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61화
161. Robin the pirate(6)
지잉, 지잉.
프린터에서 종이가 밀려 나온다. 출력된 종이를 가져온 에밀리가 참석자들에게 그걸 하나씩 내민다. 종이에 기록된 내용들을 모두 읽은 사람들이 하나둘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마지막으로 안덕모가 종이를 내려놓는 모습에 카일라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다.
“좋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회의가 끝났다.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가장 좋은 방향을 결정하고 내용을 구상하고 정리된 내용을 글로 정리한 스토리보드.
각자의 앞에 놓인 한 장의 종이는 브람슨의 광고 내용을 담은 그 스토리보드였다.
아무리 간단한 광고라도 최소 하루는 걸리는 일정이다. 하지만 오늘 회의는 세 시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래서 에밀리의 목소리는 얼떨떨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브람슨 컨펌받고 다음 미팅을 잡는 걸로 하죠.”
기획 회의다. 여기서 정리된 사항은 콘티와 기획안으로 구성되어 광고주의 컨펌을 받는다.
국적 불문 모든 광고기획사가 그러하듯 광고주의 컨펌은 숙명적인 시련. 그렇기에 원샷에 끝나는 기획 회의란 없다.
“뭐 저쪽에서 오케이 하면 다음 회의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카일라가 쓰게 웃었다. 에밀리는 생각했다. 보스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높다고.
수석 카피라이터가 되기까지 수많은 광고를 접해본 그녀의 감각은 속삭이고 있었다. 광고주인 브람슨이 이번 광고를 이의 없이 컨펌해 줄 거라고.
“자, 끝냅시다.”
보스의 짝 박수소리와 함께 회의가 끝났다. 에밀리와 그녀의 동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뒤를 이어 자리에서 일어서는 안덕모.
“일찍 끝나서 시간 좀 비는데.”
그가 동작을 멈추고 카일라를 바라본다.
“커피 한잔 어때요?”
안덕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놀란 경하나의 눈동자. 김형철에게 향했던 시선이 그의 뒤 이미래에게 향한다.
한 박자 늦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두 분 왜 여기 있어요? 설마…… 헤드헌터 만나기로 한?”
어느새 김형철의 옆으로 다가온 이미래.
“맞는데…….”
놀란 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미국 뉴욕, 수많은 회사와 인종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옛 동료를 만났으니. 이미래의 손가락이 경하나에게 향한다.
“설마?”
“네. 제가 그 헤드헌터예요.”
“아…….”
반가움의 인사 따윈 오고 가지 못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두 여자들만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일 뿐.
김형철은 닮은꼴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랬구나.”
잠시 후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물론 장소는 지사 예정지가 아닌 건물 인근의 카페.
경하나는 헤드헌터가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고 그걸 다 듣고서야 이미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결혼했을 때쯤 미국 갔다고 들었어. 벌써 일 년이나 됐구나.”
“아, 정말! 축하드려요, 두 분 결혼하신 거.”
때늦은 축하 인사.
“미희 선배 통해서 얘기 들었는데 출국 일정 때문에 가보질 못했어요.”
“됐어, 됐어.”
김형철이 휘휘 손을 저었다. 성수 기획 카피라이터로 활약했던 경하나. 출국 준비로 바쁘지 않았더라도 결혼식에 참석하긴 힘들었을 그녀다.
“이렇게 만나서 축하받았잖아. 뭐, 무대가 미국이 될 줄은 몰랐지만.”
묘하게 이어지는 악연과 인연.
“의외네. 헤드헌터라니.”
초월적 존재의 장난이 아닐까 싶은 얄궂은 현실에 이미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은 할 만해?”
“네. 겨우 자리 잡았어요.”
경하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 제 힘으로 한 건 아니지만.”
치졸한 수단으로 사업을 확장한 결과 업계에 악명을 떨친 성수 기획, 그 성수 기획에서 밀려난 경하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고민 끝에 미국행을 결정했고 거긴 오랜 상사 근무 경력으로 현지 사정에 밝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빠 덕분이죠. 인맥이 워낙 넓으시거든요.”
미국에 진출한 수많은 한국계 회사들, 경하나는 그들에게 적당한 인재를 소개해 주는 헤드헌터 역할을 시작했다.
보통 인재를 구하는 회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보고 일을 시작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뉴욕의 부동산 컨설턴트는 아버지와 친구였던 사람이 대표로 있는 회사였고 건너건너 들어온 일이다 보니 정보는 부족했다.
‘미국에 지사를 준비하는 회사가 있다 거기서 사람을 많이 필요로 한다더라. 며칠 몇 시에 어디로 가보라.’
알고 있던 건 그게 전부. 정체모를 고객이 열 명이나 되는 직원을 채용할 계획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그녀였다.
“다행이네.”
이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아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경하나가 헤드헌터가 아니라 카피라이터로 여기 왔다며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미래는 그녀를 안덕모만큼 오래 보았다. 누구보다 능력 있던 카피라이터였고 안덕모의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 대단했던 성수 기획마저 에이스로 선택했을 만큼.
하지만 그 아쉬움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경하나가 어떤 식으로 이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채용 얘기를…….”
대신 필요한 업무 이야기를 입에 올렸을 때였다.
“넌, 광고 일 다시 해볼 생각 없어?”
놀란 이미래의 고개가 휘익 돌아갔다. 상대방을 이해하기에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한 말, 그 말을 김형철이 던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국 일은 다 지나간 일이잖아. 하나 정도면 지사에 큰 도움…… 컥.”
무신경하게 흘러나오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미래가 팔꿈치로 김형철의 옆구리를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어으…….”
옆구리를 움켜쥐고 물러서는 김형철. 이미래는 경하나를 살폈다. 타국에서의 반가운 만남이 만들어 낸 엷은 미소, 얼굴에 미소 대신 그림자가 생겨났다.
“신경 쓰지 마, 하나야. 원래 무신경한 거 알잖아? 내가 이런 인간 데리고 살아. 속이 터져 죽겠다니까.”
어색한 미소로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이미래. 경하나의 얼굴은 금세 다시 밝아졌다.
“괜찮아요. 가끔 듣는 얘기라.”
“가끔 들어?”
경하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부모님이요.”
“아.”
한때 저 대단한 안덕모와 비견될 만큼의 실력, 거대 기획사의 헤드 카피라이터였던 과거. 그런 그녀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녀의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이미래도 내친김에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눈치챘겠지만 DNP 지사 설립 예정이야. 채용하려는 인원도 지사 사람들이고.”
워낙 자주 맞아 맷집이 늘었는지 어느새 충격에서 회복된 김형철.
“얘 조만간 상무 달아준단다. 여기 지사장 시킨다고.”
“와. 정말요?”
경하나가 짝짝 박수를 친다.
“상무에 지사장이라니. 정말 축하해요, 팀장님.”
축하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이미래가 진지해진 얼굴로 경하나를 바라본다.
“혹시 생각 있어? 나도 너랑 같이 일하고 싶은데.”
“뭐야? 같은 거 물을 거면서 왜 때리고 난리…….”
옆에선 김형철의 볼멘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인성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녀석이다. 성수 기획의 에이스였던 만큼 회사와도 좋지 않은 관계였고 특히 김다미는 이 녀석을 경멸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래는 알고 있다. 좋지 않은 인성은 안덕모와 함께하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수 기획을 선택하고 DNP와 대립하게 되었던 일의 전말 역시 알고 있다.
가장 절친한 파트너, 조금 특별한 마음을 가졌던 상대인 안덕모. 녀석은 자신의 회사를 세우면서 후배였던 김다미와 이미래를 그 회사에 들이면서도 자신은 부르지 않았다.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건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건, 그 뒤 녀석의 행보에 안덕모의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젠 함께할 수 있다.
무대는 한국이 아닌 미국, 채용 권한은 자신에게 있으며 헤드헌터로 썩히기엔 경하나의 재능이 아까우니까.
“……죄송해요.”
물론 기대했던 답변은 돌아오지 않는다.
“저 지금 일이 좋아요.”
“아…….”
진지했던 이미래의 얼굴이 풀어진다.
“그래. 알겠어.”
그리고 다시 어색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럼 채용 얘기를 해볼까?”
김형철만이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뉴욕 외곽의 주택가, 카일라의 집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좁은 이차선 도로가에 즐비한 보통의 주택들, 그것과 별다를 것 없는 2층짜리 집이었다.
주택 앞의 잔디밭엔 이미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길다란 테이블이 설치되었다. 그 옆의 그릴에선 고기와 야채들이 익어간다.
홈파티를 도와주는 직원들은 끊임없이 술과 먹을거리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이미 얼큰하게 취한 직원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야, 야. 잔 모아봐, 잔.”
술을 좋아하는 한스는 이미 시동을 걸고 있는 중. 지난번 회식 때 보여준 묘기. 일렬로 세워둔 맥주컵 사이사이 올려놓은 위스키 잔을 도미노처럼 빠뜨리는 폭탄주 쇼를 해보고 싶은 모양.
“기다려봐요. 제가 세팅할게요.”
빈 잔들이 일렬로 서고 거기 맥주를 채워 넣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요. 손님 오셨어요.”
카일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원과 이어진 현관문으로 이미래와 성재호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자리는 DNP의 동료들을 위한 홈파티, 메인 게스트 등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을 소개해 주는 건 내 역할이다. 난 그들을 이끌며 인사를 시켰다.
“반가워요. 카일라 존스라고 해요.”
“영광이에요. 실물이 훨씬 미인이시네요.”
이미래와 카일라가 악수를 나눈다.
“한스라고 해요. 조금 전까진 편집부장이었는데.”
벌써 양 볼이 빨개진 한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지금은 한국 회식에 푹 빠진 주정뱅이죠.”
기분 좋은 인사가 이어진다. 메인 게스트가 자리에 앉고 다시 시작된 홈파티, 난 이미래에게 물었다.
“이사님은 어디 가셨어요?”
“금방 올 거야. 들를 데가 있다고 따로 온다고 했거든. 시간 맞춰 오라니까 뭔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이미래가 긴 한숨을 내쉰다.
“안! 하던 거 마저 해야지.”
떨어진 텐션을 버티지 못한 한스의 목소리.
“아, 네네.”
난 다시 잔 세팅을 시작했다. 줄지어 놓은 맥주잔이 스무 개, 그 사이사이에 위스키를 채운 작은 잔을 걸쳐 놓는다. 이렇게 긴 줄을 세워보는 건 나도 이번이 처음.
게다가 중심이 잘 잡힌 테이블이 아니다. 올려놓을 때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잔에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오오.”
“대단해.”
기대 어린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난 조심스러운 손길로 마지막 잔을 올려놓았다.
“자, 세팅 끝. 한스?”
이제 잔을 밀어 도미노처럼 쓰러뜨리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한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제가 꼭 해보고 싶지만 이번엔 참을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카일라의 등을 떠민다.
“이번엔 두 보스가 같이하는 걸로 해요.”
그리고 내 손목을 잡아끈다. 졸지에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파티의 결정체, 기대 어린 눈으로 환호성을 보내는 사람들, 그리고 중심에 선 남자와 여자.
약혼식 같다고 생각한 건 나뿐만은 아닐 거다.
“시작할까요?”
“좋아요.”
조심스러운 손가락 두 개가 위스키 잔에 닿는다. 도미노가 시작되기 전, 난 준비한 구호를 외쳤다.
“로빈의 화살이 표적에 꿰뚫기를!”
단순한 폭탄주 쇼에 의미가 부여된다. 카일라에게 신호를 보냈고 두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잔을 밀었다.
퐁퐁퐁.
차례차례 넘어간 작은 잔들이 맥주잔에 쏙쏙 빠져든다. 하얀 맥주가 튀어 올랐다. 쓰러지던 기세는 점점 빨라진다.
“우오!”
“꿰뚫기를!”
삐익.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도 점점 커진다.
퐁퐁퐁.
10개가 쓰러지면 대성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15개를 넘겼다.
틱.
빗맞은 마지막 잔.
포옹.
아슬한 각도로 쓰러진 마지막 위스키 잔이 스무 번째 잔에 빨려 들어갔다.
“이야!”
누군가의 환호성과 함께 의미모를 환호성이 가득 터져 나온다. 의자가 뒤로 넘어갈 만큼 격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한스는 두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며 결승골의 주인공에 빙의한 상태.
대성공으로 인해 쇼에 부여한 의미는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모두의 사기는 하늘을 찌른다.
팔을 뻗어 잔 두 개를 들어 올렸다. 맥주만 든 잔을 카일라에게, 위스키가 섞인 잔은 내 손에.
“멋진 마법이네요.”
카일라가 웃는다.
“기술이거든요?”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 하지만 보다 중요했던 건 행운, 난 눈높이로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