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44화
144. 세계화 추진 TF(3)
한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중견 기업의 대표.
대기업 하나를 나락으로 보낸 문제적 인물.
설립 2년도 안 되어 국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로 회사를 성장시킨 전설적 리더.
안덕모를 수식하는 그 문장들은 카피라이터로서의 활동에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지금 상황이 그렇다.
저들은 광고주이면서 기획안을 보여주러 온 날 어려워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정상적인 기획안을 발표도 솔직한 평가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난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빠지겠노라 선포했다.
“아…… 아닙니다.”
강경한 반응에 술렁이는 회의실.
“쓸데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럼 준비하신 기획을 보여주시겠습니까?”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 바뀌기 시작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표 위치로 이동하는 동안 김다미가 노트북을 통해 화면을 조절했다.
“참고로 전 DNP의 대표가 아닙니다. TF팀 직원이자 조이스 콕 광고 담당 카피라이터니 기탄없는 평가 부탁드립니다.”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소탈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광고주들 중 몇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신호로 발표를 시작했다.
* * *
“메모리즈…… 기억 또는 추억으로 해석되는 그 단어가 광고의 키워드입니다.”
화면의 중앙에 메모리즈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것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단어들이 추가로 등장한다.
“연인, 친구, 동료, 가족 그리고 반려동물…….”
단어들이 메모리즈와 연결된다. 연결은 잠시, 나타났던 단어들이 사라지고 가족이라는 단어만이 남는다.
“우린 추억이라는 키워드에 적합한 수많은 소재를 검토했고 하나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가족, 세대와 세대로 이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
화면에 사진 몇 장이 등장한다. 오래전 촬영된 흑백사진부터 20년 단위로 촬영된 다섯 장의 사진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찍은 사진 속 인물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조이스 콕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음료입니다. 가족 구성원 중 나이 많은 이부터 어린이까지 모두가 경험해 볼 수 있는 제품이라는 뜻이죠.”
사진 속 등장인물들 모두 조이스 콕을 손에 쥐고 있다. 흑백사진 속 인부들은 병으로 된 예전 제품을 최근에 찍힌 사진 속 인물들은 캔을 들고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 약 60년의 세대 차를 가진 두 사람을 통해 메모리즈라는 키워드를 부각해 보았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콘티가 나타났다. 화면 아래 장면을 설명하는 자막이 떠올랐고 난 모두가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화면 밖으로 물러섰다.
“그럼 조이스 콕 광고 콘티를 감상하겠습니다.”
화면이 밝혀진다. 밝혀진 화면에 평범한 주택 하나가 등장한다.
주택의 2층엔 삼각형 지붕, 적당한 크기의 정원 위로 세월을 상징하는 큰 나무가 두 그루 보이는 집이다.
화면이 천천히 내려오자 집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집을 가린 낮은 담, 그리고 담벼락 아래 주차된 몇 대의 차.
화면은 주인공의 시선이다. 일인칭 시선이 출입문에 가까워지고 대문이 열린다.
아담한 정원이 눈에 들어오고 정원 위에 세워놓은 테이블과 정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테이블을 채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화면을 바라보는 중년이 된 딸의 목소리, 화면 너머 주인공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잠깐 산책.”
“이리 앉으세요.”
딸이 주인공을 잡아 이끈다. 주인공이 준비된 자리에 앉는다.
테이블 위 불붙은 초가 장식된 케이크가 보이고 그 너머 가족들이 미소를 짓는다.
“자, 다 같이.”
그들이 입을 모아 외친다.
“하나, 둘, 셋.”
후우.
바람에 촛불이 꺼진다. 한 방에 끄긴 너무 많은 초. 좌우로 두 번이나 더 불었고 자욱한 연기 너머 박수와 축하가 들려온다.
“아버지! 축하해요.”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주인공이 가족들을 바라보고 화면이 바뀐다.
“으흠.”
생일 파티는 끝났다. 주인공이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2층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삼각형 지붕 아래 작은 다락방, 구석진 곳에 열 살쯤 되는 손자가 눈에 들어온다.
다다닥.
정신은 온통 게임기뿐. 다가가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아이는 눈치채지 못한다.
다다닥.
바쁘게 손을 놀리는 손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주인공이 아이를 부른다.
“얘야.”
“…….”
돌아오지 않는 대답.
“얘야?”
“아. 할아버지.”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재미있니?”
아이가 슥슥 뒤통수를 긁었다.
“네. 뭐.”
주인공이 손자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아이의 옆에 앉는다.
“할애비한테도 가르쳐 주지 않으련?”
“네?”
아이가 당황한다.
“우리 손자가 뭘 하고 노는지 알고 싶어서.”
“할아버지는 못 해요.”
움직이던 앵글이 정지한다.
“어려워요. 기술도 알아야 하고 커맨드도 외워야 하고. 할아버지는 못 해요.”
말을 마친 녀석이 자리를 뜬다. 화면은 그런 손자의 뒷모습을 좇는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손자가 사라지고 녀석이 사라진 곳에 서 있는 거울이 보인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
흔한 70대의 모습이다. 거울을 바라보던 주인공이 눈을 감는다.
다락방의 모습이 변했다. 구조는 똑같지만 안을 채운 물건들의 모습이 다르다.
부서진 가구는 멀쩡해졌다. 거울은 세월의 흔적 없이 깨끗하다. 그리고 거기 비친 주인공은 10대 소년의 모습. 시선이 이동하고 화면에 책 하나가 보인다. 그림과 말풍선이 가득한 책, 만화책이다.
“우리 손자 뭐 하나?”
노인이 계단으로 올라온다. 만화책을 뒤로 감춘 주인공이 시치미를 뗀다.
“그냥 있어요.”
“그래? 나랑 말동무 좀 해줄래? 적적하구나.”
“아…….”
주인공의 시선이 조금 흔들린다.
“저 나가봐야 해요.”
몸을 일으켜 걸어가는 주인공. 다락방 끝에서 계단을 내려간다. 다락방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노인의 모습이 잡힌다.
“그래…….”
노인의 표정이 쓰다. 멈췄던 화면이 움직이고 다락방의 모습은 노인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다.
시야가 흐려지고 다시 현재.
“이런 거 마시지 말라고 했지?”
1층 거실, 주인공의 손자는 엄마에게 혼나는 중.
“살찌고 충치 생긴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주인공의 딸이 아이의 손에서 콜라 캔을 빼앗는다. 그녀가 싱크대에 남은 콜라를 부어버린다.
“한 번만 더 들켜봐. 게임기 압수니까.”
경고를 마치고 사라지는 엄마, 소년의 두 입술이 비죽 튀어나온다.
주인공의 시선이 딸이 사라진 곳을 살핀다. 창문 너머 정원에 그녀가 자리를 잡고 형제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동하는 화면, 냉장고가 보이고 나타난 손이 문을 연다. 냉장고 깊숙이 숨겨진 콜라, 조이스 콕의 로고가 보이는 캔 두 개를 꺼내 든다.
주인공이 아이에게 향한다. 여전히 튀어나온 입술을 한 채 씩씩대는 그.
“이거 마실래?”
“네?”
눈앞의 콜라에 아이가 놀란다.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있는 곳을 살핀다.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할애비가 주는 건데.”
아이가 재빨리 손을 뻗는다. 아이의 손이 캔에 닿을 찰나 주인공이 중얼거린다.
“대신 게임 할아버지에게 알려주는 거다?”
손이 멈춘다. 고민하던 손은 이내 캔을 잡는다.
“그래요.”
바뀐 화면은 아까의 다락방.
“그거예요! 잘하시네요, 할아버지.”
“그래?”
화면에 게임기가 잡힌다. 플레이가 이어지는 동안 손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거기서 공격!”
“이렇게?”
“그렇죠!”
[PLAYER WIN!]
승리 메시지가 떠오르고.
“나이스!”
“하하.”
시선이 게임기를 벗어난다. 다시 보이는 거울. 거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가운데 위치한 두 개의 파란 캔.
조이스 콕의 모습이 확대된다. 가깝게 붙어있는 두 개의 캔 위로 떠오르는 헤드카피.
[시대를 넘어, 세대를 넘어. 함께하는 즐거움. 조이스 콕.]
[조이스 콕, TV CF 55초. END]
* * *
기획안 발표가 끝났다.
“이상.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안덕모가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섣불리 반응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김다미는 띄워둔 화면을 꺼야 하나 그대로 둬야 하나 고민했다.
시작은 삐걱거렸다. 상대가 안덕모의 등장에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선배는 냉철하게 선을 그었다. 덕분에 광고주는 광고주 다뤄졌지만 분위기까지 좋아지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발표회는 딱딱했고 안덕모가 발표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시선은 냉랭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열과 성을 다 들여 만들어온 콘티, 이미래 팀장에게 밥까지 사가며 만든 DNP의 자료, 수많은 콘티를 봐온 그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성도의 높은 콘티였다.
그리고 그것이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와…….”
누군가의 무방비한 탄성처럼, 모두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는 중.
김다미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이미래가 까만 다크서클을 한 채 완성된 콘티를 보여주었을 때 그녀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생생한 이미지를 보는 느낌. 1분의 광고를 통해 완성된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
너무 좋은 스토리를 멋진 콘티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날 세계화 추진 TF에서 가볍게 시작된 김다미의 아이디어는 안덕모의 손을 가볍게 거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아이디어는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야기로 변해 있었다.
“으흠.”
시간이 지나도 들리지 않는 반응에 안덕모가 헛기침을 했다. 그때까지 화면에 붙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제자리로 찾아 돌아갔다.
“그럼 평가를 해보도록 할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이스 콕의 직원이 발표회를 수습할 때였다.
짝짝.
두 번의 박수 소리,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거긴 미국 본사에서 온 마케팅 임원 제임스 맥닐이 있었다.
“기대만큼 훌륭합니다. 미스터 덕.”
‘Mr. Duck?’
김다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사람 덕모 안이라는 이름에서 ‘덕’이 성이라 착각한 게 분명하다. 뭐, 누군지 모를 걱정은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지만.
“세대 간의 연결, 가족의 역사를 관통하는 메모리즈. 정말 멋진 스토리텔링이네요.”
중요인사의 호평. 평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각자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하지만 결과는 리젝(Reject)입니다. 스토리라인은 감동적이지만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했고 또 눈길을 확 잡아끄는 임팩트도 아쉬워요. 한마디로 조금 진부하군요.”
“진부……?”
“임팩트가 부족하다고?”
뜻밖의 평가에 놀란 건 김다미만이 아니었다. 한국 조이스 콕 직원들도 마찬가지. 그들의 생각은 수군거림으로 변해 들려왔다.
“미스터 덕. 다음번엔 더 신선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나요?”
김다미가 불안한 눈으로 안덕모를 바라본다. 제임스의 평가는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안덕모가 들어본 적 없던 혹평이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신선한 광고를 다시 준비해 보죠.”
“제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제임스가 히죽 웃는다.
“삼 일은 주실 수 있으시죠?”
안덕모의 얼굴이 같은 미소를 그린다.
“삼 일이라……. 진심인가요?”
“물론이죠.”
경악으로 가득한 회의실. 오직 제임스와 안덕모만이 이질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