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46화
146. 세계화 추진 TF(5)
삼 일 후, 조이스 콕 한국지사의 회의실.
“진짜 왔네?”
“그러게. 삼 일 만에 새 광고를…….”
“무슨 광고를 찍어내나? 광고 공장이야?”
“쉬잇. 들린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조금 즐기고 있다. 기대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세계화 추진 TF는 제임스의 요구대로 새 광고를 준비해 왔다. 고작 삼 일 만에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삼 일이라는 시간, 기획 회의를 하고 아이디어를 정리하다 보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 만큼 짧은 시간.
하지만 내겐 충분한 시간이었다. 준비는 되어 있었으니까.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데 하루, 기획안을 구성하는 데 반나절, 그리고 콘티를 제작하는 데 하루.
그리하여 세 번째 날 오후, 완성된 기획안을 들고 조이스 콕을 찾을 수 있었다.
“자. 그럼 조이스 콕을 위한 DNP의 새로운 광고를 소개 드리겠습니다.”
선언이 끝나자 화면에 준비된 발표자료가 떠오른다.
할머니, 엄마, 그리고 손녀가 화면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이미지 컷.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유대는 보통 남성보다 여성에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깊은 유대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둘도 없는 친구 같은 모녀가 되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심한 갈등 관계가 되기도 하죠.”
사람들의 집중도가 수직 상승한다.
“이번 광고는 특별한 유대관계가 부정적으로 나타난 모녀의 메모리즈,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화면이 바뀐다. 시작된 콘티에 시선이 집중된다. 난 집중을 흩뜨리지 않도록 화면에서 한걸음 비켜섰다.
* * *
화면에 한 여자의 일상이 그려진다. 아침에 가장 빨리 일어나 남편을 깨우고 그사이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이 식사를 시작하면 아이를 깨우고 옷을 챙기고.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 속 여자의 아침은 전쟁과 같다. 가족들을 챙기느라 정작 자신은 빵 한 조각 입에 넣을 여유조차 없는.
남편과 아이가 집을 나가고 조용해진 집, 지친 여자가 소파 위로 무너진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른 결혼에 반대가 심했죠. 저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던 분이었으니까.]
그건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 소파 위 지친 표정이 여자의 얼굴이 줌인된다. 화면에 가득 찰 만큼 커진 여자의 얼굴, 동그랗던 얼굴이 갸름하게 변한다. 처진 눈매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하얗던 눈 밑에 주근깨가 생겨나고 긴 갈색 머리는 짧은 흑발로 변한다.
그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 어려진 여자의 얼굴을 중심으로 화면이 멀어진다. 그녀는 테이블 옆에 서 있다. 그리고 테이블엔 그녀의 어머니가 앉아 있다. 불안한 눈빛으로 엄마를 바라보는 여자, 어머니가 살펴보던 서류를 내려놓는다.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는 거냐?”
“아뇨.”
그녀가 무겁게 고개를 젓는다.
“너 살이 3킬로나 쪘어. 요즘 군것질하니?”
“아니에요.”
어머니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어머니는 혹독하게 무용을 가르치셨어요.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자신은 뭔가를 이루지 못하고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특별할 것 없이 살았으니까.]
단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학교에서 무용을 연습하는 여자. 멋진 동작으로 춤을 추던 그녀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쓰러진다. 어머니는 그저 엄한 얼굴로 그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처음엔 무용이 좋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고 숨이 막히더군요.]
그녀의 방. 문이 거칠게 열린다. 놀란 그녀가 뭔가를 등 뒤에 숨긴다. 어머니가 손을 뻗고 등 뒤에 숨긴 것을 빼앗는다. 병에 든 콜라, 조이스 콕의 라벨이 새겨진 병이었다.
엄마의 등장에 놀란 그녀가 당화하고 분노한 엄마는 호통을 터트린다. 들어 올린 손으로 얼굴을 감싼 그녀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간다.
[좋아해도 따라갈 수 있을까 싶은 걸 강압적으로 해야 했으니까…….]
여자는 대학생이 되었다. 집안엔 진열장에 생겼고 트로피 하나가 위에 놓였다.
화면이 빠르게 전환된다. 대회에서 공연을 하고, 시상대에 오르고,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밤새워 연습하고. 그럴 때마다 진열장엔 트로피와 상장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났어요.]
화면에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마치 운명처럼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전환되던 화면이 멈춘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어요. 두 번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바뀐 화면엔 한 남자와 배가 부른 여자가 서 있다. 격앙된 엄마가 소리를 지르고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벗어난다. 진열장을 빼곡히 채운 그녀의 성과들만이 공허한 화면을 채운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절 용서할 수 없었을 테고, 저도 그랬으니까.]
다시 돌아온 현실, 여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개는 주부로서의 그녀의 일상이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행복해요. 선택은 제가 했으니까.]
바쁘게 손을 놀리는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저녁이 되고 돌아온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식사가 끝나고 남편과 커피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딩동.
현관 앞에 선 손님이 초인종을 누른다.
철컥.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주인공이 열린 문밖으로 방문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경악으로 커지는 두 눈.
“엄마?”
현관문이 열린다. 이제는 노인이 된 여자의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선다. 놀란 남편이 달려와 깊이 허리를 숙이고 낯선 이를 경계하는 아들이 엄마의 뒤에 몸을 숨긴다.
“너무 늦었구나.”
현관은 넘어왔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떼지는 못하는 어머니.
“아직도 이거 좋아하니?”
그녀가 캔 하나를 내민다. 조이스 콕, 어릴 적 그녀가 몰래 마시다가 빼앗겼던 그것. 멍한 표정의 여자가 그것을 건네받고.
“네. 좋아해요.”
그녀가 미소를 그려 보인다. 남편이 다가가 장모를 모시고 그렇게 화면이 멀어진다. 다시 만난 가족이 보이는 창문, 여자의 집이 보이고 멀어지는 화면 속 밤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화면에 잡힌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헤드카피.
[갈등을 넘어, 세대를 넘어. 함께하는 즐거움. 조이스 콕.]
[조이스 콕, TV CF 50초. END]
* * *
조이스 콕 한국지사의 마케팅팀 차장인 하동식. 거의 20년 가까이 조이스 콕에서 마케팅 담당을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글로벌 광고는 완성된 광고를 통째로 넘겨받았다. 한국지사는 그걸 받아 외주사를 통해 간단한 번역 작업을 하고 방송국을 통해 편성하면 끝.
물론 글로벌 광고는 많지 않았다. 서구권의 방식과 한국의 방식이 다르기에 그쪽은 그쪽대로 이쪽은 이쪽대로 광고를 만든다.
그래서 지난 수십 년간 조이스 콕은 다른 청량음료들처럼 모델의 힘에 기댄 광고를 주로 제작해왔다.
최근 뜸했던 글로벌 광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게다가 제작사가 한국 제작사인 DNP였다. 칸 라이언즈 대상을 수상한 회사,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회사이자 만들어낸 광고마다 엄청난 대성공을 일궈낸 회사.
그래서 하동식과 한국지사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결정에 놀라면서도 수긍할 수 있었다.
한국지사를 패스한 채 미국 본사와 DNP 간의 조율이 이루어졌고 덕분에 하동식은 처음으로 글로벌 광고가 제작되는 일련의 과정을 라이브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DNP에서 두 번째로 준비한 광고 콘티를 모두 보았을 때 그는 생각했다.
‘게임 끝났다.’
삼 일 전 보여준 안덕모의 광고도 대단했지만 이번 광고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광고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메모리즈’를 너무도 잘 살려낸 광고 기획이었다.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딸을 통해 실현하려 했던 엄마.
그런 엄마와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 자신의 삶을 선택한 딸.
의절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그 만남에서 조이스 콕은 용서와 화해의 제스처를 온전히 담아낸 것이었다.
메시지를 중시하는 서구권에서도 충분히 먹힐 만한 스토리였다. 영상으로 제작되어 나간다면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용서와 화해, 가족 간의 단절을 해소해준 장치로서의 조이스 콕.
글로벌 어디 내놓더라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스토리였다. 그 안에 제품을 적절하게 녹여내 거부감 없이 원하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매년 광고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광고를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넌 어떠냐?”
그래서 하동식은 팀장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민 없이 대답했다.
“정말 좋은데요?”
“그렇지? 내 생각도 그래.”
팀 책임 격인 자신의 평가는 합격, 팀장의 평가도 합격이었다.
하지만 하동식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한 눈빛으로 본사에서 날아온 임원,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제임스 맥닐을 살폈다.
“음…….”
그의 입에서 의미 모를 탄식이 흘러나왔다.
‘설마 이번에도 노를 하겠어?’
하동식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젝입니다.”
제임스가 평가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평가였다.
미국 본사와 오랜 시간 커뮤니케이션을 해왔지만 어떤 본사 직원도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들어본 적 없다.
좋지만 아쉽다. 상반되는 두 표현을 어찌 한 문장에 붙인단 말인가.
그래서 회의실은 다시 한번 혼란에 쌓였다.
“가족 간의 화해, 그 키 팩터로서의 조이스 콕, 스토리텔링은 훌륭합니다만 첫 번째 광고와 마찬가지로 진부한 느낌이군요.”
단상을 지키던 안덕모, 그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진다.
“아쉽지만 이걸로 광고를 제작하기는 어렵습니다. 미스터 안.”
제임스의 입에서 올바른 호칭이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서였을까? 의외로 안덕모의 대답은 순순했다.
“이제 다시 선택의 순간이네요.”
제임스가 안덕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 번째 도전을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물러서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미스터 안이 세 번째 도전을 해줬으면 해요. 결과물 없이 돌아가는 건 저도 싫으니까.”
하동식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천하의 안덕모가 두 번이나 광고 기획을 거부당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기획을 요구하고 있다. 준비한 기획에 대한 수정이 아닌 완벽한 재제작.
하동식의 머릿속에 ‘갑질’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야. 위험한 거 아냐?”
팀장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 하동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 자동차도 저런 식으로 굴다가 박살 났는데…….”
불공정 광고 입찰에 안덕모를 끼워 넣고 써먹으려 했던 것이 중원과 안덕모 간의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개미와 코끼리의 싸움에서 안덕모는 몇 번이나 짓밟혔지만 결국 중원과 그의 협력자들에게 거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다. 이제 그 상대가 조이스 콕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무래도 보고해야겠지?”
미국 임원은 그런 사정을 모른다. DNP가 갑질에 순순히 당해줄 상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
그때였다.
“하죠, 세 번째 도전.”
목소리에 웅성이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하동식은 멍하니 긴장감을 조성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안덕모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의 끝에는 손가락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이틀입니다.”
“……이틀? 내일모레?”
하동식은 자기 귀가 이상한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