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52화 (152/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52화

152. 카일라 존스(3)

카일라 존스는 존스 홉킨스 대학 시절 스승인 호프만 교수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광고학과 지도교수인 호프만은 아주 오래전부터 광고업계의 변화를 부르짖어왔다.

호프만은 광고를 종합예술로 보았고 그래서 광고인도 한 사람의 예술인이라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 속에 철학과 원칙을 녹여야 하며 비윤리적 기업의 광고를 배격함과 동시에 작품을 통해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광고인도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명이 아닌 고난도의 창작자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이다.’

광고주의 입맛대로 영상을 만드는 돈의 하수인이 아닌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가진 종합예술인.

그것이 호프만이 주장한 변화였으며 카일라는 전적으로 그 점에 동감했다.

제이 커넥트는 오너의 의지를 받아 제작자의 원칙과 신념을 가진 광고를 제작해왔고 그 결과 대중의 높은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물론 광고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제이 커넥트에 광고를 맡기기 위해서는 다른 광고기획사가 요구 할리 없는 기준을 충족해야 했으며 자신이 도덕적이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 내야 했다.

어이없는 심사를 통과했다고 해서 불만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때론 의도치 않은 결과물을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한 마찰은 서로에게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0년 카일라의 뚝 심덕에 케이 커넥트는 크게 성장했지만 이제 성장은 멈췄다. 카일라와 제이 커넥트의 명성 때문에 광고를 의뢰했던 광고주들도 하나둘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칸 라이언즈의 광고를 보았다.

한국의 어느 카피라이터가 만들었다는 광고는 카일라가 추구하는 이상은 그대로 실현시킨 것이었다.

광고는 제품이 아닌 가족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고유의 감성을 잘 잡아냈고 거기 패밀리 카라는 광고 제품을 절묘하게 녹여냈다.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대단한 광고.’

카일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광고를 만든 한국인의 광고를 찾아보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짧은 세월, 그가 만든 수십 편의 광고를 보았다.

그것들은 칸 광고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광고에 제품은 그저 소품이자 장치, 배경일 뿐이었다.

핵심을 이야기였고 그는 이야기 속에 광고 제품을 교묘하게 매칭해 자연스러운 주목을 끌어냈다.

그러다 보니 그가 겪은 특별한 사연도 알게 되었다.

광고인이 아니었던 사람.

뒤늦게 뛰어든 광고판에서 단숨에 주목받은 천재.

그의 성공을 방해하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신념을 굽히지 않은 남자.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생각했다. 미스터 안이라는 카피라이터가 동력을 잃고 표류하는 제이 커넥트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와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휴먼지의 기자로부터 그와의 인터뷰 소식을 들었다.

정규 인터뷰가 끝나고 자신이 참여하는 프리인터뷰를 간곡하게 요청했다.

성장동력을 잃었지만 카일라는 여전한 화재성을 가진 인플루언서. 요청을 받아들여졌고 오늘 그를 만났다.

‘생각을 강요하지 마세요. 제가 만드는 건 돈이 되는 광고지 예술처럼 고상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한 부탁, 레이글스 광고를 만들어달라는 건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안덕모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고작 20여 분의 시간 만에 그는 한 편의 광고를 뚝딱 만들어냈다.

기획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콘티로 만들어줄 디자이너도 없다. 그저 안덕모의 노트북에 낙서처럼 적힌 레이글스의 광고.

충격이었다. 센세이션이었다.

잘하면 스토리의 도입부 정도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카일라는 완성된 광고 한 편을 선물 받았다.

형태는 낙서지만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레 이글스에 들고가 컨펌을 받아도 당장 오케이 할 만한 재미있고 신선한 광고였다.

자신 역시 천재라고 불리었던 카피라이터였지만 20분 만에 한 편의 광고를 만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노트북 화면 너머 안덕모를 바라보는 카일라의 눈동자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거면 됐나요?”

“아…….”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카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해요. 역시 기대했던 대로네요.”

안덕모의 습작은 카일라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린 이 광고로 레이글스 광고를 찍을 겁니다. 당신은 광고에 대한 권리를 돈으로 받게 될 거고요.”

“좋을 대로 하세요.”

그가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노트북을 주인에게 돌려준 카일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신 제게 한 시간만 시간을 내줄 수 있나요?”

“좋습니다.”

“미스터 안에게 질문을 하나 할게요. 조금 극단적인 예시이긴 해요.”

카일라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은 카르텔에서 광고 의뢰를 받았어요. 당연히 마약 광고죠.”

그녀가 여유롭게 다리를 꼰다. 의도치 않게 시선을 잡아끄는 자태였다.

“근데 카르텔의 로비에 미쳐 버린 정부는 마약 광고에 법적 문제가 없대요. 게다가 광고 조건도 무척 좋아요. 보통의 광고 열 편을 찍어야 벌 돈을 카르텔은 단 한 번의 광고의 대가로 제안했어요.”

젊은 백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난다.

“그렇다면 당신은 카르텔의 광고를 만들 건가요?”

* * *

[그래. 미국은 좀 어때?]

“지낼 만해요.”

연결된 화상 너머 직원들의 얼굴이 보인다. 여긴 호텔 비즈니스 센터, 노트북 액정에 떠오른 내 얼굴 뒤로 몇 사람의 백인과 흑인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까 좋다. 너 간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한 달은 지난 것 같아.]

액정 속 안덕모가 쓰게 웃는다.

[그럼 업무 보고부터 시작할게요.]

[네. 우선 지난달 경영 성과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성재호가 발표를 시작했다. 매주 월요일 회사의 주요 사안을 공유하는 간부 회의였다.

안덕모는 대표직을 내려놓았지만 DNP의 창업주이자 최대주주. 간부 회의 참여는 사전 조율된 것이었다.

[세 개 회사의 영업 이익률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히 전월 자인 기획이 흑자로 전환했고 덕분에 전체 이익률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회사는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DNP는 말할 것도 없고 애드온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새롭게 도전한 특수 영상 제작 부문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광고제작사가 아닌 종합 영상 제작사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건 자인 기획도 마찬가지.

젊은 신생회사로 탈바꿈한 자인 기획은 DNP의 주력인 대형 광고주가 아닌 중소형 광고주들에게 집중했다.

한 회사나 마찬가지인 두 회사가 한 광고로 경쟁하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광고기획사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엉망인 서비스를 제공받던 중소형 광고주들 입장에서 자인의 등장은 센세이션 한 것이었다.

규모가 작아도 자인은 한때 대한민국 5위권의 규모를 자랑했던 회사, 회사의 시스템과 운영은 영세 광고기획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인이 새로운 광고주를 찾아다닌 지 삼 개월, 기다렸던 성과는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증권거래소로부터 회신이 있었습니다.]

[아…….]

[드디어?]

사람들의 이목이 성재호에게 집중된다. 증권거래소로부터의 회신, 그것이 지난 일 년간 지원본부가 추진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우리 회사, DNP가 코스닥 상장 가능 조건을 충족했다고 합니다.]

지난 일 년 우린 상장을 추진해왔다. 회사의 규모와 자금력을 키우고 기업 공개를 통해 보다 시스템화 된 기업으로 나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물론 그게 상장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 회사를 떠나지 않고 버텨준 동료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상장에 성공하면 회사의 가치는 수직 상승한다. 지분을 가진 주주, 특히 창립 초기 자본금 형성에 기여한 창립 멤버들이 마침내 투자의 과실을 돌려줄 수 있게 된다.

[우리 쪽 의향이 확인되면 곧바로 실질심사에 들어갈 겁니다. 심사에 통과되면 주관사를 통해 상장 절차를 밟을 수 있다고 합니다.]

[으흠.]

차혜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DNP 상장에 대해 이견들은 없겠죠?]

그녀가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과거 동남풍 애드 솔루션 출신들은 대부분 지분을 가진 멤버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DNP 창립 이후에 합류한 성재호 본부장이나 디자인 2팀장 같은 사람들에겐 지분이 없다.

[그럴 리가요.]

[없습니다.]

[찬성입니다.]

하지만 이견은 없다. 지분 여부를 떠나 회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일인 것만은 확실하니까.

좋은 일이다.

광고를 계속 만들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창업의 길, 좋아했던 광고를 만들고 우릴 압박하는 세력에 맞서다 보니 회사는 쭉쭉 성장했고 이렇게 놀라운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덕모, 네 생각은 어때?]

갑작스러운 물음에 난 재빨리 웃음기를 지워 버렸다.

“저야 찬성이죠.”

일 년 전 대표로서 시작했던 일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다만, 지분이 없는 직원들도 상장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장 실질 심사가 끝나는 대로 일반 직원을 대상으로 한 ‘우리 사주’ 시행을 제안 드립니다.”

회사의 직원들을 우호적 주주로 편입하는 우리 사주. 이건 상장을 추진하면서부터 고민해왔던 일이다.

혹자는 입버릇처럼 그런 말을 한다.

‘회사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지라.’

주인이 아닌데 어찌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오랜 시간 직원의 입장이었기에 난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주인이 되려면 주주가 되어야 한다. 다만 한주라도 회사 주식이 있어야 내가 열심히 일해 내 주식의 가치가 오른다는 최소한의 주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사주의 방식은 직원이 한 주를 사면 회사에서 한 주를 지원하는 방식이면 좋겠습니다.”

상장 전 무척 저렴한 가격에 주주가 된다. 그것을 회사가 정책적으로 지원한다. 창립 멤버에게만 대박인 상장, 그들만의 파티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직원들을 위해 준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과연 화면 너머 성재호를 비롯한 비 창립 멤버들의 얼굴이 환히 밝아진다.

[상장의 성과를 모두 함께 나누자는 거군요.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

차혜민 대표가 입을 열었다.

[이 건은 내부 검토를 거쳐 공식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추후 실질심사가 끝나는 대로 전 직원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크게 끄덕이는 고개들.

[이제 기획팀 현안을 들어볼까요?]

* * *

[제이 커넥트?]

간부 회의가 끝나고 차헤민만 남은 화면. 난 이틀 전 일을 이야기했고 그건 차혜민에게 생각지 못한 이름임이 분명했다.

“네. 카일라 본인에게 직접 들었어요.”

화면에 잡힌 차혜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데? 제이 커넥트가 뭐가 아쉬워서? 그쪽 입장에서 너나 DNP나 말 그대로 듣보잡이나 마찬가진데.]

“제 생각도 같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라 존스라는 뜻밖의 인물의 등장, 함부로 동의할 수 없었던 의견, 갑작스러운 광고 제안까지.

난 그녀의 괴상한 행동을 보수적으로 응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모두 보여주었다. 그녀가 살아왔던 삶, 미국에서 찾아본 기사들.

“근데 진짜인 것 같아요.”

그건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는 것들이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난 이번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

“아무래도 미국에 한번 넘어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참나…… 네네, 일개 대표가 무슨 힘이 있을까요? 우리 덕모 님이 오라면 가야지요.]

그녀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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