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51화
151. 카일라 존스(2)
“아 저기 오네요.”
카일라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휴먼지의 기자 해리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뚜벅, 뚜벅.
한 동양인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카일라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카피라이터, 첫 진출에 칸 라이언즈 대상을 따낸 신성, 대한민국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DNP의 창립자이자 얼마 전 조이스 콕의 글로벌 광고를 만들어낸 능력 있는 인물.
나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 거만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상당한 커리어를 쌓은 인물이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깔끔한 진한 색 단색 정장, 상의 안에 입은 무늬 없는 하얀색 셔츠는 목이 편하게 단추 하나 푼 채였고 평범한 백팩을 맸다. 패션에 정통한 카일라였기에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옷 중 유명 브랜드는 없다. 손목에 명품시계도 멋을 살려줄 목걸이도, 하물며 포인트가 될 손가락의 반지조차 없다.
‘그가 맞나?’
다른 곳에서 봤다면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맞는지 의심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상대는 기자인 해리와 눈인사를 나누고는 자신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덕모라고 합니다.”
카일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일라 존스예요.”
편안하게 자신을 부르는 호칭, 칼리라고 불러 달라는 소리가 목구멍에 걸렸다가 내려갔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손안에 들어온 안덕모의 손.
“손이 참…….”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카피라이터들의 손을 잡아본 그녀였다. 대부분이 자판을 두드리거나 필기를 하는 그들의 손은 차갑고 여리고 부드럽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단단하네요.”
거칠고 단단하다. 그리고 핫팩이라도 잡은 것처럼 뜨겁다. 손을 빼낸 그가 어색하게 웃는다.
“이렇게 일찍 도착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먼저 와서 기다렸을 텐데.”
“아니에요.”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이었지만 안덕모가 어떤 캐릭터인지 짐작할 수 있는 그녀였다. 젊고, 상대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손을 가졌다.
예상했던 이미지는 아니지만 상대는 깊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은 미스터 안이죠. 그러니 제가 기다리는 게 매너죠.”
어색하게 웃는 안덕모, 그 모습 역시 인상적이다. 그래서 카일라도 환히 웃었다.
* * *
“작년 칸 광고에 대해 카일라 씨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아주 좋았어요.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광고죠.”
인터뷰는 순조로웠다. 한국의 카피라이터가 보는 미국 광고의 현재, 그리고 카일라가 바라보는 안덕모의 광고.
주거니 받거니 질문과 답이 이어졌고 특별할 것 없는 무난한 인터뷰였다.
“미스터 안은 어떻습니까?”
“제가 광고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카일라 씨는 존경했던 선배입니다. 그녀가 만든 광고는 늘 가슴을 뛰게 만들었죠.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게 꿈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부드러운 인터뷰 중간중간 웃음이 이어진다.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스터 안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질문을 받은 카일라가 잠시 고민했다. 지금껏 답변을 하기 앞서 저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난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광고는 자본의 시녀가 아닙니다. 지금 미국의 광고는 날이 갈수록 저열해지고 있어요.”
둥글둥글했던 분위기를 뚫고 날카로운 가시가 튀어나온다. 그럴 거라 예상했는지 휴먼지의 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는 종합예술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광고는 예술과 거리가 멀죠. 자본의 논리에 굴종한 기획사, 성과에 급급한 카피라이터들이 만들어낸 광고만 가득하니까요. 광고엔 창작자의 자존심이 녹아 있어야 합니다. 카피라이터만이 가진 표현기법, 상징, 스토리가 작품 안에 묻어나야 해요. 그래야 비로소 예술이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멈춘 그녀가 내게 시선을 맞춰왔다.
“전 안덕모 씨가 이 문제의 해답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아시아의 먼 나라에서 누구보다 예술적인 광고를 만들어왔으니까요.”
인터뷰가 끝났다. 자리를 주선한 해리가 먼저 자리를 떴다.
하지만 난 자리에 남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의미심장한 마지막 인터뷰의 주인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해답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만지작거리는 잔을 여전히 응시한 채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전 미국의 광고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이 판을 바꾸기 위해 십 년간 싸워왔어요.”
그녀의 어깨가 추욱 처진다.
“덕분에 제이 커넥트는 유명해졌어요. 규모가 커진 만큼 활발하게 저희만의 광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죠. 하지만 이제 한계예요.”
어젯밤, 보았던 기사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위기의 제이 커넥트.’
‘흔들리는 카일라 존스.’
“지금 미국의 광고판은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정복되었어요. 어느 카피라이터도 광고 안에 자신의 생각을 담지 못해요. 그저 광고주가 원하는 영상을 대리 제작 해주는 업자 꼴 된 거죠.”
“광고란 원래 그런 겁니다.”
그녀가 고개를 든다. 파란 눈동자 깃든 이질적인 열기가 후욱 끼쳐온다.
“광고는 예술이 아닙니다. 광고란 광고주의 것이에요. 우린 그들이 원하는 걸 만들고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당신의 생각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고 누군가는 광고를 예술로 여길 수 있다는 것까지 반박할 순 없으니까요. 다만.”
옆자리의 가방을 끌어당겼다. 일어설 준비를 마치고 다시 입술을 뗐다.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마세요. 제가 해답이라는 헛소리도 하지 마세요. 제가 만드는 건 돈이 되는 광고지 예술 같은 고상한 게 아니니까.”
자리에서 일어서기 위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을 때였다.
“거짓말.”
다리가 얼어붙는다.
“돈 되는 광고요? 좋아요. 제가 지금 당신에게 광고를 하나 의뢰하죠.”
“그게 무슨…….”
일어서 걸어가지도, 다시 주저앉지도 못한 채 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상을 썼다.
“레이글즈(Laygles) 알죠?”
알다뿐인가? 레이글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감자칩 중 하나다. 수십 년간 이어온 길쭉한 원통형의 포장 타입 덕에 레이글즈는 다른 감자칩과 완벽하게 차별화된 자신만의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지금 레이글즈 광고를 만들어 보세요.”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광고란 광고주의 요구에 맞는 서비스라는 사실이 왜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녀는 왜 쓸데없는 광고 아이디어를 요구하는가.
털썩.
그래서였을까? 다리엔 힘이 빠졌고 그 결과 난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잠깐만요. 카일라.”
존경했던, 그래서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던 꿈속의 카피라이터. 외모로 보면 광고를 만드는 게 아니라 광고의 모델 역할이 훨씬 어울리는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은 조금 흔들리고 있다.
제길.
“돈을 받고 광고를 만들지만 방송되지 않는 건 만들지 않습니다. 아이디어로 끝나는 광고 같은 걸 만드는 취미는 없어요.”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핸드폰을 조작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지금 녹음 중이에요. 녹음된 파일은 양측이 공유하고 내일 공증받을 겁니다. 지금부터 카일라 존스와 미스터 안의 대화는 계약서에 준하는 법적 구속력을 가집니다. 모든 대화엔 비밀 유지를 약속입니다. 이를 어길 시 저 카일라 존스는 미스터 안에게 징벌적 배상 책임을 지는 걸로 하겠습니다.”
법조인에 빙의된 듯한 유려한 말투.
“미스터 안, 제이 커넥트는 실제 레이글즈로부터 광고 제작 의뢰를 받았어요. 저는 당신의 아이디어를 최우선적으로 채용할 겁니다. 광고화된다면 우린 모든 수익을 미스터 안에게 양보할 생각입니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 단지 대화 수단이 영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물론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야겠지만요.”
“아니…….”
그래서 정리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미스터 안. 지금 레이글즈 광고를 만들어주시겠습니까?”
* * *
결혼한 세 여자가 한 테이블에 모였다. 간단한 맥주를 곁들인 여자들의 수다가 이어지고 여자들의 남편의 한심한 취미 따위가 술안주로 오른다.
“글세, 망할 우리 남편이 애한테 레이글스를 줬지 뭐야?”
“뭐?”
“젖먹이한테?”
여자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남편한테 봐달라고 한 게 문제지. 맛있는 걸 혼자 먹기 미안했다나? 하…… 그걸 변명이라고. 너희도 절대 남편한테 애 맡기지 마. 남자란 장난에 목숨까지 거는 족속이니까.”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세 여자의 동갑내기 자식들. 아직 걷지도 못해 천장에 매달린 모빌 아래 손발을 꼬물거리는 아기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유병을 물고 있어야 할 아이 하나가 양손에 레이글스 통을 들고 있었던 것. 아기는 능숙하게 감자칩 통을 잡고 흔들며 놀고 있다.
“그 뒤론 절대로 손에서 놓지를 않아. 떼어놓으면 막 운다니까.”
“저런.”
“힘내.”
여자들의 위로가 이어진다. 잠시 후 다른 여자가 입을 연다.
“우리 남편도 그래. 며칠 전에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는데 뭔가 현관 앞에 툭 떨어지는 거야. 세상에 우리 아기더라고.”
그날이 떠오르는지 여자의 두 눈에 이글이글 불길이 타올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뛰어가서 안았지. 근데 곰 인형에 아기 옷을 입혀서 2층에서 던진 거더라? 위를 보니까 남편 놈이 동영상 찍으면서 낄낄대고 있어.”
“그걸 그냥 뒀어?”
“올라가서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줬지. 망할 놈!”
“아무튼 남자들이란.”
“우리 남편이랑 똑같네.”
“유치한 족속들.”
한참 남편 욕이 달아오를 때였다.
“어머! 안 돼!”
아이가 있는 쪽을 바라본 한 여자가 소리친다. 두 여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화면에 세 아이의 모습이 잡힌다. 각자 우유병을 문 것처럼 레이글스 통을 두 손으로 잡고 입에 대고 있는 아이들.
처음 도착한 여자가 아이의 입에서 급히 통을 떼어낸다.
“먹으면 안 돼!”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 젖병 대신 들고 있는 레이글스 통을 낚아챈다. 하지만 다행이다. 통은 열려 있지 않았다.
“어디서 났지?”
놀란 한 엄마가 아이를 보며 물었을 때였다.
“헤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로 엄마를 보여 웃는 아이. 엄마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익숙한 표정, 그녀의 남편이 장난을 쳤을 때 짓던 그 표정을 아이가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꺄하!”
“꺄륵.”
셋이 똑같다. 놀란 엄마의 얼굴이 세상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밟게 웃으며 짝짝 박수까지 친다.
“오…… 마이.”
앞날을 예상한 엄마의 허탈한 목소리. 그리고 바닥을 나뒹구는 레이글스 통 위로 떠오르는 헤드카피.
[Every Funny moment, Always Laygles] (재미있는 순간엔 언제나. 레이글스.)
[레이글즈 CF, 35초.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