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48화
148. 세계화 추진 TF(7)
“다미야!”
사무실로 돌아온 김다미를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다.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문을 열자마자 앞을 막아서는 이미래.
“어떻게 됐어?”
“아…….”
기다린 건 한 사람이 아니었다. 안덕모의 개인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는 차혜민.
“결과 나왔니?”
“하하…….”
김다미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며. 말해봐, 어떻게 됐는지.”
기다릴 만한 일이었다. 대표가 아닌 안덕모가 처음으로 맡았던 광고, DNP의 위상을 한 방에 수직 상승시켜 줄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됐습니다.”
대답은 안덕모가 해주었다. 놀란 시선들이 그에게 달라붙는다.
“됐어? 오케이한 거야?”
이미래가 물었고.
“진짜야?”
차혜민도 확인을 재촉한다.
“네. 됐어요. 영상 만들어서 국내 파일럿부터 가보기로 했어요.”
“이야!”
“잘됐다!”
유지되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진다.
“축하해. 덕모.”
“고생 많았어.”
이어지는 축하의 인사들. 하지만 안덕모의 표정에선 여전한 긴장이 느껴졌다.
“축하는 일러요. 파일럿 성공해야 본영상 제작 들어갈 수 있어요.”
터지려는 샴페인 코르크를 막는다.
“대표님, 오후에 애드온 들어갈 거예요. 연락은 해놨고 긴급한 건이니까 시간 되시면 저랑 같이 가주세요.”
“어 그래.”
부탁이 아닌 지시를 마친 안덕모가 김다미를 바라본다.
“다미 넌 BK엔터에 연락해 놔. 배우 섭외 늦으면 안 되니까 출연자 리스트도 같이 넘기고. 그리고…….”
잠시의 고민 후 흘러나온 대답.
“박준 씨 좀 긴급으로 섭외해 봐.”
“네. 그럴게요.”
지시를 마친 안덕모가 발걸음을 옮긴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세 개의 시선이 뒤쫓는다.
“어우, 축하고 자시고 완전 전쟁 나가는 사람이네요.”
이미래가 투덜댔고.
“네. 오는 동안에도 내내 저랬어요. 지금 저 머릿속엔 온통 광고만 가득한가 봐요.”
“그럴 만도 하지.”
차혜민이 두 사람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조이스 콕이야, 조이스 콕. 무지막지한 대어가 이제 막 미끼를 문 거라고, 잡아서 끌어올리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녀가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는 안먹모를 보며 쓰게 웃었다.
“자, 낚시에 초치기 싫으면 우리도 움직이자고.”
두 사람의 어깨를 잡은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 * *
실패한 세 개의 광고, 개별로 보이던 그들이 한 가족이라는 깜짝 반전은 통했다.
제임스 맥닐의 눈높이가 어느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써본 일종의 트릭이었다.
한 방에 짠하고 모든 걸 짠하고 보여주는 대신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 결과물 세 개를 던져놓고 그것을 한 방에 관통하는 프레임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도 실망이었지만 제임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실패했던 세 번의 기회, 그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프레임을 위한 장치였다는걸 깨달은 순간 제임스가 보여준 반응은 볼만한 것이었다.
트릭은 먹혔다. 제임스는 한국 체류 기간을 늘려 완성된 파일럿 광고 영상까지 확인하길 원했다.
그리고 우린 광고주의 고집스러운 원칙, 즉 세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인 동시에 단 한 번의 실패도 있어서는 안 된다. 덕분에 내 얼굴은 시종일관 심각했고 그건 애드온과의 제작 미팅까지 이어졌다.
“네. 알겠습니다.”
얼마 전 승진으로 애드온의 총괄 제작부장이 된 유원석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님, 지금 촬영 감독들 일정이 안 나와요. 다들 촬영 중인데 끝나려면 십일 이상 남았는데.”
“걱정하지 마.”
그가 직원의 이야기를 잘라냈다.
“내가 메가폰 잡을 거니까.”
“부장님이요?”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조이스 콕 광고 찍어보겠냐?”
너스레를 마친 그가 나와 차혜민을 바라본다.
“걱정 마세요. 있는 힘 없는 힘 다 보태서 촬영 지장없 도록 할 테니까요.”
이걸로 촬영 준비는 끝.
[네네.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저희 대표님이 직접 챙기고 계시거든요. 박준 씨도 마침 일정이 비고 촬영 일정 잡혀 있는 배우들도 최대한 조율해서 DNP 일정에 맞출 거예요. 빠르면 내일까지는 조율 끝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BK엔터 황아람 매니저의 목소리.
[배우 후보 라인업까지 다 짜서 보내주셔서 일이 한결 편하네요.]
“라인업이요?”
누군가 출연자 라인업을 결정해서 섭외 제안을 보냈다. 확실한 건 내가 한 일은 아니다.
[어쩐 일이세요? 이런 거까지 신경 쓰신 적 없는 걸로 아는데.]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배우 면접은 준비되면 한꺼번에 볼게요.”
[네. 그래요.]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드니 개인 책상 옆 회의용 테이블에 앉은 김다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온다.
“너구나?”
“하하.”
녀석이 슥슥 뒤통수를 긁는다.
“라인업을 정해서 보내줘야 진행이 빠르지 않을까 싶어서…….”
그동안 난 내가 원하는 이미지 정도만 연예기획사에 보냈다. 그걸 검토해 면접 볼 배우를 선정하는 건 BK엔터의 몫이었다.
하지만 김다미는 그 몫은 자기가 해버렸다. 오랜 시간 광고를 만들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방식이었다.
“전문가도 아닌데, 괜한 짓을…….”
“아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했어. 이렇게 하면 확실히 시간을 아낄 수 있지.”
좋은 시도다. 내가 지시하지 않아도 녀석이 스스로 고민해 실행에 옮긴 긍정적인 변화.
“무엇보다 널 믿어. 이번 광고 처음부터 끝까지 너랑 같이했으니까.”
녀석이라면 어떤 배우가 적정한지 누구보다 잘 알 거다. 신뢰를 담아낸 단호한 목소리에 녀석의 양 볼이 붉게 달아 오른다.
“고맙긴 한데, 깜빡이 좀 켜고 들어볼래요? 놀랜단 말이에요.”
녀석이 수줍게 고개를 숙인다. 이로써 배우 섭외도 끝.
“윤재원 팀장님?”
화면에 집중하고 있던 윤재원, 무심하게 돌아본 얼굴이 날 알아보고는 조금 놀란다.
녀석은 얼마 전 기획 2팀장이 되었다. 가전에 정통한 팀장 덕에 기획2팀은 집중하는 분야가 확실한 특색 있는 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특유의 추진력, 냉철한 판단력 덕에 기획2팀은 DNP의 오랜 고객인 에어닉스를 시작으로 신성전자와 새로운 가전 분야 파트너들에게 크게 주목받고 있다. 회사의 핵심이던 김다미의 1팀이 위협을 느낄 만큼.
“아 네.”
“대본 준비는 잘 되고 있지?”
“걱정 마세요.”
녀석이 집중하던 화면을 내게 돌려놓는다.
“제가 직접 챙기고 있으니까.”
“고맙다.”
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필동의 작은 사무실, 일주일간 수습 기간 동안 눈치만 보던 녀석은 어느새 DNP를 이끄는 당당한 리더로 성장했다.
“이번 일 끝나면 밥 한번 제대로 쏠게.”
“약속하신 겁니다?”
녀석이 못을 박는다.
“그래.”
이로써 대본까지 준비가 끝났다.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납기일 안에 광고주가 원하는 영상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저…… 박준 씨가.]
전화기 너머 황아람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이번 광고 못 하시겠다고.]
“네?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목을 잡는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일정도 비고 DNP 덕분에 칸까지 갔는데 대체 왜 못하겠다고 하시는 건지…….]
박준, 그는 이번 광고에 꼭 필요한 존재다. 특히나 깊은 내면 연기가 필요한 첫 번째 광고, 할아버지와 손자 편은 오직 그를 염두에 두고 만든 기획이다.
깊은 눈빛 연기, 세월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얼굴.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중년 배우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떤 얼굴도 이번 광고와 맞지 않는다.
“제가 한번 만나볼 수 있나요?”
[네. 계시는 곳은 아는데…….]
황아람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만나실지는 모르겠네요.]
* * *
“네.”
전화를 받은 박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전화기 너머에선 황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찾아가실 거예요.]
“아.”
전화를 끊었다. 안덕모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칸 광고 이후 박준은 한 번도 황아람의 부탁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준비한 작품들은 그의 검토가 필요 없을 만큼 좋은 것들이었고 덕분에 그는 늦은 연기욕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대중들은 그를 점점 알아보기 시작했다. 올 하반기엔 굵직한 드라마 조연 자리도 잡혔다. 수입이 생기니 불규칙하던 거처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러던 차에 회사로부터 광고 출연을 제안받았다. 하지만 누가 만드는 광고인지 확인한 순간 박준은 처음으로 회사의 제안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칸에서의 아들과의 만남, 그건 마음 한구석에 돌덩이처럼 자리 잡은 그의 오랜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능력 없던 배우 지망생에게 버림받은 어린 자식, 그가 성인이 되어 한 회사의 대표가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났으니.
뉴스를 통해 아들의 소식을 계속 접했다. 그건 박준의 가슴을 계속 후벼 파는 것이었다.
우습지만 박준은 안덕모가 실패하길 바랐다. 그래서 뉴스에 언론에 사람들의 입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건 헛된 바람이었다.
중원 사태를 거치며 안덕모는 칸에서 대상을 받을 때보다 훨씬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런 그가 다시 자신을 부른다. 죄 많은 아비에게 자신이 만든 무대에서 연기를 펼쳐달라고.
띠릭.
작은 오피스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아.”
집을 나서던 박준의 발걸음이 우뚝 굳는다.
“오랜만이네요.”
그의 앞엔 안덕모가 있었다. 박준은 자꾸만 내리깔리는 시선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유를 듣고 싶었습니다.”
근처의 카페, 마주 앉은 안덕모의 입에선 무척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메리트가 없는 광고여서 그러시는 건 아닌 거 같아서요.”
“…….”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박준은 그저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묵을 지켰다.
“이번 광고, 아버지 역은 오직 박준 씨를 고려해 만들었습니다. 다른 배우를 그 자리에 넣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더군요.”
“그렇군요.”
마침내 그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흠.”
안덕모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개런티인가요? 원하는 대로 맞춰드리겠습니다.”
“…….”
“상대 배역에 문제가 있나요? 그것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
거듭되는 질문, 반복되는 침묵.
“그럼 저 때문이군요.”
박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평생을 연기해 온 연기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어떤 연기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박준의 얼굴은 진실을 고백하는 자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저와의 관계는 칸에서 정리된 걸로 아는데…….”
씁쓸한 목소리와 함께 식어버린 커피로 목을 축이는 안덕모.
“네. 원망했습니다. 어머니가 불쌍했고 떠난 당신이 너무 미웠죠. 아마 박준 씨도 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버린 가족들 생각이 났겠죠. 되돌릴 수 없는 과거, 잊을만하니까 다시 나타난 가족 때문에 더 불편하셨을 겁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그가 박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서 그게 뭐요.”
“네?”
“박준 씨는 가족 대신 연기를 선택했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그들끼리 잘살아가고 있어요. 어머니도 저도 제 동생도요.”
대답하지 못했지만 박준을 알고 있었다. 안덕모의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씀드렸듯 당신은 제 가족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한 가족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 해묵은 감정 따위 그만 털어버리세요. 저희는 이미 그렇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박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저는 이 일을 사랑하는 카피라이터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제 작품에 가장 우선 고려되는 배우, 일종의 페르소나죠.”
안덕모의 이야기에서 어떤 감정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래서였을까? 박준의 머리에 가득했던 죄책감, 가슴속에 오랜 시간 박혀 있던 날카로운 가시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번 작품,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제안, 박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