서 촬영 중인 카메라를 향해 김상식 씨가 해맑게 손을 흔든다.

[행복한 노후의 시작, 만나요 원라이프.]

[원라이프, 연금보험 TV CF 40초, END]

다시 밝아진 회의실. 광고 시사는 성공적이었다. 호평이 쏟아졌고 팀장 취임 이후 첫 팀 시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낸 주희정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시사가 끝나고 하나둘 일어서는 사람들.

“덕모 무슨 일 있었어?”

“네?”

“표정이 왜 그래?”

뒤늦게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차혜민이 걱정스레 묻는다.

“아니에요.”

“아니긴, 피곤해 보이는데? 얼굴빛도 창백하고.”

“후우…….”

손을 들어 시사가 끝난 화면을 가리켰다.

“저 광고…… 묘하게 사람 속을 들쑤셔 놓네요.”

찌푸려지는 차혜민의 미간. 하지만 사실이다.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부부의 모습, 광고 내내 연출된 그들의 모습은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모습과 계속 겹쳐 보였으니까.

“너 무슨 일 있구나?”

“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 상담 좀 해주세요.”

차혜민에게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을 꺼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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