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75화
175. 국가대표 카피라이터(6)
문체부 장관 백광열. 그는 정치적인 야심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많지 않은 나이에 문체부 장관, 누구나 인정할 만한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지만 백광열은 야심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장관을 거쳐 차차기 대권 도전.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장세아는 반드시 손에 쥐어야 할 카드였다.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며 그녀를 청와대로 불러올리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그 앞을 막아선 것이 백광열이었다.
자신의 품을 벗어난 저 뛰어난 인재가 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세아는 불만이겠지만 백광열은 무척 신중하게 그녀를 관리해왔다. 빠르게 진급을 시키지도, 권한을 몰아주지도 않았다.
적당한 불만, 그리고 결핍. 그건 백광열의 특별한 관리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김경선 담당관이 장세아와 대립하게 된 것. 그녀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는 보고를 여러 차례 들었다. 지금 장세아에게 적당한 보상이 절실했다.
그래서 지금 백광열은 무척 난감하다.
안덕모와 장세아가 보여준 두 개의 광고 기획, 발표가 끝났을 때 결론은 확실했다.
시선을 잡아끄는 연출, 빨간색이라는 형상화된 의미를 통해 구현해 낸 한국이라는 미지의 세계. 안덕모가 보여준 광고의 압승이었다.
하지만 그걸 발표하면 장세아는 패자가 된다. 설령 결과가 그렇게 되더라도 백광열, 자신의 입으로 패배를 안겨줄 수는 없었다.
“잘 봤습니다. 준비하시느라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결과는 내부 회의를 통해서 추후에…….”
그가 자리를 정리하려 할 때였다.
“제가 졌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회의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된다.
“인정합니다. 안덕모 씨의 광고가 제 것보다 훨씬 좋아요.”
거기 장세아 실장이 있었다.
“……아니.”
의외의 상황에 백광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장관의 반응엔 관심도 없다는 듯 장세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커다란 테이블을 천천히 돌아 안덕모에게 다가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움직임을 뒤쫓는다. 마침내 안덕모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장세아.
“좋은 광고네요. 저의 완패예요.”
그녀가 오른손을 그에게 내민다. 안덕모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앞으로 잘해봐요, 파트너.”
“그럽시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다. 자기의 결정으로 패배자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장세아의 모습에 백광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광고가 결정되었다. 차혜민 대표와 직원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끝나고 식사 한 끼 하자는 장세아의 요청 때문이었다.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차를 타고 청사 근처의 유흥가로 향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횟집. 정갈하게 차려낸 회 접시 건너편에서 장세아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뭐가요?”
“처음 회의 때 불쾌하게 했잖아요.”
불쾌했다고 인정하기도 사과를 받기도 애매하다. 침묵을 지키고 있노라니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내부적으로 좀 불편한 일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중요한 일에 감정을 앞세워 버렸네요. 안덕모 씨는 그 일과 전혀 관련 없는 분인데…….”
그녀의 상황이 대충 그려진다. 하지만 조금 전 패배 선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불편한 상황이 해결된 건가요?”
“아니요.”
“그렇다면 이제 와서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그녀가 쓰게 웃는다.
“그쪽 광고 때문에요.”
그리고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어 놓는다.
“안덕모 씨 광고 보고 나니까 부끄럽더군요. 제 것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느껴졌어요.”
장세아는 이를 갈았다. 김경선 담당관과 연관된 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안덕모, 그리고 DNP가 대단한 존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 경쟁에서 승리해 자신의 존재감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죽도록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물 중 가장 좋아 보이는 것들만 광고에 담았다. 발표 전까지만 해도 장세아는 자신의 광고가 자랑스러웠다. 백광열 장관 앞에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광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덕모는 까마득한 하늘 위에 있었다. 자신은 생각도 해본 적 없던 방식으로 풀어낸 광고를 보며 넘치던 자신감은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일 대신 자존심만 세우고 있었다는 걸.
“갑자기 의욕이 생기더군요. 안덕모 씨 광고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줄 것들이 막 떠오르는 거예요.”
그녀의 얼굴에 한 번도 본 적 없던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는 남아있던 일말의 경계심도 녹여 버리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뭐죠?”
“미지의 세계,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독특한 한국의 모습을 시리즈로 만들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상징으로 등장했던 매운 고추와 마늘 같은걸 캐릭터화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요.”
광고의 효과를 극대화해 줄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였다. 난 짝 박수를 쳤다.
“그거 괜찮네요!”
“그럼 사과 받아주세요.”
그녀가 조심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미안해요.”
“알겠습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오해와 감정이 풀리니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음날부터 광고 기획을 다듬는 작업에 착수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했지만 매끄럽지 않았던 구성, 장세아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참여했고 덕분에 며칠이 지났을 때 광고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아졌다.
완성된 기획은 문체부의 최종 컨펌을 받았다. 곧장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은 DNP와 애드온의 일이었지만 장세아는 매일같이 촬영장을 찾았다.
“자, 드시고 하세요.”
맨손이 아니었다. 촬영장을 찾을 때마다 그녀는 양손 가득 배우와 스텝들을 위한 간식과 음료를 들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함께 정리를 돕는 그녀의 열정은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장세아 씨 어디 갔어요?”
“회사에 급한 일 있다고 좀 전에 갔는데?”
“촬영장 마스코트가 안보이니까 영 허전하네요. 기운도 안 나고.”
“별…….”
웃지 못할 대화는 이곳에서 그녀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를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장세아와 처음 만난 후 정확히 한 달. 마침내 광고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광고는 주요국들의 방송과 인터넷에 동시 업로드되었다. 업로드된 영상의 반응은 기대했던 대로였다.
빠르게 늘어나는 영상 조회수와 다양한 언어로 빠르게 늘어나는 긍정적인 댓글을 보며 난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네?”
난 전화기에서 들려온 소식에 놀랐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당사자의 목소리는 무척 담담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거예요. 덕모 씨랑 일하면서 결심하게 됐고요.]
마치 드림팀처럼 손발을 맞춰온 장세아, 그녀가 직장을 그만두었다.
[정치 말고 진짜 광고를 해보고 싶어요. 사실 너무 늦었죠.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하는 건데.]
“……그렇군요.”
그녀가 겪어온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다.
[저 DNP에 지원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특혜는 없습니다.”
[알아요. 그래도 거짓말이라도 좀 해주면 안 돼요?]
“전 채용 권한도 없는걸요?”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짧았지만 덕모 씨랑 일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다시 만날 수 있게 노력할게요.]
그녀는 DNP에 지원할 것이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성공적으로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다. DNP에게 큰 도움이 될 좋은 인재의 등장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찾아온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난 장세아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안녕을 고했다.
* * *
[한밤의 연예뉴스! 오늘은 개봉 예정인 ‘사랑 섬’의 배우들을 모셨습니다.]
늦은 주말 저녁.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등장했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놓인 쿠션을 집어 내 침대에서 속 편하게 잠든 여자에게 투척했다.
퍽.
“아…… 뭐야.”
그녀가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팔짱을 끼고 한심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방송 모니터링 안 하냐?”
“어? 지금 몇 시야?”
내 침대를 차지한 놈은 안주미다. 같은 건물에 집까지 마련해 줬는데 툭하면 내 집에 쳐들어와 저녁을 뜯어먹고 내 침대를 자기 것처럼 쓰고 있다.
“7시 40분.”
“아…… 좀 깨워주지.”
녀석이 후다닥 다가와 소파에 앉는다. 난 어이없는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깨워달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밥에 수면제 타서 비벼 먹었어? 뭔 숟가락 놓자마자 그렇게 잠을 자?”
“시끄러워, 조용.”
녀석이 화면에 집중한다. 화면에 등장한 안주미가 환히 웃는다.
[네. 너무 좋았어요. 제주도 경치가 너무 예뻐서 힘든 줄도 몰랐던 것 같아요.]
[얼마 전 광고도 인상 깊게 봤어요. 거기서 완전 여신강림 그 자체 던데.]
[호호.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화면 속 안주미가 조신하게 입을 가린다. 미간을 찌푸리며 녀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신? 쟤한테 뭐 먹였냐?”
리포터가 미친 게 분명하다. 헝클어진 사자머리에 한쪽 입에 길게 침 자국을 그린 얘를 보고 뭐?
“죽을래?”
“…….”
그래 여신보단 사신. 그게 바로 안주미다.
[그럼 마지막으로 누가 대표로 한 말씀해 주실까요?]
배우들이 눈짓을 나눈다. 들어 올린 손가락들이 안주미를 가리킨다.
[요즘 제일 핫한 안주미 씨.]
[역시, 주미 씨.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카메라가 녀석을 줌인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내가 모르는 의문의 여인이 아주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알차게 담았어요. 옴니버스 영화 사랑 섬, 많이 많이 봐주세요.]
출연자들의 박수와 함께 인터뷰가 끝났다. 녀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벌써 가게? 주말인데 영화 보면서 맥주나 한잔하고 가.”
“지긋지긋한 스타워즈 또 보려고? 아이고 됐거든요?”
“스타워즈가 지긋지긋하다고? 그럴 수는 없는데.”
“그리고 나 내일 새벽에 촬영 있어.”
녀석이 쓰게 웃는다.
“지금부터 밤새도록 대본 암기해야 돼.”
이제 안주미는 모두가 인정하는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스케줄이 없는 날이 없고 가끔은 오늘처럼 밤새 대본을 외워야 한다. 늘 잠이 부족한 녀석이다 보니 내 침대를 차지해도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고생이네.”
“괜찮아. 좋아서 하는 일인걸, 뭐.”
하지만 알 수 있다. 안주미는 인생의 어떤 순간보다 지금 가장 빛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매일 같은 강행군에도 피로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스케줄이 계속될수록 계속 빛이 나는 게 느껴질 정도.
“고생해라.”
“그래.”
현관문을 열고 녀석이 멀어진다.
우웅.
전화가 걸려온 건 그때였다. 전화기에 찍힌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난 몇 번 멍한 눈을 깜빡였다.
“네. 박준 씨 무슨 일입니까?”
발신인은 박준. 최근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내 생물학적 아버지, 하지만 그가 일요일 저녁에 내게 전화를 할 이유가 없다.
[덕모야!]
너무도 생소한 호칭, 당황하고 잔뜩 상기된 목소리. 거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힌 건 그즈음이었다.
[엄마가…… 네 엄마가 쓰러지셨다!]
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