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58화
158. Robin the pirate(3)
우웅.
내 전화기는 항상 진동 고정이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왜 늘 진동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시끄럽게 울어대는 벨소리가 몹시 거슬렸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우웅.
받지 않는 전화기는 한참이나 몸을 떨어야 했다. 다행히 떨림이 멈추기 전, 난 가까스로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아이고, 머리야.”
여보세요? 대신 튀어나오는 앓는 소리. 전화기 너머 차혜민이 쯧쯧 혀를 찬다.
[어제도 달린 거야?]
“아 네.”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침 7시. 한국은 저녁 8시지만 이른 전화에 벌컥 불안함이 밀려온다.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끙 소리가 났다. 전화기 너머에서 피식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 있어요?”
[한국은 아무 일 없어. 무슨 일은 너한테 있는 거 같은데?]
맥락 없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맨날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 너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아…….”
지난 며칠간 뉴욕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문제의 시작은 그놈의 ‘한국식 회식’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한스에게 꺼냈던 말.
편집부장 한스는 한국인은 김치와 회식을 좋아하는 일벌레라는 비틀린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인식을 깨기보다 더 강화하고 싶은 이상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욕망은 거대한 스노우 볼이 되어 날 덮쳤다.
제이커넥트 편집부 소속 열다섯 명을 모두 모은 술집에서 보여준 한국식 회식의 정수. 열다섯 개의 잔에 술을 채워 파도를 타고 내가 마신 잔을 목표에게 내밀어 잔을 비우는지 확인을 하고 선동적인 구호와 건배를 외치고.
두 달 가까이 타지인으로 미국 생활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 두렵고 지겨웠던 회식조차 그리웠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한스와 그의 편집부 직원들은 한국식 회식에 큰 감명을 받아버렸다.
“안? 오늘은 코리안 바비큐야. 제이콥 녀석이 좋은 데를 예약해 놨다는군.”
“안? 주말에 할 일 없지? 우리 집으로 와. 소박하게 드림팀으로 모여서 홈파티로 즐겨보자고.”
“안? 오늘은.”
“안?”
일과가 끝나면 한국인이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한스는 매일같이 내게 한국식 회식을 졸라왔다.
덕분에 난 알코올에 잔뜩 절은 무말랭이가 되어가는 중.
[술 몇 잔 먹고 길거리에서 퍼질러 자던 애가 안 어울리게 뭔 짓이야?]
“그러게요. 근데 술도 계속 마시니까 늘더군요.”
기사에서 보았다.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술을 잘 마시는 체질이 아니라고. 그럼에도 세계 정상급의 주량을 자랑하는 이유는 누가 뭐래도 한국식 회식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차별 없이 공평하게 마시는 술, 시간이 지날수록 무섭게 고조되는 분위기, 그리고 결국은 한 덩이로 뭉치게 하는 독특한 회식문화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동시에 주량 상승에도 큰 효과가 있음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중이다.
뭐 덕분에 늘어난 뱃살과 비몽사몽 아침은 분명히 부작용이지만.
[에휴…….]
차혜민의 한숨과 함께 술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참, 오늘 첫 방송이지?]
“네. 오늘 정오에 동시 방송이요. 인터넷에도 같은 시간에 업로드될 거예요.”
[챙겨 봐야겠다.]
한국은 새벽일 텐데 특별한 관심이 고맙다.
[제 회사 버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술독에 빠져 사는 놈이 대체 뭔 광고를 찍어놨는지.]
근데 관심에 따가운 가시가 가득하다.
“하하…….”
그저 웃어버렸다.
[참. 다음 주에 성 본부장하고 미래 팀장 그리로 보낼 거야.]
“지사 설립 건 때문이군요.”
차혜민이 연락한 이유다. 마침내 신중하게 검토했던 지사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뉴욕의 중심가 맨해튼, 제이커넥트와 걸어서 5분 내에 닿을 수 있는 적당한 건물. DNP의 미국지사는 그 건물의 한 층을 빌려 10명 내외의 인원으로 스타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래. 현지 컨설턴트 만나서 본격적으로 준비 들어가기로 했으니까, 네가 현지에서 좀 챙겨.]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을 돌려주었다.
[수고하고.]
짧은 인사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읏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숙취가 몰려와 조금 어지러웠지만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촤악.
햇빛을 가렸던 커튼을 치웠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그리고.
“후우…….”
25층 호텔 창밖으로 뉴욕의 아침 풍경이 펼쳐졌다. 난 길게 심호흡하며 새로운 활동무대에 눈인사를 건넸다.
* * *
“조금 전에 폭스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오늘 저쪽 광고가 방송을 탄답니다.”
“폭스?
넬슨 사의 CEO 오피스. 코넬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을 살피던 부하가 설명을 보탠다.
“카일라와 그 안이라는 놈이 만든 광고 말이에요. 오늘 정오 뉴스 전에 첫 방송 된답니다.”
“아…….”
그제야 보고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동양인 카피라이터와 모종의 작업을 시작한 카일라의 제이커넥트. 경쟁에서 도태된 패배자의 몸부림이라고 코넬리는 생각했고 그래서 관심조차 끊어버렸던 일이었다.
“그게 보고 거리가 되나?”
그래서 코넬리의 목소리는 조금 짜증스러웠다. 패배자들의 광고가 아닌 작업 중인 광고주의 소식에 훨씬 목말라 있던 그였다.
“근데 광고 내용이…….”
부하직원이 말끝을 흐렸다. 코넬리는 점점 찌푸려지는 미간을 펴지 못했다.
잠시 후, 폭스의 정오뉴스가 시작되기 전 보고받았던 광고가 화면에 떠올랐다. 넬슨의 중역들을 좌우에 앉혀 놓은 채 코넬리는 날카로운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노파가 등장한다. 그녀는 고풍스러운 흔들의자에 앉아 털실로 스카프를 뜬다. 그녀의 옆엔 손자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있다. 꼬마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본다.
“한 신발 장인가 있었단다. 그는 멋진 신발을 만드는 좋은 기술자였고 자기가 만든 신발을 많이 팔고 싶었어. 하지만 장사는 신통치 않았단다. 그가 사는 마을은 너무 가난했거든. 사람들은 그저 맨발로 사는 데 익숙했어. 그래서 신발 장인은 가게를 닫아야 할 지경이 되었지.”
손자에게 들려주는 노인의 옛날이야기였다.
“신발 장인은 고민했어. 그리고 어느 날 저녁이 되었지.”
어린 손자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장인은 집에 있는 컵과 유리를 모두 모아 잘게 부숴 버렸단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 골고루 뿌렸지.”
“세상에…….”
“다음 날 신발은 모두 동이 나버렸어. 어찌나 신발을 찾는 사람이 많은지 밤늦도록 일해도 모자랄 지경이었지. 장인은 신발을 비싼 값에 팔았고 덕분에 큰 부자가 되었단다.”
노인이 부드러운 눈으로 손자를 바라본다.
“과연 잘한 짓일까?”
손자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아뇨. 나쁜 짓이에요. 사람들 발을 다치게 만들었잖아요.”
“그래?”
노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아주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
손자의 눈이 멍해진다.
“남이 발을 다치건 말건 내가 부자가 되는 게 중요한 거야. 혹시 경찰이 잡으러 오면 안 그랬다고 딱 잡아떼면 돼.”
멍한 눈이 몇 번 깜빡인다.
“세상엔 돈이 진리란다 얘야.”
여전히 인자한 노파의 얼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아이의 얼굴을 비추며 화면이 전환된다.
양분된 화면에 두 아이가 등장한다. 왼쪽은 여자아이, 허름한 옷에 잘 씻지 않아 지저분한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른쪽은 남자아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정장에 깨끗한 얼굴.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나뉜 화면에 두 아이의 일상이 펼쳐진다.
여자아이는 컨테이너에 산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아이가 가방을 메고 좁은 컨테이너를 빠져나온다.
땡그랑.
빈 술병이 발에 차인다. 술에 취해 잔뜩 불러 오른 배를 긁으며 잠든 아버지.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남자아이는 저택에 산다. 메이드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준비된 새 옷을 입고 기사가 세워둔 차에 올라탄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저택, 현관 앞에 선 두 메이드가 깊이 허리를 숙인다.
여자아이는 학교에서 왕따다. 허름하고 냄새나는 아이는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고 있지만 지나가는 아이는 그녀의 등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다르다. 주변에 가득한 친구들, 그들 역시 아이처럼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 환한 표정으로 웃는 아이의 얼굴에 구김 따윈 찾아볼 수 없다.
학교가 끝나고 엄마가 일하는 식당을 찾았다. 접시를 닦는 엄마는 사장 눈치를 보며 준비된 음식을 내놓고 아이는 그걸 먹으며 책을 꺼내 읽는다.
남자아이는 게임에 빠져 있다. 방 하나를 게임을 위한 공간으로 개조해 놓은 공간, 아이는 벽면 가득 떠오른 화면에 집중하며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양분된 화면이 빠르게 지나간다.
여자아이의 힘겨운 일상, 그녀는 손가락질당하고 굶고 쪼들리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반면 남자아이는 다르다. 개인교사 앞에서는 졸고 읽지 않은 책은 책장에 쌓여만 갔다.
상반된 두 화면 속 아이가 성장한다. 여자아이는 노란색 전구를 켜놓고 공부에 열중하고 남자아이는 껄렁한 친구들과 정체불명의 연기가 자욱한 클럽에서 술을 마신다.
정체를 알아볼 수 없던 화면이 빠르게 지나가고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화면.
또각.
여자아이다. 그녀는 비즈니스 정장을 입은 직장인이 되었다. 화려한 건물의 로비를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도도하다. 오랜 노력에 대한 보상일까? 어렸을 적 궁핍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 앞에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덜컥 멈춘다.
남자아이다. 더욱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그에게 임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허리를 굽힌 채였다. 권위적인 눈빛으로 임원을 내려보던 그가 여자를 쳐다본다.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친다.
“겟 아웃.”
짧고 단호한 명령. 급히 뒷걸음질 치던 여자의 힐이 엘리베이터 문턱에 걸렸다. 균형을 잃은 그녀가 뒤로 넘어진다.
지잉.
여자를 내려보는 남자, 경멸 섞인 시선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뒤로 넘어진 채 올라가는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는 여자.
그때 떠오르는 질문.
[좋은 장면인가요?]
화면이 전환된다. 요람 속 아기가 화면에 등장하고 초롱초롱한 눈이 요람 너머 TV를 바라본다. 눈동자에 비친 TV 화면엔 자극적인 장면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총구를 벗어난 총탄에 쓰러지는 남자,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야한 춤을 추는 여자, 어느 남자의 입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요람 위엔 아기자기 예쁜 모빌이 돌아가고 있지만 아이의 시선은 오직 화면만을 바라본다.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에 반사되는 빨간색과 자극적인 실루엣들.
화면 너머 나타난 손 하나가 아이의 눈을 가린다. 화면이 물러서고 눈을 가린 손의 주인이 화면에 등장한다.
[누군가는 이런 장면을 통해서도 세상을 배웁니다.]
카일라 존스였다. 단정한 짙은 회색의 정장 차림의 그녀가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꺼버린다.
[우리가 보여준 장면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단정한 카일라의 얼굴이 단호하게 굳어진다.
[지금부터 우리 행동에 주목해 주십시오.]
치직.
화면에 노이즈가 생겨난다. 노이즈에 가려 점점 희미해지는 카일라의 모습. 화면을 가득 채운 노이즈 사이로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엑스자로 가로지른 두 개의 정강이뼈, 그 위에 자리한 해골 대신 녹색 후드를 덮어쓴 날렵한 남자의 옆모습.
[Robin the pirate. 대중이 주인 되는 광고를 위해.]
긴 광고가 끝나고 시작된 정오 뉴스. 헤드라인을 소개하는 앵커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넬슨의 임원들 중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으흠.”
잠시 후 코넬리가 불편한 기침 소리를 냈다. 조심스러운 시선들이 그에게 향했다.
“설명해 봐.”
테이블 위로 올라온 코넬리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그의 미간을 꾸욱 누른다.
“저것들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낮게 깔리는 대표의 음성, 위협을 느낀 임원들의 어깨가 하나같이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