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42화
142. 세계화 추진 TF(1)
또각, 또각.
로비를 걸어가는 차혜민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탁, 탁.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길 역시 다급하다. 하필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
차혜민은 초조한 눈빛으로 떨어지는 숫자를 노려본다.
10, 9, 8…….
점점 가까워지는 엘리베이터, 그건 마치 광고주를 앞에 둔 시사회장에서 영상 카운트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차혜민은 한쪽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침내 DNP가 있는 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미래야!”
“아. 오셨어요?”
차혜민이 다급한 걸음을 옮긴다.
“어떻게 된 일이야?”
“네?”
맥락 없는 질문, 이미래의 표정이 멍해진다.
“세부에서 발표했다며, 안덕모 대표 그만둔다고.”
“아…….”
이미래가 말끝을 흐렸다.
세부에서 돌연한 안덕모의 선언, 차혜민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세부에서의 전진대회는 DNP 직원들만 참석했으니 애드온을 책임지고 있던 그녀가 거기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진대회가 끝나고 일주일간의 전체 휴가, 차혜민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공정위 영업금지 조치가 끝나고 휴가를 끝낸 직원들이 출근한 오늘 아침이었다. 지원본부장 성재호가 차혜민에게 내용을 전달했고 차혜민은 충격에 빠졌다.
지난 기자회견장에서 책임을 다한다고 했을 때 머릿속에 들었던 불길한 우려, 그것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안덕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왜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안덕모가 대표직을 사임한다.]
그건 회사로선 크나큰 악재였다. 동남풍의 의지를 이은 DNP, 그리고 새로이 인수한 애드온과 자인 기획. 모든 회사의 구심점은 안덕모였다.
회사를 향한 공격은 거세고 모질었다.
그가 있었기에 수백의 직원들이 혼란의 순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대표직을 내려놓겠다 선언했다.
차혜민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안덕모는 지쳤을 것이다. 너무 하고 싶어 시작한 광고지만 지난 수년간의 고난에 몸도 마음도 지쳐 버렸을 것이다.
대표를 그만두면 회사를 떠날 거다. 그 와중에 많은 지분을 매각할 수도 있다.
많은 돈이 수중에 들어올 거다. 생계는 그의 행보에 어떤 제약도 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혹은 외국으로 장기 여행?
그가 떠나면 회사는 흔들릴 거다. 구심점 덕에 끈끈했던 회사 간 유대에도 문제가 생긴다. 결정적으로 그가 없는 DNP는 광고주에게 더 이상 매력 있는 회사가 되지 않는다.
매출이 줄어들고 성장이 멈춘다. 탑 3을 바라보던 DNP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회사는 막 위기에서 벗어났다. 공정위의 제재가 끝난 지금 모두가 입을 모아 다시 DNP가 날아오를 거라 예상하고 있다.
그러니 안덕모의 부재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급히 차를 몰아 DNP를 찾은 차혜민이었다.
“덕모 출근 안 했어? 어디 있는지 알아?”
그의 자취방은 회사에서 가깝다. 회사에 없다면 먼저 그곳을 뒤질 거고 다음은 보령을 살펴야 한다.
“출근하셨는데요?”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차혜민은 조금 당황했다.
“출근했어? 어디 있는데?”
“안쪽 회의실요.”
“땡큐.”
발이 알아서 움직였다. 빠른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가로질러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로 다가갔다.
벌컥.
노크도 양해도 구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안덕모!”
그리고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 대체 어떻게…….”
그런데 이상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테이블 안쪽엔 안덕모, 그리고 그 옆엔 김다미가 앉아 있었다. 문제는 맞은편, 차혜민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검은 머리, 한 사람은 금발. 두 남자의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향하는 낯선 얼굴들.
“누…… 누구?”
차혜민이 크게 당황했다. 안덕모가 쓰게 웃었다. 김다미의 입에서 설명이 흘러나왔다.
“Sorry. She’s our vice president, hyemin-Cha, She didn’t know this meeting. (죄송, 부사장인 차혜민입니다. 미팅이 있는지 모르셨어요.)”
유창하게 흘러나오는 영어. 단어들은 차혜민의 귀로 들어왔지만 이해되지 못한 채 다른 귀로 빠져나갔다. 금발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선 건 다음 순간이었다.
“Glad to see you, hyemin-Cha. I’m James McNeill of Joys Cock. (반가워요. 조이스 콕에서 온 제임스 맥닐입니다.)”
그가 손을 내민다. 차혜민은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조이스 콕, 글로벌 마케팅 본부 임원이세요. 미국에서 오신 광고주…….”
김다미의 설명을 들은 차혜민은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았다. 물론 조이스 콕 같은 글로벌 회사 직원이 왜 여기 있는지, 사임한 안덕모가 왜 그들과 미팅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Nice to see you. Sorry to disturb you. (반갑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필사적으로 영업용 미소를 지은 차혜민이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 * *
한 시간여의 미팅, 조이스 콕 임원인 제임스와의 미팅은 성공적이었다.
미팅 성공엔 김다미의 역할이 컸다. 상대는 혹시 모를 의사소통 문제에 대비해 한국지사의 통역을 동행했지만 김다미의 영어 실력은 완벽한 원어민의 그것이었다.
녀석은 제임스와 직접 커뮤니케이션했고 통역이 빠진 덕에 분위기는 빠르게 화기애애해졌다.
미국인들과 일해보고 느낀 거지만, 그들과의 비즈니스에서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무척 중요하다.
묘한 뉘앙스, 그들만이 알고 있는 표현이 통하면 일이 쉬워지고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마음이 닫힌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김다미는 막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의 능력을 가졌고 덕분에 미팅은 원활한 리드로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나 역시 미국에서 일해본 경험으로 중요한 합의를 끌어낸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는 않았다.
덕분에 우린 한국 광고 기획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기회를 잡았다.
“다미 고생 많았어.”
“뭘요. 밥상 차려놓은 건 대표님이셨으면서…… 아.”
녀석이 들어 올린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꽁 쥐어박는다.
“오늘부터 대표님 아니죠?”
“그렇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흠…….”
가만 보니 그 생각을 안 했네?
“그냥 내키는 대로.”
“선배로 할게요.”
“그러든가.”
“선배! 좋다. 와. 얼마 만에 다시 불러보는 거야?”
별걸 다 좋아한다. 녀석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뒤돌아서 대표의 집무실 문을 열었고.
“안덕모…….”
던전 안 똬리를 튼 흑염룡의 눈빛. 딱 그런 눈으로 날 노려보는 차혜민을 발견했다.
“해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험한 꼴 당하고 싶니?”
알 수 있다. 저건 말뿐인 위협이 아니다. 결국 포기하고 집무실 문을 닫았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위협적으로 날 바라보는 차혜민에게 그간의 일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조이스 콕에 집중하려고 대표직을 내려놨다?”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올라온 전투력 때문인지 성질까지 급해진 차혜민이 이야기의 허리를 끊어 놓았다. 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간단했다. 기자들을 모아놓고 성수 기획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할 무렵, 미국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대수롭지 않은 메일이라 생각했지만 내용은 본 순간 난 몇 번이나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글로벌 콜라 시장을 양분한 한 축인 조이스 콕, 그들이 DNP에 광고를 의뢰해 왔던 것. 국내 법인의 의뢰 같은 게 아니었다. 무려 전 세계에 동시 방송될 글로벌 버전의 광고를 의뢰해 왔던 것.
조이스 콕은 칸 라이언즈 광고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오랜 기간 그들과 파트너였던 광고 기획사 대신 DNP와 접촉을 선택했다.
‘칸의 광고처럼 광고를 통해 조이스 콕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미국에 글로벌 본사를 둔 그들이 멀고 먼 한반도의 광고 기획사를 찾은 이유는 수긍이 가는 것이었다.
성수 기획과 전쟁 중에도 신경 써야 할 일이었다. 광고가 결정되면 DNP의 활동 무대는 단숨에 세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대한민국 광고시장, 적대적인 경쟁업체와 불공정을 일삼는 광고주들 사이에서 시달려온 DNP로서는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
그래서 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긴밀하게 조이스 쪽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점점 불리해지는 전황 속에서도 내 정신의 절반은 거기 가 있을 만큼.
마침내 지난주 미국지사 마케팅 임원이 한국에 입국했다. 그리하여 대망의 첫 미팅이 오늘 열렸던 것.
“사임 이유는 또 있어요. 공정위 제재받은 마당에 자리를 지킬 수는 없으니까.”
“흠…….”
대표 안덕모는 제재를 받을 행동을 했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 약속했다.
카피라이터로서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할 글로벌 광고, 그리고 제재를 통해 의무가 된 대표로서의 책임.
그러니 결론은 명확했다. 필리핀 세부에서의 일주일 난 고민해온 바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었고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선포를 했던 것.
“아무튼 회사를 떠나는 일은 없다는 거지?”
“회사요?”
난 멍한 눈으로 차혜민을 응시했다.
“왜 떠나요? 여기 아니면 광고 만들 데도 없어요. 게다가 저 여기 최대주준데.”
“다행이네.”
이글대던 흑염룡의 기운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리하여 다시 온화해진 차혜민의 얼굴.
“그럼 대표는 누가 해? 생각해 놓은 거 있을 거 아냐?”
“그야…….”
껄끄러운 말을 힘겹게 꺼내 놓았다.
“법인 정강에 따라 대표 부재중엔 부대표가 대행…….”
되찾았던 온화함은 단숨에 깨진다.
“나?”
“네.”
턱.
“아야.”
이건 예상 못 했다. 전광석화처럼 내뻗은 차혜민의 손이 한쪽 뺨을 틀어잡아 버린 것.
“착했던 안덕모가 언제 이런 능구렁이가 됐지?”
뺨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은퇴한 사람 사무실에 불러다 앉히고! 강제로 대표 시키고 신입 행세시키더니 이제 뭐?”
“아야!”
“미리 얘기해 줬으면 이렇게 열 받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니…… 대표님도 계속 출장.”
“핸드폰은 폼으로 차고 다녀?”
볼을 잡은 손이 위쪽으로 향한다. 너무 힘찬 나머지 쭈욱 늘어난 볼살이 비명을 내지른다.
“으아…… 찢어져요!”
“에휴.”
긴 한숨과 함께 손을 놓아준다. 난 얼얼한 볼살을 두 손으로 재빨리 가렸다.
“좋아. 근데 마지막으로 하나 묻자. 사임 이유, 그 두 개가 다야?”
역시 차혜민,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 온다.
“아뇨.”
“말해봐. 솔직하게.”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광고 만드는 것만 집중하고 싶어요.”
차혜민이 묵묵히 팔짱을 낀다.
“제가 하고 싶은 게 경영은 아니니까.”
흘러나온 고백.
“……그럴 줄 알았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