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69화
169. 용서, 가장 잔인한 복수(7)
“웬일이야?”
촬영 사 일째. 스태프들은 알게 되었다.
“그러게? 완전 딴사람 같은데?”
배익환 감독이 달라졌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촬영에 도통 집중을 하지 못하던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컷. 주미 씨. 잘했는데 감정을 좀 더 빼고 담백하게 한 번 더 가봅시다.”
원하는 연기를 주문하고 앵글을 조정하고.
“하이, 큐!”
그는 영화에 걸맞은 감독이 되어 있었다. 붐 마이크를 들고 있던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요. 하루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뭐 적응에 시간이 좀 걸리는 스타일인가 보지.”
음향감독이 젊은 스태프의 등을 경쾌하게 내려쳤다.
“너도 꾸물대지 말고 움직여. 지금부터 진짜 촬영 시작이니까.”
“아 네네.”
촬영은 순조로웠다. 삼 일을 날렸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채찍이 되어 모두를 뛰게 만들었다.
사 일째엔 하루 만에 이틀간 찍어야 할 분량을 촬영할 수 있었고 덕분에 현장 분위기는 전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컷.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밤 촬영까지 모두 끝났을 땐 어느새 밤 10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봬요.”
“수고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짝짝 박수를 쳐주며 하루의 노고를 위로하는 모습. 배익환의 입가엔 자연스레 미소가 돌아왔다.
“저기…….”
그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고개를 돌린 곳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안덕모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여자. 김다미였다.
“이거 전해드리라고 하셔서.”
자신을 찾아온 이유였다. DNP가 만들었던 광고의 스토리보드.
[너한테 주는 선물 같은 거니까.]
머릿속에 안덕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용건을 마친 김다미가 돌아섰다.
“저기요.”
익환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덕모 동료시죠?”
“맞아요.”
“저기…….”
묻고 싶었던 말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김다미가 살짝 웃는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네.”
고개를 끄덕인 그의 입에서 마침내 흘러나온 말.
“덕모…… 광고 일 좋아하나요?”
맥락 없는 질문이다. 물론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그녀에겐 그리 난해한 물음이 아니었다.
“광고 말고 영화 하고 싶어 하지 않냐, 뭐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다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요.”
“아…….”
“덕모 선배, 오랫동안 그분하고 일했지만 영화 만들고 싶다는 얘기 한 번도 하신 적 없어요. 또 제가 아는 누구보다 이 일, 광고 만드는 거 좋아하고 만족하세요. 오죽하면 대표 자리 걷어차고 자기 발로 카피라이터로 돌아온 사람이니까.”
배익환의 표정이 편안해진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앞엔 명함 한 장이 있었다.
“선배에 대해 궁금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멀어진다. 도도한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익환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DNP 기획 1 팀장, 김다미]
눈치가 빠르진 않지만 알 수 있었다. 걸어가는 저 여자가 안덕모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짜식, 부럽네.”
중얼거리며 그녀가 전해준 서류를 꺼내 들었다. 영화 일을 하면서 한두 번 본 적 있던 스토리보드였다. 기획사가 콘티를 만들기 전 말로 풀어쓴 광고. 제목은 ‘당신을 부르는 소리’.
사락.
첫 장을 넘겼다. 타이핑된 문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인식된 문자들은 머릿속에서 생생한 영상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 * *
주인공인 남자는 직장인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만원 버스로 출근을 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씨름을 벌인다. 쏟아지는 업무, 상사의 짜증, 버릇없는 후배 녀석들. 남자의 일상은 전쟁이다. 낭만이라는 단어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전쟁에 녹초가 된 몸으로 다시 만원 버스에 오른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도 반겨주는 이는 없다. 컴컴한 방을 밝히고 휑한 거실에 몸을 눕히는 남자.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그가 긴 한숨을 내쉰다.
다음 날.
“누구 한 사람 나랑 제주도 좀 다녀와야겠는데.”
상사의 목소리. 파티션 너머로 올라와 있던 고개들이 재빨리 사라진다. 그때 주인공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주인공이 손을 들어 올린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럴래? 그럼 준비해. 곧바로 비행기 타야 하니까.”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주인공, 재난을 피한 동료들이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장면이 전환된다. 제주에서도 전쟁은 이어진다. 내리자마자 이동하고 회의하고 현장을 확인하고. 늦은 밤 주인공이 호텔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작업 중이다.
드르렁.
화면 너머 상사의 코골이가 들려온다.
“후우.”
자료 작성을 마친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커튼 너머 펼쳐진 제주의 야경에 시선을 던진다.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는 기억.
“꺄아! 하지 마, 차가워.”
“하하하.”
편안한 차림의 주인공과 한 여자가 등장한다. 주인공의 팔짱을 끼고 현무암 돌담길을 걸어가던 여자가 고개를 든다.
“안 올라가면 안 돼요?”
주인공은 대답하지 못한다. 끼었던 팔짱이 풀린다. 여자의 두 눈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간다.
“지치고 힘들면 꼭 다시 찾아와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녀가 멀어진다.
“후우…….”
호텔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주인공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다음날 공항. 상사가 주인공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고생했어. 넌 하루 더 쉬다가 올라와.”
“그래도 됩니까?”
“그럼. 네 덕에 일찍 끝난 거니까.”
주인공에게 짐을 받은 그가 멀어진다. 주인공의 얼굴에 환희가 피어오른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달려가는 그의 머릿속엔 그녀의 목소리만이 메아리가 되어 들려온다. 택시에서 내린 그가 등산로를 달려 올라간다. 어느새 노을이 짙게 깔린 해안가 절벽. 주인공이 그곳에 도착했다.
“하아. 하아.”
터질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
찾았다. 절벽 위에 하늘하늘 원피스의 그녀가 있다.
바닷바람에 넘실거리는 긴 장발, 빨간 노을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양 볼, 새빨간 노을을 배경으로 주인공을 향해 뒤돌아선 그녀가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그가 그녀에게 다가간다.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 당신이 그랬지? 지치고 힘들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그녀가 활짝 웃는다. 부신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주인공.
“나 힘들고 지쳤어. 나 이제 여기서 쉬고 싶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그녀. 그때 누군가 주인공의 어깨를 잡는다. 놀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늦게 오셨으면 줄을 서셔야죠.”
그가 번호표 하나를 내민다. 주인공이 멍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든다.
“당신 순서는 일곱 번째.”
남자가 주인공을 잡아끈다.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녀에게 멀어지는 주인공. 그녀를 향해 뻗은 손길만이 애처롭게 떨린다.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 그리고 흘러나오는 애타는 목소리.
“주도야…….”
빙글 돌아가는 화면, 그곳에 여자는 없다. 깎아지는 벼랑의 절경 너머 절정에 이른 노을이 만들어낸 숨 막히게 아름다운 하늘과 붉게 타오르는 바다만이 있을 뿐.
“제주도야아아!”
주인공의 외침을 끝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성산일출봉, 이호테우해변, 오설록, 새별오름, TV 예능 프로로 유명해진 백약이 오름까지. 제주를 대표하는 명소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떠오르는 헤드카피.
[일상에 힘들고 지친 당신, 오세요, 제주도로.]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제주 관광의 해. 사업 홍보 CF 1차, END.]
스토리보드가 끝났다. 배익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을이 비치는 해안가 절벽, 주인공을 기다리는 여주인공, 노을을 등진 채 빛나는 미소를 그려 보이던 그 모습은 ‘도피 남녀’의 킬링씬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이었다.
스토리보드를 모두 보았을 때 익환은 알 수 있었다. 안덕모가 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는지. 그의 영화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던 작품, 익환이 빼앗아가 버렸던 그 작품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웠던 영화 속 장면, 안덕모는 그것을 끌고 와 광고로 만들어냈다. 장면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살린 채 보는 이에게 신선함을 가져다줄 반전을 덧붙여서.
“좋아할 만하네, 광고.”
배익환의 혼잣말처럼, 그는 좋아했던 영화를 그만둔 게 아니었다.
화면에 담고 싶었던 것, 배경과 인물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과거 영화를 통해 했던 그 일을 광고를 통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
배익환은 웃었다. 가슴속에 남아있던 죄책감이 조금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김다미가 전해주었던 스토리보드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어떻게, 해야 할 일은 잘 끝내고 오신 건가?”
도착하자마자 들려오는 핀잔.
“네.”
난 쓰게 웃어 보였다.
“그럼 빨리 가서 서.”
차혜민이 등을 떠민다.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 사람들, 그들이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DNP, 애드온, 그리고 자인 기획의 팀장들. 대충 살펴도 50명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 한 곳에 서 있었다. 촬영 준비 중인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50명의 중심, 그곳이 내 자리였다.
“자, 그럼 찍겠습니다!”
대포 같은 카메라 너머 사진사가 외쳤다.
“두고두고 회사에 걸어둘 사진이야. 참, 뉴스에도 나갈 거니까.”
내 옆에 자리 잡은 차혜민의 목소리.
“이쁘게 웃어라.”
그녀의 지시에 따라 환하게 웃었다.
“자! 하나, 둘, 셋!”
50명의 간부들, 그 뒤로 보이는 깨끗한 신사옥. 현관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경. DNP 코스닥 상장. 축]
찰칵.
DNP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은 그렇게 찍혔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완성된 신사옥 투어가 진행되었다. 많은 기자들이 우리와 동행했고 행사가 끝난 후 간단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다시 돌아온 차혜민의 집무실. 그녀가 바라보던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축하해, 부자 된 거.”
상장 후 주식시세 흐름은 이미 알고 있다. 주식 거래 첫날인 오늘 DNP의 주가는 주식 시장이 열리자마자 요동쳐 진작 상한가에 안착해 있었다.
회사를 세울 때 출자를 했던 대주주들은 이미 돈방석에 앉았다. 상장 전 실시했던 우리 사주 정책에 직원들 대부분이 참여했다.
덕분에 지금 회사엔 축하할 일이 너무 많은 상태다.
“상장사 대표 되신 소감은 어떠세요?”
“네. 죽겠습니다. 저도 제주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장난스러운 대답이 들려온다.
“참. 이거 봤어?”
그녀가 파일 하나를 내 앞에 올려놓는다.
“뭔데요?”
“미국지사 지원자들이야.”
DNP는 한국에서만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게 아니다. 미국지사 설립 준비 역시 착착 추진 중.
손을 뻗어 지원자를 살피려는데 차혜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놀라지 마. 거기 아는 얼굴 있어.”
“네?”
파일을 폈다. 첫 장엔 표로 정리된 지원자 리스트가 올라와 있다. 대부분은 영어로 된 이름들, 하지만 그중 익숙한 한글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하나네요.”
“그래.”
놀라지는 않았다. 카일라 존스의 집에서 녀석을 봤을 때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경력, 능력, 조건. 채용 검토 결과는 합격이야. 근데 난 결정 못 하겠어.”
차혜민이 눈을 맞춰온다.
“쓸지 말지, 네가 결정해.”
난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