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43화 (143/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43화

143. 세계화 추진 TF(2)

“딱 일 년이야. 임시 대표 자리 딱 일 년 후에 내던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차혜민은 결국 대표직을 수락했다. 일 년이라는 조건부를 달고서.

결정이 되었으니 조치를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차혜민은 본사인 DNP로 자리를 옮겼고 애드온엔 대표의 간헐적 공백을 채워줄 인사 조치가 단행되었다.

DNP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표 변경 절차가 진행되었고 변경 사항이 정식 공표되었다.

논란이 많았던 공정위의 제재에 책임을 지기 위해 대표를 내려놓은 조치에 대해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뒤따랐다.

길고 힘들었던 전쟁의 결과 잘잘못이 수면 위로 드러났고 그 과정에 DNP는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난 온전히 광고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괜찮아요? 너무 답답한 거 같은데?”

정리가 끝나고 업무 공간을 찾은 김다미,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답답하기는, 난 마음에 드는데?”

“참…….”

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너무 소박해도 문제예요. 이 모습을 보고 누가 DNP 최대 주주라고 생각하겠냐구요.”

녀석의 날카로운 지적, 그저 피식 웃어버렸다.

대표의 집무실이 있던 18층이 아닌 19층. 샘플 따위를 쌓아 놓던 작은 창고를 개조해 개인 사무실로 만들었다.

업무용 책상 하나와 작은 책장 정확히 네 명만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고작인 나만의 개인 업무 공간이었다.

개인 업무 공간은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전직 대표와 한 테이블에서 앉아 일하고 싶은 직원은 없을 테니까.

덕분에 얻은 공간이지만 난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물론 대표가 쓰던 이전 공간과 비교할 수 없다.

이전 집무실처럼 크지도 않거니와 언제든 서울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면 통유리 대신 자리에서 일어서 뒤돌아서야 겨우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 고작.

하지만 밤, 낮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자, 선물.”

녀석이 책상 위에 올려둘 작은 화분 하나를 내민다.

“죽이지 말고 잘 가꿔요. 이게 나다 생각하시고.”

아기자기 예쁜 도자기 화분, 흙에 꽂아 놓은 작은 이름표엔 빨간색 하트 하나가 눈에 띈다.

“네. 분부대로 하지요.”

난 책상 위 노트북 옆,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김다미를 바라보았다.

“자 김다미 팀장님. 이제 세계화 추진 TF 첫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아. 팀 이름 정말…….”

대표를 내려놓은 내겐 새로운 조직과 직함이 필요했다.

결정은 내 몫이었고 그래서 난 ‘세계화 추진 TF’의 팀장이 되었다. 원할 때 필요한 직원을 협조해 쓸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는 덤이고.

“구려요.”

물론 새 팀 이름에 대해 대부분은 저런 평가지만 상관없다.

“10분 후에 시작할 거니까 준비해서 올라오세요.”

“네네.”

녀석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 방을 빠져나간다.

문이 닫히며 만들어낸 공기의 진동에 녀석이 두고 간 화분에 피어난 작은 꽃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 * *

조이스 콕은 미국의 콜라 제조사다. 산업 성장기 눈부신 발전을 이룬 업체이자 단일 음료 부문에서 한 번도 최고의 타이틀을 놓쳐본 적 없는 스테디셀러.

하지만 오늘날 콜라의 위상은 과거와 다르다.

콜라가 냉전 시대 자유의 상징으로 인식되던 세월은 지나가 버렸다. 콜라를 대신할 수많은 대체 음료가 등장했고 건강을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되며 전처럼 콜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많이 사라졌다.

조이스 콕을 비롯한 세계적 콜라 회사들 역시 대세에 편승해 다양한 음료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왔다.

제품군을 다각화해 회사 매출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의 근간이자 대표 상표인 조이스 콕 매출은 해마다 감소를 겪었다.

매출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은 매년 천문학적인 마케팅 비용을 집행했다. 스포츠 경기를 후원하고 대대적 홍보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센세이션한 광고를 내보내고.

하지만 꺾인 추세는 회복되지 않았다.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은 무색해졌다. 그런 이유로 이번 광고를 통해 조이스 콕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명확했다.

“메모리즈라…….”

추억 또는 기억, 조이스 콕은 과거를 떠오르게 만드는 메시지를 통해 반전을 노렸고 카드로서 DNP가 선택되었다.

“쉬우면서 어려운 주제네요. 메모리즈라.”

김다미의 평가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추억…… 기억.”

아이디어로 넘쳐나던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다. 부담감 때문이다. 조이스 콕 같은 대형 광고주를 만나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

“후우…….”

그건 카피라이터인 김다미도 마찬가지.

“일단은.”

열어놓은 노트북을 닫았다. 필기를 위해 열어놓은 노트와 펜도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앉은 자세를 편하게 하며 중얼거렸다.

“편하게 접근해 보자. 쥐어짜 봐야 좋은 아이디어 안 나오니까.”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날 따라 자세를 푼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생각해야 하는데 자꾸만 잡념만 떠오른다.

결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본사 마케팅 임원과 미팅을 했지만 거대한 세 개의 허들 중 이제 첫 번째에 도전할 뿐이다. 독특한 조이스 콕의 원칙은 이번 광고의 난이도를 수직으로 끌어올린다.

1893년 3월 3일. 3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조이스 콕의 창립 기념일 덕분일까.

제품 로고에 삼각형을 적용했고, 모든 마케팅엔 3을 암시하는 상징이 빠지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글로벌 2위라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만.

그들의 고집스러운 숫자 3에 대한 집념은 광고 제안에도 적용된다.

‘기회는 단 세 번.’

야구의 쓰리아웃처럼 최종 광고 방영까지 기획사에 허용되는 도전은 단 세 번.

리젝이 세 번 반복되면 해당 기획사는 아주 오랜 기간 조이스 콕과 일할 수 없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극악의 미션이자, 제안을 받아도 거부하는 기획사가 나온다고 알려진 그들만의 고집스러운 원칙이었다.

부담감을 강요하는 광고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난 머리를 휘저어 그것을 날려버렸다.

“다미는 콜라 많이 마셔봤어?”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콜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려울 때 몇 번 먹어봤죠. 아, 생각해 보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소화 안 된다고 가끔 찾던 게 기억나요. 그때 옆에서 가끔 얻어먹었죠. 근데 머리 크고 나서는 그닥이었네요. 부모님이 콜라 같은 거 못 먹게도 하셨고.”

녀석이 피식 웃는다.

“제 생각하신 거죠. 탄산음료 딱히 좋을 게 없잖아요.”

자기 기억을 중얼거린 녀석이 날 바라본다.

“선배님은요?”

“나도 별로…….”

떠오르는 오래전의 기억,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콜라, 나한테는 사치품이었으니까.”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가족의 삶이란 뻔하다.

내 어릴 적도 마찬가지다. 궁핍과 결여가 일상이 된 삶. 그리고 내 옆엔 철없는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머니도 옆에 없었다.

이모와 이모부의 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으니 콜라는 욕심내기 어려운 사치품이라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바보 같았지. 말했으면 사주셨을 거야. 콜라가 비싸 봐야 얼마나 한다고. 근데 말을 못 한 거지.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거니까.”

선명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초등학교가 끝나고 늦게까지 뛰어놀던 운동장, 수도꼭지에 입을 붙이고 갈증을 채우고 있는데 빨간색 콜라 캔을 들고 걸어가던 친구.

“그게 얼마나 부럽던지. 그걸 맛볼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어.”

결국 어린 덕모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준비물 살 돈을 들고 슈퍼로 향했다. 철없는 덕모는 결국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다.

“영혼을 팔 만큼 맛있던가요?”

“아니.”

난 고개를 저었다.

첫 콜라의 맛, 광고처럼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리던 콜라 캔 속 검은 액체.

그걸 마시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온몸이 둥실 떠오르는 놀라운 경험 따윈 없었다. 그 검은 물맛은 기대 이하였다.

“탄산에 목구멍도 따갑고, 이상하게 쓰더라. 아마 그런 류 단맛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비행을 저질러가며 손에 넣은 콜라, 어린 덕모는 그것을 다 마실 수도 없었다. 반도 못 마시고 버렸고 그제야 뒤늦은 죄책감이 찾아왔다.

그날 밤 이모에게 사실을 고했다. 화를 낼 거라 생각한 이모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내어주셨다.

“씁쓸한 기억이네요.”

“그런가?”

난 손가락으로 볼을 슥슥 긁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녀석이 고개를 든다.

“선배 얘기처럼 가족 얘기로 풀어보면 어때요?”

“가족?”

“네. 조이스 콕이 원하는 게 메모리즈잖아요. 저도 선배도 콜라에 대한 기억이 있어요. 그런 기억을 가족과 연결해서 스토리를 잡아보면 어때요?”

김다미의 제안은 도화선에 붙은 불꽃이었다. 아이디어를 막아버린 거대한 장애물, 불꽃은 도화선을 따라 타들어 가 장애물로 이어졌다.

꽈앙.

폭발이 일어나고 아이디어를 막던 장애물은 산산 조각났다.

그리하여 다시 열린 생각의 길, 아이디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노트북을 열었다. 두 손을 자판에 얹고 기록을 시작한 건 본능적인 것이었다.

“좋아, 계속 말해봐.”

그렇게 세계화 추진 TF의 아이디어 회의는 그날 늦게까지 이어졌다.

며칠 후.

나와 김다미는 조이스 콕 한국지사 사옥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직원이 안내를 해주었다. 그렇게 이어진 곳에 회의실이 있었다.

열린 회의실 문, 그 안에 힘든 허들이 될 광고주들과 제임스 맥닐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후우…….”

김다미가 긴 한숨으로 긴장을 날려 보낸다.

“잘 될까요?”

“글쎄다.”

한 손을 녀석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익숙하게 쓸어내렸다.

“확실한 건 긴장하면 잘 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거지.”

“그러네요.”

그제야 김다미의 한숨이 조금 잦아든다.

“가볼까?”

“그래요.”

우린 그렇게 열린 회의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긴장은 이쪽이 해야 하지만 상황이 묘하다. 이쪽은 두 명 저쪽은 열 명이 넘는데 더 딱딱한 건 저쪽의 얼굴들이다.

“이거…… 대표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나라는 존재가 긴장의 이유인 모양.

“미리 알았다면 저희 쪽도 더 신경을 썼을 텐데.”

첫 번째 기획 발표회를 주관한 조이스 콕 한국지사 직원, 그의 목소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렇다 보니 분위기가 점점 묘해진다.

상황을 모르는 제임스는 연신 나와 지사 직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살필 뿐이고.

“발표는 직원분이 하시겠죠?”

그가 김다미를 가리킨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가 합니다.”

“아…….”

회의실이 한 번 더 혼란스러워진다. 문제의 이유를 알고 이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저 이제 대표 아닙니다. 일개 기획사 직원일 뿐입니다.”

회의실이 정적에 빠져든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객관적인 평가가 안 됩니다. 저희도 제대로 된 발표를 할 수 없어요.”

제임스의 옆에선 통역이 열심히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기획사 눈치 보는 광고주는 없습니다.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빠지겠습니다.”

가중되는 혼란 속 오직 제임스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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