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70화
170. 국가대표 카피라이터(1)
“어떻게 생각하세요?”
“개인적인 생각 말이야?”
이미래를 개인 집무실로 불렀다.
그녀와 내 테이블 위엔 문제의 이력서가 올라와 있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입을 연다.
“난 뽑았으면 좋겠는데?”
예상했던 대답이 흘러나온다.
“그만한 실력자 드물지, 한국인인 데다가 같은 회사에서 손발도 맞춰봤고…… 메리트 있는 인재라고 생각해.”
그러며 내 눈치를 살핀다.
“사실 내가 먼저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었어. 그땐 싫다고 하더니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경하나의 이력서를 톡톡 두드린다.
“뽑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죠.”
경하나는 좋은 카드다. 한국이 아닌 미국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더 빛날 수 있는 좋은 카드. 그러니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경하나는 DNP 미국지사에 합류한다. 경력이 있는 만큼 보통의 카피라이터 자리에 앉히지는 않을 거다. 미국지사 메인 카피라이터라면 적당하다.
“결국 한배에 타게 됐네.”
그녀의 중얼거림. 씁쓸함이 올라온다.
“네. 동남풍일 때 불렀으면 이렇게 돌고 돌아 만나지는 않았을 텐데.”
“동감.”
이미래가 웃는다.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 * *
상장 후 며칠째 상승세가 꺾이지 않는다. 그건 DNP에 매일매일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었다.
물론 상승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은 건 나. 보유하고 있던 회사의 지분은 매일 두 눈을 의심케 하는 가치 상승을 이뤄내고 있는 중이다.
[그 정도면 재벌 아니에요?]
전화기 너머 김다미의 목소리처럼.
“그래 봐야 얼마 된다고 재벌은……. 그나저나 촬영은 어땠어?”
[잘 돼가고 있어요.]
내가 서울로 올라온 이후 김다미와 직원들은 보름째 현지에 체류 중이다.
스토리보드를 콘티를 포함한 광고 기획으로 만들어 제주도 측에 보여주었다.
다행히 제주 관광의 해를 알릴 첫 번째 광고에 대해 한 번에 컨펌을 내주었다. 빠르게 컨펌이 났으니 일정을 당겨 촬영을 진행해 달라는 제주 측의 요청이 있었다.
진행되고 있는 모든 상황은 김다미에게 공유받고 있다. 애드온 촬영팀이 현지에 합류했다. ‘사랑 섬’ 출연 배우들도 합류했다. 그리하여 며칠 전 콘티대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뭐, 영화 쪽도 잘 진행되고 있구요.]
배익환은 가지고 있던 부담을 털어버렸다. 덕분에 영화 촬영도 착착 진행 중. 이로써 제주도의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다행이네.”
[그나저나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이세요?]
예고 없이 날아온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DNP는 상장사가 되었다. 회사의 급이 달라진 만큼 이제 회사는 한 사람의 놀라운 아이디어가 아닌 직원들의 집단지성으로 운영되는 회사가 되었다.
이런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오래전부터 난 좋은 인재를 모으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회사엔 좋은 인재가 넘쳐난다.
집단을 움직여 좋은 성과를 이뤄낼 수 있는 잘 훈련된 인재. 그들이 이끌어가는 회사의 미래, 난 그 미래가 나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이미 미국행으로 반년이나 자리를 비웠지만 회사는 어느 때보다 큰 성장을 이루어 내고 있음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까.
미국지사엔 믿음직한 두 직원이 확정되었다. 게다가 든든한 우군인 제이 커넥트가 있으니 현지에서 자리 잡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세계화 추진 TF팀장’이라는 내 자리의 의미가 퇴색되는 순간이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년 봄 퇴진이 예정된 차혜민의 뒤를 이어 다시 경영자의 길을 걷느냐, 아니면 집단지성이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회사 안에서 조금 독특한 포지션의 나 홀로 카피라이터가 되느냐.
“아직은 모르겠다.”
두 가지 중 어떤 길도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퇴색된 나 홀로 팀장으로 존재하고 있는 중.
[천천히 생각하세요. 그간 바쁘셨으니까 쉬면서요.]
“그래야겠네.”
전화를 끊었다. 테이블 위 노트북 빈 화면에 커서만 깜빡이는 중. 만들어야 할 광고는 없다, 회사의 중역으로서 결정해야 할 일도 없다. 하지만 두 손은 버릇처럼 자판 위로 향한다.
타탁.
오늘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좋은 장면들, 난 광고주 없는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은 김형철과의 저녁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일찍 일을 마치고 회사를 나섰다. 식사를 하기로 한 식당은 오래전 광인 기획 근처 단골 식당이었다. 그가 반도 자동차로 떠나고 광인 기획에 남아 있었을 때 예고 없이 찾아온 그가 끌고 가곤 했던.
[천하 산업.]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광인 기획 건물엔 다른 회사가 자리를 잡았다. 그때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건물에서 퇴근 시간이 되어 쏟아져 나오는 낯선 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모두가 반대했던 광고 기획사에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첫 출근을 하던 날, 까칠한 경하나를 풀어주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녀석을 데리고 찾았던 회사 앞 커피숍, 눈 내리는 대관령으로 떠나기 위해 승합차에 올라타던 기획 1팀 사람들, 그리고 회사 앞에 세워둔 고급 세단에서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눈으로 날 내려보던 이광배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한참이나 어둠이 내리는 옛 광인 기획 건물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삼겹살집. 마지막으로 찾은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가게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곳에서 김형철을 마주했다.
그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누었고 술이 얼큰하게 올라올 즈음 고민을 털어놓았다.
“짜식,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김형철은 김형철. 도통 내 고민 같은 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고민 말고 결혼이나 해. 너 결혼 적령기 진작 지났어. 당장 결혼해서 애 낳아도 걔 주민등록증 받을 때쯤이면 환갑 되는 건 알고 있냐?”
젊은 시절 그는 후계 경영인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간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고민을 털어놓은 건데 엉뚱한 소리만 돌아온다.
“이사님은 결혼하니까 좋으세요?”
“크흠.”
그렇게 말해놓고 정작 좋냐니까 답을 하지 못한다. 헛기침만 내다가 소주잔을 비운다. 잔에 소주를 따라 넣으니 조금 진지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예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때?”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넌 광고를 계속 만들고 싶겠지. 하지만 네 회사 너무 커져 버렸단 말이야. 생각해 봐. DNP가 예전처럼 부대찌개 식당 광고 받을 수 있어? 건어물, 완도 김 같은 광고 만들 수 있겠냐고?”
“……힘들겠죠.”
DNP는 너무 커버렸다. 상장 전 국내 3위 정도로 평가되던 회사는 상장 직후 시총이 폭발하며 이제 1위를 넘보는 상황.
우리의 주 고객은 대부분 대기업들이 되어 있었다. 작은 회사 광고도 의뢰만 온다면 못 만들 건 없지만 그런 소형 광고주에게 DNP는 너무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게 문제다.
“게다가 안덕모라는 놈도 너무 유명해져 버렸어. 광고제에서 상 받고, 이광배 날리고, 미국 가서 그 난리를 치고 왔는데 어떤 광고주가 너한테 속 편하게 광고를 맡기겠냐?”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철의 말은 고민의 핵심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DNP 안에 머문다면 정답은 정해져 있어. 대표 자리에 앉아서 재벌 놀이하든가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번 돈이나 까먹으면서 놀고먹는 수밖에.”
그제야 김형철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 DNP를 벗어나라?”
그의 입술이 좌우로 길게 찢어진다.
“그렇지. 물론 안덕모라는 이름도 버려야겠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앞에 두고 침묵하는 게 못마땅했는지 김형철이 잔을 뻗어 내잔 에 부딪친다.
“조언은 여기까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건 너 혼자 있을 때 해.”
호쾌하게 잔을 비운다. 잔을 내려놓고 스스로 잔을 채우더니 그 잔을 내게 내민다.
“나 다음 주에 간다.”
그리고 오늘 만남을 졸랐던 이유를 털어놓는다. 이렇게 빠르게 미국지사행이 결정되었는지 몰랐기에 난 놀라 물었다.
“벌써요?”
“그래.”
김형철이 히죽 웃는다.
“회사에 박박 우겨서 지사 사무실 뉴욕으로 옮기기로 했어. 미국 판매도 늘었고 디트로이트에 공장도 없는데 계속 거기 처박혀 있을 필요가 없잖아?”
같은 미국에서 부부가 떨어져 사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난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정말 잘됐네요.”
“본사 회의다 뭐 다해서 가끔 들어오긴 할 거야. 물론 이번에 나가면 반년은 지나야 들어올 수 있겠지. 가기 전에 너랑 술 한잔 못 하고 가면 너 서운해할까 봐 바쁜데 시간 낸 거야.”
“생각해 줘서 고맙네요.”
그가 건넨 잔을 비웠다. 그리고 술을 채워 그에게 내밀었다.
“가서도 건강하세요.”
잔을 받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기대하고 있을게. 반년 후 안덕모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저도 기대할게요. 김형철이 이끄는 미국지사가 과연 언제까지 버틸지.”
“망할 놈이?”
신호는 필요 없었다. 동시에 들어 올린 소주잔.
챙.
잔과 잔이 부딪쳐 만들어낸 소리만이 출발 신호처럼 울려 퍼졌다.
* * *
다음 날 아침.
뚜루루루.
집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무실 전화로 연락하는 사람은 거의 정해져 있기에 난 받자마자 상대를 특정했다.
“네, 대표님.”
예상대로 상대는 차혜민, 그런데 이상하다. 급히 날 부른다.
‘지금 당장 올라오라.’
이유를 모른 채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대표실 옆, 작은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 안에 차혜민과 자인 기획으로 돌아가 기획본부를 이끌고 있는 김상인이 앉아 있다. 그리고 보이는 낯선 두 얼굴.
“여기 앉아.”
차혜민이 옆자리를 가리킨다. 내겐 낯선 얼굴들이지만 저쪽은 날 알아본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이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김상인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문체부에서 나오셨습니다.”
난 두 귀를 의심했다.
“문화체육 관광부?”
“네, 맞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광고 기획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광고심의분과, 그곳이 속한 방송 광고 심의위원회, 화살표의 마지막에 위치한 장관을 가진 행정부처.
김상인이 그중 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쪽은 김경선 담당관이시고…….”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둥그런 얼굴의 여성이 명함을 건넨다. 거긴 정부 상징인 태극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쪽은 서필수 담당관님.”
두 명함을 받고 내 명함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종잇조각일 뿐인 명함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들이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본다.
“제주 자치도 쪽에서 연락을 받으셨데. 전에 김상인 본부장하고 일해본 적 있어서 미팅 잡혔고.”
생각지도 못한 인사들이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가 차혜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광고를 부탁하러 오셨대.”
깜빡이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정부 기관에서 광고를 부탁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이쪽 반응을 살피던 김경선 주무관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국가 인지도를 올리기 위한 정책과제를 추진 중이거든요. 운 좋게 제주 얘기를 들었어요. 그쪽에서 DNP 광고에 대해 극찬을 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안덕모 씨,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광고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쪽 귀로 들어왔다 이해되지 못한 채 반대쪽 귀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멍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