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67화
167. 용서, 가장 잔인한 복수(5)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촬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현무암 돌담 아래. 으슥한 곳에서 조필영이 묻는다.
“원하는 거라…….”
뻔한 질문이다. 하품이 나올 만큼.
“보아하니 익환이랑 있었던 일, 알고 계신 것 같은데…….”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에게 이런 얘기 듣는 거 유쾌한 기분은 아니네요.”
표정이 굳어진다. 그래, 그 모습이 편하다.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거 영 보기 불편하더라.
“원하는 거 들어줄 용의는 있구요?”
조필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요구란 것에 대해 가늠해 보려는 거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요.”
팔짱을 끼었다. 오만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영화 접으세요.”
돌아간 말은 천둥이 되어 그에게 내리친다.
“배익환 빼고 창조 필름 영화에서 손 떼세요.”
“아…… 아니.”
말까지 더듬는다. 사람 민망하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어떤 게 말이 안 된다는 건가요? 영화 접고 발 빼는 거요? 걱정 마세요. 대신 영화 제작해 줄 만한 곳 차고 넘칩니다. 아, 제주요? 그것도 걱정 마세요. 접고 새 판 짜서 촬영 들어가면 개봉 예정일인 내년 삼월, 충분히 지킬 자신 있으니까.”
말뿐인 위협이 아니다. 제주에 내려오면서 실제로 검토했던 옵션이었다.
모든 일정이 조금 급박해지고 내가 주체가 되어 여기저기 미안한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만 고객인 제주 측에 훨씬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제공할 자신이 있다.
“그건 안 됩니다. 불가능한 요구예요.”
조필영이 단호하게 맞선다.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오른다.
“왜 불가능하죠? 그쪽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문제없이 발 빼실 수 있도록 신경도 써드릴 수 있어요. 아! 설마 제가 당했던 일이 그만한 대가를 치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뭐 그렇다면 강제로 발을 빼드리게 할 수도 있는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주소록에 하나의 카테고리를 열어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 그 화면을 조필영에게 돌려놓았다.
리스트에 줄줄이 나타난 기자들의 연락처.
마침내 상대의 얼굴이 볼만해졌다.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카멜레온 같다.
“그럼 그쪽 생각은 뭔데요?”
고개를 숙여 겨우 얼굴을 정비하는 조필영, 그의 입에서 들릴락 말락 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덕모 씨가 촬영장에 접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소정의 보상을…….”
“하! 돈이요?”
기가 막힌다. 좀처럼 격한 표현을 하지 않던 내 입에서 탄성이 터지게 만들 만큼.
창조 필름은 그리 여유 있는 회사가 아니다. 그리고 영혼의 파트너로 생각할 만큼 절친했던 배익환도 부자가 아니다.
“돈 많으세요? 한 십억 정도 주실 수 있으세요? 그 정도 아니면 제겐 큰 의미가 없는데.”
내뱉은 말은 헛소리에 대한 욕에 가까우니 대답을 들을 것도 없었다. 물론 그럴 능력이 없는 건 당연하고.
“조필영 씨. 조금 전 제 앞을 막은 짓, 만약 익환이가 시킨 거라면 반드시 이번 영화 망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 그런 거 아닙니다.”
그가 거칠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요? 그럼 한 번은 넘어가도록 하죠.”
촬영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걸음쯤 걷다가 뒤돌아보았다.
“그쪽은 그쪽 일을, 전 제 일을 할 뿐입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상황이 불편하고 못 견디겠다면…… 해결을 위해선 제삼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걸었다. 하지만 조필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백 미터도 되지 않는 그 길이 조필영에겐 천릿길처럼 느껴졌다.
터벅터벅 힘없이 걷는 걸음마다 안덕모의 위협이 떠올랐다.
‘충분히 가능하다.’
안덕모가 어떤 인물인가. 재계 서열에 잡히지도 않는 작은 회사를 이끌고 중원 자동차와 맞섰던 인물이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총수 이광배는 끝나지 않는 재판을 받으며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그의 오른팔이라 전해지던 서규원은 철창신세. 그들과 야합해 광고 심의 분과에 낙하산을 꽂았던 정치인들도 몇 명이나 의원 배지를 뗐다.
그런 그가 작정을 한다. 자신이 버틸 리 없다. 창조 필름은 물론이고 건너건너 알고 있는 모든 세력을 규합하더라도 안덕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갈등의 원인은 배익환이 제공했다. 언론에 알려졌다가는 안덕모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자꾸만 끌리는 다리, 조필영은 섣불리 앞을 막았다가 넝마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촬영장에 도착했다. 촬영장 한편을 차지한 DNP의 직원들 사이 안덕모가 눈에 들어온다. 조필영의 존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감독과 촬영 현장을 주시하는 시선. 그 너머 배익환이 보인다.
촬영장을 휘어잡아도 모자랄 녀석은 여전히 힐끔대며 안덕모의 눈치를 보는 중. 촬영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고 있지만 적절한 지시 같은 건 내려오지 않는다. 촬영장엔 불만스레 촬영을 이어가는 배우와 스태프들, 그리고 영혼 없는 감독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필영은 알 수 있었다. 영화가 이미 망해가고 있다는 걸.
그걸 눈으로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현장을 떠났다.
이틀째 촬영이 지지부진 끝나고 조필 영은 배익환을 불렀다.
마치 하루 동안 지옥에서 고통이라도 당하고 온 것처럼 폭삭 늙어버린 배익환이 묻는다.
“얘기는 해봤어요?”
“……했지.”
“뭐래요?”
조필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 없대.”
“제길…….”
배익환이 벌여놓은 짓이다. 자신의 영화에 녀석을 감독을 쓴 대가로 조필영은 그를 대신해 무시무시한 존재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서 실패했다는 얘기에 욕을 입에 올리는 녀석이 퍽 짜증스러웠다.
“네가 직접 풀어야 돼.”
“네?”
녀석이 휘둥그레 두 눈을 키운다. 더욱 짜증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 하고 있는 녀석이다. 거기 짜증을 내어본들 돌아오는 득 따윈 없다.
“망하게 하려면 진작 그렇게 했어. 근데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이더라. 동생이 영화에 출연하고 있으니까 더 그렇겠지.”
안덕모의 공격에 넝마가 되고 끝난 것만은 아니었다. 문답을 통해 그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게 된 그였다.
“이거 누가 해결 못 해줘. 마지막에 안덕모도 그러더라. 제삼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풀 일이라고.”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인 배익환의 사죄를 원하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영화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기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못 해요.”
“뭐?”
“한 짓이 있는데…… 제가 어떻게 걔 얼굴을 봐요? 그리고 형도 그러셨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히 죗값 치른 거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너무 큰 죄를 지어서 볼 수 없다면서 이미 죗값을 치렀다고 생각한다.
그건 마치 가해자지만 알고 보면 피해자라는 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야, 배익환. 선택해. 지금처럼 모르는 척할 건지, 아니면 찾아갈 건지.”
그래서 조필영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모르는 척할 거면 제대로 해. 상대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등신처럼 눈치 보고 허둥지둥하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못 하겠거든 당장 찾아가.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형…….”
“둘 다 못 하겠어? 그럼 그다음 선택은 내가 할 거야. 대표님한테 사실대로 보고 드릴 거야.”
조필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망한 판이야. 질질 끌다 망하는 것보다 판단 섰을 때 접든, 감독을 교체하든 조치를 취하는 게 손해가 덜하겠지?”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그래서 배익환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걸.
“내일까지 결정해. 아니면 모레 난 서울로 간다.”
마지막 말을 마친 필영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익환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 * *
“어째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요?”
삼 일째 촬영. 김다미의 말처럼 촬영장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변화의 원인은 감독. 그는 연기자들에게 필요한 연기를 주문하고 스태프들을 다독이며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결심했나 보네.”
늘 살피던 우리 쪽 눈치도 살피지 않는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현장에서 연기 중인 배우와 스태프들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중.
“이대로 밀고 나가는 걸로요?”
“그렇겠지.”
“참…… 역시나는 역시나네.”
김다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할래요? 저거 그냥 두실 거예요?”
내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김다미는 확 터뜨려 버리자는 주의.
“흠.”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배익환은 지금 무리하고 있다.
눈에 띄게 과장스러운 행동, 수시로 닦아내는 땀방울, 불안함에 달달 떠는 다리.
내가 아는 배익환이란 놈은 독한 놈이 아니다. 여리고 인정이 많아서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자기 일을 못 하는 스타일.
어찌 독한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만 타고난 성정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곧 결판이 날 거다.
“신경 끊고 우린 우리 일이나 하자. 애들 모아봐.”
“네.”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의 녀석이 자리를 뜬다. 난 팔짱을 낀 채 모처럼 활기가 도는 촬영 현장을 바라보았다.
[언제 올라올 거야?]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차혜민의 목소리, 귀국하자마자 국토 최남단 현장에 내려가 있는 내 상황이 조금 못마땅한 그녀였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왜 몰라? 동생 얼굴 봤으면 나머지는 애들한테 맡기고 올라와. 걱정되는 걸 알겠는데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신경 쓰기 시작하면 금방 나가떨어진다 너?]
그래서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상경을 종용하고 있다. 하지만 차혜민에게 자세한 사정을 얘기할 수도, 그녀의 말처럼 맡겨두고 떠날 수도 없다.
“하나만 확인 좀 하구요.”
[에휴…….]
그래서 돌아오는 건 오늘도 긴 한숨.
[모레 상장인 건 알지? 본인이 최대주주라는 자각은 있으신가?]
“네, 알아요.”
[그날 간부들 모아놓고 신사옥 앞에서 사진 찍을 거야. 웬만하면 상장 당일엔 너만이라도 올라와. DNP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날인데 창업주가 빠지면 그림이 나오겠니?]
“노력해 볼게요.”
[……말을 말자.]
언제까지고 영화가 정상화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나도 언제까지나 제주에 머무를 수가 없고.
그래서 나름의 광고 기획을 시작했다. 제주 측의 추천을 받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발품을 팔아 찍어온 적당한 스팟들. 우린 그것들을 모아놓고 제주 관광의 해에 걸맞은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
촬영 현장에서 어떤 좋은 장면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기에 현장을 떠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제주자치도에서 지원해 준 차량이 있었다. 회의를 할 수 있도록 좌석배치가 가능하고 작지만 테이블도 설치할 수 있는 커다란 승합차. 그게 DNP의 현장 사무소였다.
몇 개의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이디어와 좋은 궁합을 이루는 스팟을 매칭시켜 스토리보드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승합차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문을 열어주고 방문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기, 혹시 안덕모 씨.”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자료에 향했던 시선을 떼어냈다. 승합차 안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한 채 들이민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얼굴에 나 죄지었소, 라고 쓰여있는 배익환.
“배 감독님. 저 여기 있는데.”
“아…… 그러시군요.”
슥슥 긁어대는 뒤통수, 얼굴엔 크나큰 망설임이 스치고 지나간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지만 난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괜찮으시면 저랑 잠깐.”
마침내 녀석이 직접 움직였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내려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난 홀가분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래요. 얘기합시다.”
녀석에게 걸어갔다. 두려운 존재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처럼 그가 후다닥 승합차에서 멀어진다. 차에서 내리기 전 김다미에게 고개를 돌렸다.
“차 문 잘 잠가놓고 있어. 도둑 들면 안 되니까.”
김다미의 의미심장한 웃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배익환의 얼굴이 똥색이다.
“앞장서세요. 배익환 감독님.”
배익환 감독, 일부러 두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아, 네.”
앞장서는 발걸음. 시간이 오래되어도 고치지 못한 녀석의 팔자걸음을 바라보며 난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