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66화
166. 용서, 가장 잔인한 복수(4)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제주자치도 공무원, 제주 알리기 사업 담당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아니…….”
조필영의 미간이 화악 일그러진다.
“이쪽은 영화예요. 결과만 잘 나오면 사업 자체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란 말입니다. 반면에 저쪽은 광고예요. 수익 자체가 없는 데다 파급력도 영화랑 비교가 안 되는 아이템이라구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필영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 말자는 게 아니잖아요. 저쪽 때문에 영향받기 싫으니까 따로 진행하자는 건데. 그것도 안 됩니까?”
며칠 전 배익환에게 안덕모와 있었던 오래전 이야기를 들었다. 필영도 그렇지만 그가 소속된 회사인 창조 필름 역시 이번 영화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기에 문제를 알고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안덕모가 제주를 찾은 이유는 뻔하다. 거의 10년 전 자신의 작품을 빼앗았던 익환에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명확했다.
감독이 흔들리면 영화가 망한다. 영화가 망하면 필영도 창조 필름도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막아야 했고 이렇게 자치도 담당자를 불러내게 되었던 것.
“네, 그것도 안 돼요. 영화랑 콜라보하는 거 저희가 아니라 DNP 쪽에서 건 조건이었어요. 저쪽 땡겨오는데 저희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담당자의 목소리도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필영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 판이 자신의 의도대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착각하시면 곤란해요. 보통이 경우라면 제작자님 말처럼 광고보다는 영화가 메인이 맞죠. 그런데…….”
그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이번 사업, DNP의 광고가 메인입니다.”
“아…….”
“저번 회의 끝나고 두 분은 그냥 돌아가셨죠? 어제 저희 지사 님하고 안덕모 씨, 두 분이서만 저녁 식사한 거 알고는 계세요?”
긴말은 필요 없었다. 안덕모와 DNP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들, 필영이나 창조 필름 따위가 비벼볼 수조차 없는 유명인이었다.
영화보다 광고가 메인이라는 건 무척 괴상한 논리였지만 필영은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있었다.
상대는 메인 투자자, 이쪽은 투자자의 돈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입장. 그러니 갑을관계는 확실하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회의실을 빠져나오는 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무력해진 조필영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사랑 섬.
떠오르는 젊은 신예인 남녀 주인공들이 일인 다역을 맡아 그려내는 옴니버스 영화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부터 대본과 캐스팅, 제작 발표회까지 끝난 상태였기에 촬영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배우와 촬영 장비가 도착하고 제주 자치도 쪽에서는 협의된 촬영 장소가 제공되었다.
11월 벌써 추위가 찾아온 내륙과 달리 가을의 절정을 뽐내는 제주의 모습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고, 그곳에 모두 모인 배우와 스태프들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감독님?”
“…….”
“감독님!”
조감독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배익환.
“준비 끝났다구요.”
그제야 정신이 든 것처럼 익환은 멍한 눈으로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연기 준비를 마친 배우들도, 각자 장비 준비가 끝난 스태프들도, 한곳에 모여 있는 진행요원과 제주 측 관계자들도 모두 배익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뒤늦게 알았다. 모두가 감독의 사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오케이. 시작합시다.”
사인이 떨어졌다. 조감독이 대본을 든 손을 크게 휘저었다.
스태프들이 카메라와 조명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이 험험 헛기침하며 연기 준비를 시작했다.
카메라와 배우 사이에 나타난 슬레이트엔 ‘사람 섬 #3-1’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배익환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액션!”
탁. 슬레이트가 탁 소리를 냈다.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가 돌아간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장면은 감독의 앞에 놓인 모니터에 잡힌다. 그 안의 배우들이 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배익환은 모니터에 집중할 수 없었다.
힐끔.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다. 안덕모, 제주 자치도의 허락하에 촬영 현장에 함께하게 된 오래전 친구.
배우들을 바라보던 그의 두 눈이 자신과 마주친다.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위아래 이빨이 단단하게 악물렸다.
“제길…….”
안덕모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무표정한 그 얼굴조차 배익환에겐 경멸과 조롱으로 느껴졌다. 모니터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는 새 이번 씬 주요 장면이 훌쩍 지나가 버린 뒤였다.
“컷!”
아직 제대로 된 대사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떨어진 중단 신호. 촬영장의 모든 이의 고개가 감독에게 향했다.
“잠깐만…… 잠깐만 끊었다 갑시다.”
배익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빠르게 걸어 촬영장을 벗어나는 감독.
“아니…… 어디 가요?”
조감독만이 바쁘게 그의 뒤를 쫓았다.
* * *
“하…… 개판이네.”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얼굴, 옆구리에 머리에 쓰는 머구리를 끼고 있는 안주미가 보인다.
“시작부터 아주 스펙타클이네. 이번 작품 느낌 괜찮았는데 말이야.”
투덜대던 녀석의 눈에 그제야 김다미가 보인 모양이다.
“아! 안녕하세요?”
녀석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건 김다미도 마찬가지.
“오랜만에 뵙네요.”
둘이 처음 본 건 ‘더 게이트’ 무대인사 이벤트가 있었을 때였다. 녀석이 준 초대장으로 김다미를 데려갔고 무대인사가 끝나고 잠깐 인사를 나누었었다.
물론 자기 오빠가 여자를 데려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녀석은 제법 당황했었다.
“이번 광고도 같이하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왠지 의미심장한 안주미의 물음, 김다미가 슥슥 뒤통수를 긁는다. 반응에 뭔가를 확신했는지 녀석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혹시요.”
“네.”
“얘 미국 갔을 때도 같이 계셨던 건 아니죠?”
맥락 없는 소리, 김다미가 몇 번 눈을 깜빡인다.
“아뇨.”
“다행이네요.”
녀석이 척 팔짱을 낀다.
“얘랑 절대 같이 미국 가지 마요. 거기 갔다가 돌아오면 헤어지는 기막힌 재주가…… 읍!”
난 황급히 녀석의 입을 막아 버렸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알았어, 알았어.”
내 손을 떨쳐낸 녀석이 휘휘 손을 젓는다. 물론 눈치 빠른 김다미는 쓰게 웃을 뿐이지만.
“그나저나 큰일이네.”
안주미가 촬영 현장을 바라본다. 대망의 촬영 첫날, 현장은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감독이었다. 그는 전혀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흐름을 놓치기 일쑤였고 툭하면 ‘컷’을 남발했다. 자기가 이상하다는 걸 아는지 때때로 자리를 비우는 건 보너스였다.
덕분에 배우들의 대기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반나절 동안 촬영은 했음에도 진도가 나가지 않자 스태프들의 의욕도 한풀 꺾여 버렸다.
“결국 한 씬도 못 찍고 하루 날리게 생겼어.”
이번 작품에서 안주미는 다시 한번 메인 조연을 맡았다. 주연들이 일인 다역을 소화하듯 녀석 역시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녀석은 서울에서 여행 온 주인공 커플 사이에 끼어드는 젊은 해녀 역할을 맡았다. 오래 만난 여자 친구에게 권태를 느낀 남자는 힘든 물질을 하는 안주미에게 신선한 매력을 느낀다.
검게 탄 피부와 힘든 물질을 씩씩하게 해내는 건강미, 베테랑 해녀들과 주고받는 제주 사투리가 주는 신선미, 캐릭터 특유의 괄괄한 성격까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녀석은 여주인공급 연기를 펼칠 예정이었다.
“이상해. 이번 영화 진짜 느낌 좋았는데.”
연기자로 전향했어도 녀석의 감은 여전하다. 날카로운 감각은 더 게이트 성공을 예견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하지만 느낌 좋았던 현장은 지금 길 잃은 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와 같다.
“감독이 이상해. 마치 뭐에 쫓기는 것처럼 촬영에 집중을 못 해.”
나와 다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주미는 모른다. 영문도 모른 채 첫 촬영 파행을 겪고 있는 상황, 그래서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모양.
그 일이 다름 아닌 나와 관련한 일이기도 하니까.
“주미 씨.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네?”
안주미의 두 눈에 호기심이 번뜩인다.
“뭔데요?”
하지만 아니다. 내 동생이지만 영화 관계자 이기도 한 녀석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난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인을 받은 김다미가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
“……그게 음, 아무래도 첫 촬영이니까?”
그러더니 엉뚱한 대답을 내어놓는다. 그런 김다미와 날 번갈아 보던 안주미가 눈매를 좁힌다.
“아닌데. 분명히 뭐 있는데?”
그러며 나와 눈을 맞춰온다.
“그래, 너네. 너랑 우리 감독이랑 뭐 있네. 맞지?”
이런 눈치 빠른 놈 같으니. 그때 촬영장으로 돌아오는 감독이 눈에 들어온다.
“시끄럽고 이제 가. 저기 감독 오네.”
손가락을 들어 배익환을 가리켰다.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마침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저 씩 웃어 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얼굴이 똥색으로 변한다. 고개를 돌리고 감독 자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녀석.
“아이씨. 이따가 촬영 끝나고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헛소리를 늘어놓고 자리를 뜬다. 놀러 온 게 아니다. 촬영 현장을 보며 쓸 만한 장면을 광고에 넣을 수도 있고 좋았던 연기를 써먹을 수도 있기에 촬영 현장을 관찰하고 있다. 촬영이 끝나면 우리끼리 광고 구상에 들어가야 한다.
“동생분한테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잘못하면 영화 엎어질 수도 있는데.”
김다미가 걱정스레 묻는다. 감독이 저 꼴이니 정상적인 촬영이 가능할 리 없다. 최악의 경우 영화가 잘못될 수도 있다.
촬영장을 지키고 있는 게 배익환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전개가 아니다.
“일단은 기다려 보자.”
난 쓰게 웃었다.
“상황을 풀 열쇠는 내가 아니라 저쪽이 쥐고 있으니까 말이야.”
* * *
첫날 촬영이 지지부진 끝났다. 그날 저녁 DNP 직원들은 숙소에 모였고 제주 관광의 해를 알리기 위한 광고 구상에 들어갔다. 영화와 콜라보된 광고다.
촬영이 지지부진했으니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길게 끌 것 없이 회의를 끝냈다.
성과 없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촬영이 재개되었다. 하루면 끝나야 할 촬영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오늘의 촬영지도 어제 그 자리.
차에서 내려 촬영장으로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내 앞을 막아 세운다.
“뭡니까?”
“저 조필영입니다.”
기억난다. 며칠 전 회의실 때 배익환 옆에 있던 사람, 창조 필름 제작자라고 했던가.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감독과 제작자, 영화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연의 파트너. 그러니 내 앞을 가로막은 이유 정도는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다미, 애들하고 먼저 들어가 있어.”
경계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직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조필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시죠. 듣는 사람이 많아서 여기서 얘기하긴 어려우실 테니…….”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가 와장창 깨어진다. 피식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앞장서세요.”
“……네. 이쪽으로.”
조필영이 걷는다. 왜인지 축 처진 어깨가 눈에 띄는 뒷모습. 난 그 뒤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