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56화
156. Robin the pirate(1)
“먼저 우리 협력을 공식화하는 게 좋겠죠?”
고개를 끄덕였다.
DNP의 미국 진출, 지사 설립, 회사의 핵심이 아직 이곳에 남은 이유. 모두 제이커넥트와의 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번 협력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광고주가 아닌 대중에게 광고를 돌려주기 위해 저열한 미국의 광고 판도를 바꾼다.’
행동의 방식은 다양하다. 물론 두 회사 모두 광고 기획사인 만큼 주 무기는 광고지만, 구체적인 행동에 앞서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먼저 공식 명칭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우리의 존재를 규정할 이름,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회사의 협력을 상징할 이름.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명칭이 필요하다.
“흐음.”
오랜 시간 행동을 실천해왔지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주제임이 틀림없다. 카일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심에 빠져든다.
“인정하기 싫지만 시장 주류는 넬슨 같은 회사들이죠. 우리는 주류에 대항하는 포지션이니까…….”
중얼거리는 동안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주류에 대항해 활빈당을 세우고 권력자의 재물을 빼앗아 힘없는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소설 속 인물.
홍길동. 그리고 그의 활빈당을 규정하는 단어.
“의적 어떤가요?”
“의적이요?”
테이블 위에 올라온 키워드에 카일라가 반응한다. 찌푸렸던 미간이 퍼지고 입가에 작은 웃음이 감돈다.
“아, 로빈후드!”
한국에 홍길동이 있다면 서구엔 로빈후드가 있다.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묘하게 닮아 있는 두 문명의 대표 의적들.
“로빈후드 좋네요. 근데…….”
어쩐지 풀색 후드를 걸쳤을 것 같은 그에 대한 이미지가 가지를 뻗어 나간다.
로빈이건 홍길동이건 오래된 옛 질서의 산물이다. 그들이 활동했을 때는 힘없는 시민을 지켜줄 공권력도 언론도 없던 시기.
하지만 현대는 어떤가.
힘없는 시민을 지켜줄 국가와 언론이 있다. 하지만 시민들은 그들의 정신을 갉아먹을 저열한 광고에 무작위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옛날의 로빈후드가 숲에서 활동했다면 이제 로빈후드는 숲이라는 배경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해야 한다.
숲이 아닌 다른 곳. 그러자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
“해적 로빈, 어떤가요?”
“Robin the pirate?”
권력자에 대항하는 의적이 아닌 광고 주류에 대항하는 두 회사의 협력, 산이 아닌 엉뚱한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로빈후드.
“마음에 들어요.”
카일라가 짝 박수를 친다. 그것으로 두 회사의 협력체의 명칭이 결정되었다.
* * *
안덕모가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는 동안 한국 역시 놀고만 있진 않았다.
광고 이미지 컷을 마무리하고 있는 이미래 팀장, 말없이 그녀의 의자 하나를 끌고 온 김다미가 그녀의 옆에 앉는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미래가 묻는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구나?”
“네.”
대답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한숨. 이미래는 자판 위에 올렸던 손을 거두고 김다미 쪽으로 돌아앉았다.
“에어닉스 미팅 다녀왔거든요.”
에어닉스, DNP가 가전 영역까지 활동 범위를 늘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고마운 회사.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DNP에게 의뢰했던 광고, 그것들이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켜 준 탓에 지금 에어닉스는 창사 이래 가장 빠른 성장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파트너십은 공고해졌다. 에어닉스를 소울 파트너라 부르는데 고민할 DNP의 직원은 없다.
에어닉스는 오랫동안 공들여 개발한 무선 진공청소기를 시장에 내놓았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DNP에게 광고를 의뢰했고 DNP의 핵심인 기획 1팀이 광고 기획을 맡았다.
지난 보름 팀 전체가 매달려 만들어낸 광고 기획, 오늘은 그걸 광고주에게 보여주는 날.
“반응 별로였나 봐?”
회사의 주요 업무였기에 오늘 미팅은 이미래도 알고 있다. 김다미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진다.
“네, 전 같지가 않다고…….”
말끝이 흐려진다. 이미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겠지. 그전까지 덕모가 직접 챙겼잖아.”
중원에 영향받은 광고심의 분과가 DNP의 모든 광고에 대해 방송불가 판정을 내릴 때도 DNP의 손을 놓지 않았던 회사다.
어지간한 광고는 직원들에게 맡겼어도 에어닉스만큼은 직접 챙겼던 안덕모였다.
그는 지금 미국에 있다. 그의 빈자리는 남은 직원들이 대신해야 한다.
“예상은 했어요. 근데 막상 부딪쳐 보니 자괴감 드네요.”
김다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 한계인가 싶고, 상대는 황새를 필요로 하는데 전 뱁새인가 싶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부족하다 느낄 만큼 대단했던 안덕모, 그 빈자리를 메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김다미의 어깨는 더 처진다.
이미래는 차혜민 다음가는 회사의 정신적 지주, 김다미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단지 푸념을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이미래는 고민했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 광고, 한번 볼 수 있을까?”
“네.”
김다미가 가방을 뒤져 USB 하나를 꺼낸다. 그걸 이미래의 컴퓨터에 연결했다. 이미래가 파일 하나를 찾아 실행했다. 지난 보름 기획 1팀이 공들였던 에어 닉스 진공청소기 기획안이 떠올랐다.
배경은 어느 가정. 한 남자가 열심히 청소 중이다. 남자의 손길을 따라 목재로 된 거실을 열심히 청소하는 무선 진공청소기.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먼지와 작은 부스러기들이 청소기 헤드로 빨려 들어간다.
키잉.
경쾌한 모터음과 함께 청소기가 지나간 자리, 카메라는 그 자리에 집중한다. 화면이 줌인되고 확대되는 목재 바닥, 반듯한 목재 바닥이 현미경처럼 확대되자 거친 나뭇결이 보이기 시작한다.
목재의 굴곡, 그리고 목재와 목재의 틈에 낀 먼지들. 확대된 화면 속 먼지는 그대로다.
화면이 전환된다. 바닥과 벽이 만나는 구석. 마찬가지로 확대된 화면에 청소가 끝났지만 구석구석 치워지지 않은 먼지와 찌꺼기들이 화면에 잡힌다.
[쉽게 청소되지 않는 구석구석.]
거실에 바람이 분다. 구석에 끼었던 먼지들이 바람에 빠져나와 청소가 끝난 거실을 부유한다.
[에어닉스 무선 진공청소기라면?]
화면에 에어닉스 무선 진공청소기가 등장한다. 실사 화면이 그래픽으로 바뀌고 제품의 특장점인 강력한 모터와 헤드에 자리한 특별한 브러시가 강조된다.
키이잉.
남자가 다시 청소를 시작하자 목재의 틈, 구석진 틈새의 먼지들이 빠짐없이 헤드에 빨려 들어간다. 청소가 끝난 거실엔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완벽하다고 할 만한 청소를 끝난 남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집을 바라본다.
떠오르는 헤드카피.
[동급 최강 출력, 미세 브러시로 당신의 청소를 더욱 완벽하게.]
[에어닉스 무선 진공청소기, 퍼펙트 케어.]
“흠.”
콘티를 살펴본 이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김다미의 물음. 하지만 이미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수염을 매만지듯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나쁘지 않은 광고다. 제품의 특장점도 잘 살렸고 무엇보다 헤드카피가 잘 뽑혔다. 콘티 중간중간 등장하는 멘트도 장면 구성도 흠잡을 곳이 보이진 않는다.
“……특별함이 부족한 것 같네.”
“네. 조 팀장도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제품의 특장점을 잘 부각하는 건 광고의 기본이다. 대부분의 광고주는 그것만 잘 뽑아내도 좋은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DNP의 광고로는 부족하다. 안덕모는 한 번도 이런 식의 평범한 광고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안덕모와 일해본 광고주들은 그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높이 역시 높아진 상태.
“그렇겠네.”
특별히 관리했던 에어닉스는 더더욱.
“수정을 요구하는데 답이 안 나와요. 싹 뒤집어엎자니 납기가 문제구요.”
“흠.”
좋은 광고에 부족한 특별함.
안덕모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옆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지만 그는 지금 한국에 없다.
한국을 떠난 지 한 달, 현지에서 여러 문제에 시달리고 있을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선택 가능한 카드가 아니었다.
“만약 덕모라면 어땠을까?”
이미래는 그의 입장이 되어보기로 했다. 함께 일한 지 4년, 비록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가 광고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모두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 그녀였다.
“선배였다면…….”
김다미도 생각에 잠긴다. 마주 앉아 말없이 각자의 생각에 잠긴 두 사람, 그런 묘한 상황이 오 분쯤 이어졌을 때였다.
“의인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의인화?”
“그래. 구석구석 자리 잡은 먼지를 의인화하는 거야.”
눈을 키우는 김다미,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안덕모의 광고 중 몇 편이 떠올랐다. 광고에 등장하는 사물을 의인화해 눈길을 사로잡았던 특별했던 몇 편의 작품들.
“먼지로 만든 모자를 씌워볼까요?”
이미래가 짝 박수를 친다.
“좋다. 그럼 배경을 평범하게 가지 말고 청소가 잘 안 되는 그늘진 구석으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평범한 청소기가 지나가도 콧방귀도 안 뀌던 먼지들이 에어닉스 거엔 싹 빨려 들어가는 그림 말이야.”
김다미의 눈매가 기분 좋게 휘어진다.
“빨려가는 먼지를 안타깝게 부르는 장면도 좋을 것 같네요.”
“그렇지.”
김다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고마워요, 팀장님. 일 끝나면 제대로 한턱낼게요.”
“하하. 그래.”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김다미. 이미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 버틸 수 있다. 덕모가 만들어준 유산이 있으니까.’
제법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음을 이미래는 자각하지 못했다.
* * *
뉴욕 남동부에 자리 잡은 세계 경제의 중심지. 맨해튼에 위치한 어느 건물의 가장 꼭대기. 창밖으로 거대한 도시를 조망하고 있던 중년인이 고개를 돌린다.
“한국인?”
글로벌 광고 기획사 넬슨을 이끌고 있는 대표, 코넬리였다.
“네. 조이스 콕 광고 때문에 입국한 카피라이터인가 보던데.”
직원이 손에 든 태블릿에 자료를 띄워 내민다. 그걸 받아 든 코넬리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칸 라이언즈? 아, 그놈이군?”
거긴 넬슨의 광고에 대해 공공연한 비하를 일삼고 있는 적대 기업 제이커넥트의 대표, 카일라가 접촉 중이라는 한국인에 대한 정보가 나타나 있었다.
“네. 입국하자마자 접촉 시작해서 긴밀하게 지내고 있는 듯합니다.”
적대 기업인 만큼 상대의 움직임은 특별한 관찰의 대상이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넬슨 사에 비해 훨씬 컸던 제이커넥트, 업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중 하나임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카일라의 움직임은 늘 코넬리의 심기를 자극했다. 이상주의자 호프만 교수와 밀접하게 지내는 것도 광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도. 타고난 미모 때문에 아이돌이 되어 헛소리에 동조하는 머리 빈 것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특히 얼마 전 휴먼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넬슨이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광고시장을 ‘저열하다’라고 혹평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이제 외부인까지 끌어들이는 거냐? 진짜 바닥을 보여주는구나 카일라.”
대충 살핀 패드를 직원에게 내민다.
“아무래도 저쪽은 광고주 돈으로 예술이라도 해볼 모양이네.”
“하하.”
“당분간 저쪽은 신경 쓰지 마. 우린 돈 되는 광고나 열심히 하자고.”
코넬리의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