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74화 (174/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74화

174. 국가대표 카피라이터(5)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현 대통령을 승리로 이끈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하나의 이유에 집중했다.

그건 바로 장세아가 만들어낸 캠프의 모토이자 성공한 카피였다.

[나의 이웃 같은 대통령.]

가장 유력한 정치인에게 권위를 거둬내고 친근함과 소탈함을 강조했던 카피는 선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열세였던 현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웃 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광고에 출연해 편안한 미소를 짓던 광고의 하이라이트는 오래된 대선광고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

시장에서 국밥을 퍼먹는 장면, 후보의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장면, 차이가 큰 젊은 세대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등.

장세아의 광고는 이미 성공했던 대선 광고를 벤치마킹했고 그 결과 캠프를 승리로 이끌었다.

역할이 컸던 만큼 대선 결과가 나왔을 때 장세아의 기대도 컸다. 문체부의 실무자로 배치받았을 때까지만 그랬다. 나이 어린 그녀에게 실무경험을 쌓게 하고 청와대로 불러들일 계획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덧 집권 4년 차. 장세아는 여전히 실장으로 남았다. 이번 발표는 좌절된 꿈에 대한 항변과 마찬가지였다.

[트렌드의 심장, 오세요 코리아.]

K-팝, K-무비, K-푸드를 앞세워 세계 문화 트렌드의 핵심인 한국을 알리겠다는 그녀의 광고 기획.

“대세는 문화 콘텐츠입니다. 세계에서 검증된 우리의 콘텐츠를 통해 한국을 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장세아의 발표가 끝났을 때 백광열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에 대한 야심이 남다른 그가 장세아를 청와대로 보내지 않고 자신 아래 묶어둔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다음으로 DNP 발표가 있겠습니다. 발표자는…… 아. 네.”

자리에서 일어선 차혜민을 확인한 사회자가 재빨리 단상을 비켜준다.

“DNP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차혜민이라고 합니다.”

세련되고 당당한 자태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그건 안덕모의 의도대로였다.

“저희 DNP에게 이렇게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백광열에게 깊이 고개를 숙인다.

“이번 광고,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국가 브랜드, 너무 광범위하고 집중해야 할 부분이 명확하지 않았거든요.”

이번 경쟁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할 수 있다. 결정권자는 장세아의 상관인 백광열 장관, 어지간한 임팩트로 승리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차혜민이 전면에 나선 것.

“고요한 아침의 나라, 백의민족, 한강의 기적. 아주 오래된 한국의 상징부터 최근 뜨겁게 주목받는 문화 콘텐츠까지 이번 광고를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정말 오랫동안 광고를 다뤄왔지만 저도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어요.”

그녀가 안덕모에게 시선을 보내온다.

“그런데 우리 안덕모 씨가 좋은 해답을 찾아낸 것 같더군요.”

그녀의 역할은 기획 발표 같은 게 아니다. 단지 본 발표에 앞서 광고에 임하는 DNP의 자세 정도를 알려주는 것뿐.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많은 기대를 받는 광고이니만큼 이렇게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보고 싶었습니다.”

발표에 앞서 DNP 쪽으로 기대를 끌고 옴과 동시에 백광열과 좋은 대치를 이룬다. 이로써 안덕모는 다대일의 불리한 싸움이 아닌 장세아와의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럼 발표를 들어볼까요?”

안덕모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단상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어깨를 단상에서 내려온 차혜민이 가볍게 두드린다.

시선이 집중되고 김다미가 벽에 화면을 띄운다.

“……시작하겠습니다.”

마침내 단상에 선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한 국가 브랜드 광고. 아이디어는 본질적인 고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을 알리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뭘까?’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평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중에서 광고에 살려야 할 포인트를 짚어내는 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수단.

김다미가 제주에서 가져온 돌하르방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트리거였다.

마그마가 빠르게 식으며 만들어진 현무암은 제주도를 이루는 주된 암석질. 제주 현지에서는 발에 치일 만큼 흔하지만 내륙에 사는 사람들에겐 다르다.

화산이 드문 한반도에서는 무척 이질적인 암석. 그 석회암을 할아버지의 형상으로 다듬어낸 돌하르방은 한반도와 제주도를 구분하는 가장 극단적인 상징이다.

제주도의 오랜 전통인 돌하르방은 타지인에게 제주도에 대한 이질감을 부각한다.

그래서 돌하르방에서부터 난 광고를 풀어나가기 위한 핵심 키워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 광고의 주제는 ‘미지의 붉은색’입니다.”

이야기를 마치자 화면에 몇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소인국에 떨어져 실처럼 가는 밧줄로 온몸이 묶인 걸리버, 처음 발을 디딘 대륙, 그곳의 원주민을 인도인이라 착각했던 콜럼버스, 그리고 한반도에 표류해 당시 조선의 모습을 바라보는 하멜까지.

“미지 앞에서 알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는 것에 놀라게 됩니다. 전 이번 광고에서 외부인의 눈으로 바라본 ‘미지의 붉은색’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화면으로 시선을 보냈다. 날 따라 이동하는 시선들.

“미지의 붉은색이란 뭘까요?”

미지를 발견한 설화와 역사 속 인물들이 사라진 곳에 세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매운맛을 살린 붉은색 음식, 광장을 가득 채운 붉은색 응원 복장, 그리고 늦은 밤 도로를 달리는 배달 오토바이의 붉은 후미등.

“붉은 음식, 붉은 악마,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성격 탓에 늦은 밤에도 신속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독특한 배달 문화야말로 차별화된 한국만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세 장의 사진이 하나로 합쳐진다. 세 장의 사진이 공들인 그래픽을 통해 하나로 뭉치고 섞여들며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우린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등장한 단어, ‘PARTY’.

“바로 파티입니다.”

화면이 전환된다. 이미지로 구성된 광고 피티가 떠올랐다.

거대한 중세 갤리선 한 대가 해변으로 다가온다. 배가 멈춰 서고 땅에 내려서는 남자. 복장은 정글 탐험가의 복장, 손엔 여행자의 캐리어를 들고 있다.

화면이 줌인되고 한 외국인이 화면에 잡힌다. 그가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든다. 들려오는 독백.

[미지의 땅 한국, 이 땅이 붉은색으로 변했다는 소문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수첩이 보인다. 마늘과 고추, 마치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부하들처럼 치켜뜬 두 눈에 뾰족한 삼지창을 들고 있다.

스륵.

수첩이 넘어간다. 목적지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홀로 바삐 달려가는 한국인.

스륵.

밤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가 보인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라이더의 뒤엔 스멀스멀 붉은 기운이 올라오는 박스가 보인다.

[한국인은 백의민족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맵고 독한 것을 주로 먹고, 걷지 못하고 뛰어다니며 빨리빨리를 입에 다니는 붉은 민족이 되었다고 한다. 붉은 악마라고도 불린다고 하던데…….]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해변을 바라본다.

[정말 악마가 된 게 아닐까?]

화면이 전환된다. 남자는 무성한 숲에 몸을 숨긴 채였다. 손을 뻗어 수풀을 치우고 망원경으로 전방을 살핀다.

붉은 옷을 입은 한국인들이 보인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여 앉은 그들이 뭔가를 나눠 먹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망원경을 조작해 확대된 화면, 거기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이 보인다.

시뻘건 낙지볶음이다. 한국인이 상추와 깻잎을 손에 올리고 그 위에 큼직하게 낙지볶음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 올라가는 알이 굵은 통마늘.

“세상에…….”

주인공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진다. 망원경 속 한국인이 쌈을 입에 밀어 넣는다.

볼을 부풀린 채 우물거리는 그가 다른 것을 집어 들었을 때 망원경 위 주인공의 미간이 화악 일그러진다.

“고추를…….”

작고 매운 것이 확실한 고추, 남자가 그걸 빨간 고추장에 푹 찍어 입에 넣는다.

“확인.”

망원경을 내리고 수첩을 펼친다. 마늘과 고추가 그려진 곳, 거기 뭔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사실로 확인.]

수첩을 덮은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본다. 평범한 한국의 가정, 여행을 가려 함인지 짐을 챙기느라 분주한 집안의 풍경이 펼쳐진다.

다급한 가장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외친다.

“시간 없다! 빨리빨리.”

마법의 주문 같았다. 순식간에 짐을 챙기고 출발 준비를 마친 가족.

쾅.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그들이 현관을 빠져나간다.

“빨리빨리!”

업무 중인 은행. 내점객으로 북적이는 은행 창구지만 기다림은 길지 않다. 번호가 찍히면 달리듯 창구로 와서 몇 초 만에 업무가 끝난다.

“와우…….”

경험해 본 적 없던 일사불란한 모습에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탄식. 이번엔 은행 창문 너머 편의점이 눈에 들어온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익기를 기다리던 남자, 그가 불안한 듯 연신 손목의 시간을 확인한다.

“아, 못 기다리겠다.”

참지 못한 그가 뚜껑을 열고 젓가락을 찔러 넣는다. 컵라면에서 익지 않아 한 덩어리인 라면이 그대로 올라온다.

와작.

그가 생라면을 씹어 삼킨다. 주인공이 수첩을 펴 달려가는 한국인 그림 아래 글자를 적어 나간다.

[사실로 확인.]

망원경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밤이 된 거리 번쩍번쩍 조명을 단 오토바이가 보인다. 주인공이 그 모습을 좇는다. 달리던 오토바이가 멈추고 짐칸에서 뭔가를 꺼내 든다.

“음식?”

라이더가 초인종을 누른다. 집안에서 빨간 응원복을 입은 채 축구경기를 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린다. 망원경이 벽에 붙은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두 시에 음식 배달?”

수첩을 펴 오토바이 아래 새롭게 적어나가는 글.

[사실로 확인.]

꼬륵.

배가 고프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가방에서 먹을 걸 꺼내려던 손이 덜컥 멈춘다.

“이런 제길.”

먹을 것이 사라졌다. 낭패한 얼굴의 그가 뭔가를 결심한다. 짐을 챙겨 수풀을 빠져나온다.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즐기던 한국인들이 그를 발견했다.

“이리 와! 빨리빨리.”

그들이 손짓한다. 홀린 듯 모닥불 앞에 앉은 그에게 한국인들이 먹었던 음식이 나온다.

꿀꺽.

두려움과 궁금함에 크게 출렁이는 목젖.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서툰 젓가락질, 들어 올린 낚지볶음이 입에 들어간다.

“오우!”

매운맛에 미각을 난타당한 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간다.

“하하하.”

그 모습에 한국인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시간이 흘렀다. 주인공이 화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입었던 탐험대원 복장 대신 붉은색 티셔츠를 입었다.

걷는 대신 뛰어 한국인 친구에게 다가간 그.

“피자 먹었더니 매콤한 거 땡긴다. 애들 불러서 우리 집에서 파티 어때?”

“짜식. 한국인 다 됐네.”

주인공의 허전한 어깨를 발견한 친구가 묻는다.

“너 가방은 어쨌어?”

“아. 카페에 두고 왔어.”

“가지러 가야 하는 거 아냐?”

“천천히 가도 돼. 그걸 누가 가져간다고.”

“하하.”

두 사람이 어깨를 걸고 걸어간다. 카페에 덩그러니 남겨진 주인공의 가방, 그리고 그 옆에 펼쳐진 수첩이 화면에 잡힌다.

[한국, 붉은색 파티의 나라. 난 그 빨간색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친구와 걸어가던 주인공이 뒤돌아본다. 그리고 환히 웃으며 화면을 향해 손짓한다.

“이리 와. 빨리빨리.”

[Join us, Be the Reds. Korea.]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 광고, 50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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