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73화
173. 국가대표 카피라이터(4)
“어지간하다, 어지간해.”
“그러게 말입니다.”
건물밖 휴게실, 선후배가 사이좋게 담배를 나눠 피우며 최근 태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김경선과 장세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 실장도 장 실장인데, 담당관님도 어지간하시네요. 요즘들어 더 날카로워지신거 같아요. 처음 장 실장왔을땐 그래도 좀 챙기는 것 같더니.”
해외 유학파, 대선 홍보팀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능력을 증명했던 인재. 그래서 장세아에 대한 동료들의 기대는 높았다.
김경선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작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아온 그들이었다.
살갑던 선후배 사이는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영문을 모르는 변화에 모두가 어리둥절할 뿐.
“거긴 다 이유가 있지.”
“이유요?”
“표면적으론 장관 낙하산이랑 터줏대감의 싸움이지, 근데 본질은 달라. 최근 김경선 야당 대선 후보 캠프 합류 얘기가 솔솔 나오는 판이니까.”
“아…….”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이지않는 정치 구도, 후배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면 차기 대선에서 서로 다른 캠프 경쟁자가 될 수도 있어. 그러니 김경선이 장세아를 그냥 둘 수 있겠냐? 어떻게든 기를 꺾어놓고 싶겠지.”
“그놈의 정치, 정치. 전 이놈의 조직이 일을 하자고 모인 건지 정치를 하자고 모인건지 모르겠어요.”
매년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심심치 않게 겪어왔던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게 장관이었으며 장관이 바뀌면 그와 손발을 맞출 낙하산들이 따라오게 마련이었다.
그로 인해 생겼던 갈등이 이제 지긋지긋해진 그였다.
“그러게 말이다.”
선배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슬슬 들어가자. 늦는다고 뭐라 하겠다.”
“그래요.”
그렇게 돌아온 사무실, 하지만 분위기는 역시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
“아무튼 이 일 장관님께 결정받을 겁니다.”
서슬 퍼런 대꾸에 사무실 분위기가 영하까지 떨어진다.
“이봐요! 장세아 실장.”
예상처럼 김경선 담당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분명히 장관님한테 컨펌받은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다 짜놓은 판이야. 장 실장이 뭔데 제멋대로 판을 뒤집으려는 거지?”
“말씀드렸잖아요.”
상관의 지적에도 장세아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DNP건 안덕모건, 제 눈에는 선정 과정도 없이 특혜받은 사기업일 뿐입니다.”
“……아니.”
김경선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만나보니 엉뚱한 소리나 지껄이는 함량 미달로 보이는군요. 혹시 모를 실패를 예방하기 위해 사후 검증이라도 하겠다는 건데.”
장세아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것도 못 하게 하시려구요? 아, 혹시 그쪽이랑 저 모르는 이면 합의 같은게 있나요?”
“장 실장!”
버럭 소리치는 김경선. 하지만 움츠려드는 건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들뿐이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을 하세요. 소리치지 마시고.”
볼일이 끝났다는 듯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소한의 검증도 없이 진행 못 해요. 어차피 다 저한테 맡기신 일이잖아요? 그럼 알아서 하게 두세요.”
마지막 말을 쏟아내고 차갑게 돌아서는 장세아, 김경선은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 * *
“후우…….”
노트북에 가득 채웠던 메모를 지워 버렸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렵네.”
어제부터 계속 아이디어 구상중이다. 아이디어는 계속 떠오르지만 이거다 싶은 좋은 아이디어는 없다.
그래서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중이었고 덕분에 제법 지쳐 버렸다.
하루가 넘도록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내겐 무척 생소한 경험이다. 하루에 두 편 세 편의 아이디어도 만들어 봤고 아무리 중요한 광고라도 고민은 반나절을 넘긴 적이 없다.
광고일을 시작한 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던 난처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물론 알고 있다. 무엇이 날 이토록 곤란한 상황에 빠뜨렸는지.
‘부담감.’
국가의 이미지를 브랜딩하는 일이다. 어쩌면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 오천만이 아니라 수억의 인구가 내 광고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이번 광고는 누가 뭐래도 부담스럽다.
잘 깔린 판이라고 해도 어려운데 적대적인 파트너까지 발목을 잡는다. 부담감에 더해 불쾌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탁.
빈 화면을 보고 있기 괴로워 노트북을 닿았을 때였다.
벌컥.
예고 없이 집무실 문이 열린다. 놀라 고개를 들었고 거긴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김다미였다. 꾸벅 인사와 함께 의자를 끌고 와 책상 앞에 앉는다.
“얘기 들었어요. 엄청난 광고 만드신다면서요?”
소식을 들은 모양. 녀석이 자기 일이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밝힌다.
“대단하시네요. 그럼 국가대표 카피라이터?”
“비행기 태우지 마라. 안 그래도 죽어가는 중이다.”
“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제주 일 마무리는 잘했어?”
“네. 물론이죠.”
녀석이 품속에서 USB 하나를 꺼내 든다.
“현지에서 가편집까지 끝냈구요. 조금만 손봐서 보내면 끝이네요.”
“한번 보자.”
닫았던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녀석이 건네준 USB를 연결했다. 화면에 영상이 떠올랐고 녀석과 함께 보기 위해 화면을 돌려 놓았다.
광고가 재생된다. 스토리보드로 만들었던 내용을 영상으로 잘 살렸다.
[기다릴게요.]
제주도의 상징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안주미?”
“네.”
녀석의 두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다.
“오해하지 마세요. 선배님 동생이라서 쓴 거 아니니까.”
화면에 그 모습이 등장한다. 하늘하늘 원피스를 입은 채 남자 주인공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녀석.
“유 감독님 내려오셔서 영화 촬영하는거 다 보셨거든요. 여주인공 이미지랑 안 맞다고 직접 결정하신 거예요.”
“아…….”
애드온 유원석 감독, 촬영본부를 이끄는 그의 결정이라면 충분히 납득할수 있다.
녀석이 내 동생이라는 걸 모르기도 하지만 안다고 해도 가족관계라는 이유로 자기 작품에 맞지 않는 배우를 등장시킬 사람이 아니니까.
“어때요? 정말 잘 살렸죠?”
영화란 위대하다. 손만 대도 쏘아 대기 바쁜 고슴도치를 저런 이미지로 바꿔놓다니.
40초 남짓의 광고가 끝났을 때 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네. 잘했어.”
솔직한 평가와 함께 분리한 USB를 돌려주었다. 그걸 가방에 넣은 손에 검은색 무언가가 달려나온다.
“뭐야, 그건?”
“선물이요.”
탁.
검은색 무언가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그게 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돌하르방?”
“네.”
현무암으로 조각된 엄지손가락만 한 돌하르방, 제주도에 있으면서 수없이 봐왔던 흔하디흔한 2천 원짜리 기념품.
“무슨 선물이 이래?”
“받은 대로 돌려주는 거죠. 그 자유의 여신상.”
“크흠.”
기억났다. 미국에서 사 온 기념품, 고민하기 귀찮아서 대표부터 말단직원들까지 하나씩 돌렸던 그 병따개.
“병따개는 정말 쓸모없는 기념품이지만…….”
녀석이 돌하르방을 집어 책상 위에 올려진 화분 위에 올려놓는다.
“이건 달라요. 화분하고 퍽 잘 어울리니까.”
“진짜, 제법 어울리네.”
“그쵸?”
녀석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화분을 만족스레 바라본다. 아담한 화분, 그 위에 비스듬히 올려놓은 돌하르방. 작은 식물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화분을 살려줄 좋은 캐릭터. 제주를 표현하는 상징.
“음…….”
머릿속에 괜찮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대로 놓아 보내면 안 될 생각, 그래서 시간을 확인했다.
“곧 퇴근 시간인데 혹시 바빠?”
“아뇨. 퇴근할까 하다가 들른 거예요. 디자인팀에 광고만 넘기면 돼요.”
“잘됐다.”
김다미의 얼굴에 기대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나랑 회의 좀 하자.”
하지만 이내 푸쉬쉬 꺼져버린다.
“갑자기 무슨 회의?”
“네가 말한 그 엄청난 광고에 대해서.”
손을 뻗었다. 손안에 들어온 녀석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렸다.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혼자서는 안 될 거 같아. 그래서 너도 국가대표 대열에 합류시키려고.”
“……저 보름 만에 돌아온 건데.”
“알아. 빨리 가서 광고 주고 와. 난 음료랑 먹을거리 좀 사 올게. 모처럼 빡세게 야근 좀 하자.”
“아…… 너무해, 정말.”
울상을 지으며 일어서는 김다미, 난 쓰게 웃었다.
* * *
긴 회의였다. 돌하르방 장식이 불러온 아이디어는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샌드위치와 커피로 끼니를 때우며 밤늦게까지 이어진 회의는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불씨가 불꽃이 되도록 조심스럽게 탈것을 덧대고 옮겨붙은 불꽃을 잘 마른 장작에 옮겨붙이는 과정.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이디어는 벽에 부딪혔고 때론 흔들리고 위태로웠다.
DNP의 모든 직원이 퇴근하고 경비가 마지막 소등을 위해 사무실로 올라와 우릴 발견했을 즈음.
나와 김다미는 예쁘게 장작에 옮겨붙은 불을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삼 일 후. 세종시의 정부종합청사, 거대한 청사 건물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단상에선 남자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진다. 사무실 끝에 서 있던 직원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단상 위 남자가 마이크를 적당하게 조정해 놓고 내려선다.
“후우…… 이거 긴장되네.”
좀처럼 긴장을 모르는 차혜민도 긴 숨을 몰아쉰다.
“하나 드실래요?”
김다미가 가방에서 동그란 무언가를 꺼내 내민다. 차혜민이 피식 웃는다.
“됐어. 적당히 긴장하는 게 도움이 되는 스타일이라서.”
“그럼 선배님은요?”
동그란 금색 우황청심환.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됐다.”
긴장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긴장감보다 더 큰 감정에 지배되고 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회의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 이쪽 시선을 느꼈는지 날카롭게 날 바라보는 장세아.
피식.
그 입꼬리가 불쾌하게 올라간다. 날 지배하고 있는 경쟁심에 화악 불꽃이 일어난다.
“그럼 그냥 내가 먹어야겠다.”
김다미가 청심환 껍질을 벗겨 입에 넣는다. 그 쓴 걸 우물우물 잘도 씹어 먹는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다. 김다미와 철야 회의를 통해 적당한 광고 아이디어를 확정했다.
그리고 이틀은 콘티를 만들고 기획서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어젯밤 늦은 시간, 드디어 발표 준비가 끝났다.
오늘은 그걸 문체부 장관이 참석하는 자리에서 발표하는 날.
장세아의 기획과 우리 기획이 경쟁한다. 장세아가 승리한다면 난 국가 대표 따위가 아니라 우린 아무것도 얻지 못한 패배자가 되어 세종시를 떠나야 한다.
“아우, 써라.”
약을 다 씹어 삼킨 김다미가 황급히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무방비한 모습에 긴장이 조금 풀린다.
그때였다.
벌컥.
회의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정장 차림의 남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재빨리 하던 일을 마무리한다.
“장관님 들어 오십니다.”
그가 열어둔 문으로 백발의 중년남이 걸어 들어온다.
이번 정권 두번재 문체부 장관이자, 인사 청문회에서 자녀 위장전입 문제로 진통을 겪었던 유명인.
회의실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흠.”
그가 위엄 있는 헛기침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그의 발걸음과 발걸음이 향하는 곳, 그 연장 선상에 내가 있다.
“안덕모 씨?”
마침내 내 앞에 당도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네. 맞습니다.”
그가 손을 내민다. 맞잡은 손에 적당한 압력이 느껴진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 직원들이 지나치게 신중하게 일 처리를 하는 모양이더군요. 귀한 분 모셔놓고 피치 못하게 실례를 범한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이런 일이 생겨서 미안하다는 말을 저리 어렵게 하는지.
“아, 괜찮습니다.”
난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광고주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건 광고쟁이의 숙명인걸요.”
“……허허.”
그가 무척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