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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34화 (134/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34화

134. 언더커버 보스(5)

봄이 찾아왔다. 바뀐 것은 달력 속 숫자일 뿐이지만 약속된 것처럼 추위는 물러갔고 황량했던 흙 위에 새싹이 피어났다.

어느덧 4월. 아침저녁 추위 때문에 걸친 외투가 덥다고 느껴질 즈음.

“꼭 그러고 다녀야 해요?”

영화관 옆자리 김다미가 속삭인다. 난 깊이 눌러쓴 모자를 고쳐 썼다.

“미안한데 어쩔 수가 없어. 나 생각보다 유명인라서.”

“아이고, 네네. 연예인 나셨네요.”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래, 모처럼의 주말 데이트에 사람 많은데 싫다고 한 게 여태 앙금이 남았다 이거지?

마침내 더 게이트가 극장 개봉을 했다. 안주미에게 티켓을 받았다. 무대인사 이벤트가 있는 티켓이었고 이제 막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위해 스크린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홍서희는 빠진 채였다.

날카로웠던 나와의 만남, 무시했던 무명 배우의 매니저가 DNP의 대표임을 알게 되었던 그날 이후 홍서희는 공식적인 활동을 접고 칩거 중이었다.

내가 아는 홍서희라면 칩거가 길지는 않을 거다. 적당한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등장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광고에 얼굴을 비출 일은 없겠지만.

“저기, 진짜 연예인 저기 나오네.”

손을 들었다. 거긴 풀메이크업을 해버려서 내 동생인지 남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안주미가 있었다.

그리고 내 목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오, 나온다.”

“와!”

“장진구, 진짜 겁나 잘생겼어.”

커지는 웅성임 속 무대와 나를 번갈아 보던 김다미가 중얼거린다.

“와…… 진짜 남매 맞아요? 어쩜 오빠랑 동생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지?”

이 자식이?

“안주미! 겁나 이뻐!”

관객석 어느 남자의 돌연한 외침.

“와하하.”

극장에 웃음이 퍼져 나갔다.

* * *

더 게이트의 개봉 성적은 화려했다. 주말인 오늘 개봉 삼 일째 되는 날이지만 연예 매체들은 이미 영화의 성공을 점치고 있었다.

임시 매니저로서 촬영장에 있었지만 블루스크린 위에서 펼치던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는 CG와 만나 멋진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그래! 내가 그랬어. 빌어먹을 세상 싹 다 망해 버리라고 내가 빌었다고!”

도심에 게이트가 열린 이유는 여주인공이 우연히 발견한 미지의 아티팩트 때문이었고.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미안해…… 지수야.”

여주인공의 절친 역을 맡아 보이시한 매력을 뽐내며 위기의 순간 여주인공을 지켰던 극 중 안주미의 죽음.

비장미로 버무려낸 장면은 영화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내 눈시울까지 붉어지게 만들었다.

“가! 빨리 가!”

필사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작은 구멍으로 여주인공과 생존자를 내보낸 장진구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다.

“제발. 제발 살아 있어줘.”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인과의 고리처럼 여주인공의 눈앞에 나타난 아티팩트, 돌로 내려쳐 그것을 부숴 버린 그녀의 작은 소망은 관객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돔이 걷히고 파괴된 도시를 배경으로 살아 있는 남녀 주인공이 거칠게 포옹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가 끝났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다시 밝혀진 화면.

“아…… 아파라.”

“엔지, 엔지. 주미 씨 괜찮아?”

배우들의 엔지 컷이 편집되어 나온다. 부상의 순간, 촬영 중 폭소가 터지는 순간, 땀과 고생이 함께했던 촬영장이 그려지고 마지막 장면.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쓴 채 촬영장을 서성이고 있는 한 사람이 화면에 등장한다.

난 그의 모습에 두 눈을 치켜떴다.

서성이던 남자가 자리를 떴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그를 쫓는다. 인적 없는 구석에서 그가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놓고 눌린 머리를 슥슥 매만진다. 그가 카메라 쪽을 힐끗 돌아보고 화면이 멈춘다.

화면에 줌인되어 확실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

“저거 안덕모 아냐?”

누군가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맞네. 칸에서 대상 받은.”

“뭐야? 저 사람 영화에 나왔었어?”

“아니, 못 봤는데?”

정체불명의 쿠키 영상 위로 자막이 떠오른다.

[스페셜 땡스 투, DNP 애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김다미가 피식 웃는다.

“아무도 몰랐다고 하시더니 대표님만 모르고 계셨나 보네요?”

“하하.”

충격이다. 감독도 스태프도 이미 내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 난 허탈하게 웃으며 모자를 더욱 눌러썼다.

“다행이네요. 자인 기획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서.”

영화가 끝나고 자리한 식당. 파스타 면을 포크로 빙빙 돌리며 김다미가 중얼거린다.

말이 데이트지 이렇게 둘이 있으면 나누는 얘기는 대부분 일에 대한 거다.

“대표님 악명이 높아지긴 했지만요.”

“많이 안 좋은가?”

“뭐, 아직은 그렇죠.”

자인 기획 대량해고 사태, 업계에 널리 퍼진 안덕모의 독한 조치엔 예상치 못한 후폭풍이 뒤따랐다.

자인이고 DNP고 애드온이고 나랑 눈만 마주치면 질겁을 하는 통에 나름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참에 안덕모 대표 이미지 광고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호.”

의외로 흥미로운 제안.

“그래 네가 한번 만들어 봐. 광고비도 쳐줄게.”

“얼마나요?”

“글쎄. 너 하는 거 봐서.”

“에이.”

실망한 녀석이 식사에 집중한다. 난 파스타 면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생각에 잠겼다.

김다미의 말처럼 자인 기획은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다. 어린 이다은을 팀장 자리에 앉히는 건 나름 도박이었지만 좋은 결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어린 카피라이터들이 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린 팀장 덕에 나이가 많은 카피라이터들도 태만할 수 없게 되었다.

대대적인 인력 정리로 슬림해진 조직이라 일 처리는 빨라졌다. 커뮤니케이션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활해졌다.

자인 기획이 자리를 잡는 동안 DNP의 상황도 좋아졌다. 중원과의 문제는 이제 철 지난 일이 되었고 덕분에 우릴 꺼리던 분위기도 많이 사라졌다.

지난겨울 이런저런 삐걱임이 많았던 두 회사였지만 봄이 된 지금은 두 회사 모두 정상 궤도를 빠르게 찾아가고 있다.

“그나저나 그 머리는 어떻게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두 대표가 직원으로 잠입해 비밀 정찰 노릇은 한 지도 벌써 두 달. 파마기는 풀렸고 밝은 갈색이었던 머리 안쪽엔 다시 검은 머리가 올라와 있었다.

“파마도 하고 커버 염색도 하셔야겠는데. 밥 먹고 미용실 갈래요?”

“아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기를 거야. 좀 더 기르고 잘라야지.”

아직 남은 건 자인 기획 신입사원 안덕환의 흔적이다. 지금 난 DNP의 대표, 회사가 정상화된 지금 안덕모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반드시 마무리해야 할 일이고 그건 어쩌면 내가 대표로서 해야 할 마지막 숙제일지 모른다. 그러니 당분간 안덕환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

“아쉽다. 안덕환 스타일 좋았는데.”

녀석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난 녀석을 보며 피식 웃었다.

* * *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부터 DNP의 회의실엔 회사의 주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차혜민, 그리고 지원팀에서 계열사 관리의 목적으로 본부로 개편되어 본부장이 된 성재호, 이미래와 김다미를 포함한 주요 팀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기다란 원탁 테이블의 가장 깊은 곳, 날 위해 준비된 자리에서 주요 인사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지난겨울 우리 많이 힘들었지요?”

던져진 화두, 그들이 지난겨울을 떠올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도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겨울비와 함께 시작된 고난, 심의기관의 불공정에 회사가 흔들렸고 난 결국 무릎을 꿇어야 했다. 굴욕적인 패배 선언 이후 준비된 트로이의 목마.

원대한 작전은 성공했지만 우리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힘든 시기에 절 믿고 따라와 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당황한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중원도 성수 기획도 모두 DNP가 아닌 안덕모의 적이었다.

결국 겨울비가 계속되는 동안 모두가 괴로움을 겪어야 했고 난 그것에 대해 반드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봄이 왔지만 아직 우리 겨울을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 같네요.”

황망해진 시선들을 느끼며 오늘 모임의 이유를 입에 올렸다.

“성수 기획, 황재평.”

그리고 안덕모에 대한 적대의 시작점, DNP를 위기로 내몰았던 모든 사태의 원흉을 나직이 되뇌었다. 나와 그와의 관계를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고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잉.

회의실 프로젝터가 작동을 시작했다. 조명이 줄어들고 한쪽 벽에 조사된 화면이 점점 밝아진다. 난 그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건재한 이상 또 언제 한파가 우릴 덮칠지 모릅니다.”

충분히 밝아져 알아볼 수 있게 된 화면, 거기 현재의 성수 기획과 파트너십을 맺은 광고주들의 리스트가 떠올랐다.

성수 기획과 황재평에 대한 소식은 성재호의 레이더망에 걸려 내게 보고되고 있었다.

지난겨울, EM전자와 성수 기획 간의 파열음이 들렸다. 신성전자 광고로 인해 궁지에 몰린 EM이 성수 기획을 물어버렸다. EM의 마케팅부가 해체 수순을 밟았고 성수엔 조사팀이 찾아갔다.

불운은 한꺼번에 터졌다. 성수와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KJ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감사팀이 움직였고 EM의 조사팀과 거의 동시에 성수 기획을 덮쳤다.

성재호를 통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난 황재평이 끝장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수의 CEO일 뿐 오너가 아니다. 오너가 이 일을 문제 삼는다면 황재평은 실각할 것이고 그런 이유로 실각한 대표를 중역으로 써주는 회사는 없을 터였다.

-갑자기 조용합니다.

한 달 뒤 다시 전해진 소식은 뜻밖이었다. EM과의 파트너십은 끊어지지 않았고 그건 KJ도 마찬가지.

황재평은 자리를 지켰고 더 이상의 파열음을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만은 확실했다.

‘황재평은 끝내 살아남았다.’

앞으로도 성수 기획은 그에 의해 움직일 것이고 그가 남아 있는 한 제2, 제3의 중원 자동차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그때마다 새로운 겨울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뚜벅.

마지막 발걸음 소리가 끝나고 난 화면 앞에 섰다.

“저는 광고를 만드는 게 좋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광고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난 한 달, 깊은 고민 속에 살았다.

중원은 경영자가 바뀌었다. 중원과 황재평을 이어주던 서규원도 사라졌다.

광고주의 공격에 자칫 자기 목도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을 겪었으니 황재평도 멈추지 않을까?

조용한 지금, 평화를 먼저 깨는 게 맞는 걸까? 섣부르고 무모한 선택이 아닐까?

“그래서 전 언제 우릴 겨냥할지 모르는 공격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하려 합니다.”

오랜 시간 황재평과 부대꼈다. 그래서 난 누구보다 그에 대해 정통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가쁜 숨을 고르면, 조금만 더 여력이 생기면 그놈은 움직일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오랜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난 회의실에 모인 나의 소중한 동료들에게 그것을 전했다.

“지금부터 성수 기획, 그리고 그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모든 광고주들을 대상으로 한 전면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목표는…….”

다가올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한발 먼저 움직인다. 우리의 적이 숨을 고르는 동안.

“황재평의 완벽한 제거입니다.”

그렇게 난 대한민국 광고계의 전무후무할 총공세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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