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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33화 (133/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33화

133. 언더커버 보스(4)

“안덕모?”

“DNP, 안 대표?”

“뭐야? 쟤 기획 2팀 신입 아냐?”

“야야. 모르겠어? 얼굴 봐. 안덕모 맞잖아.”

“조용, 조용. 다 들린다고.”

단상에 올랐다. 그저 안덕모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한자리에 모인 자인 기획 직원들의 혼란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진짜 맞아?”

“맞잖아. 이거 봐.”

핸드폰에 내 프로필을 띄워놓고 돌려본다.

받아들이기 힘들 거다. 지난 보름, 자인 기획의 자유분방한 신입인 줄 알았던 녀석이 자기들의 회사를 인수한 모기업의 대표라는 뜻이니까.

“맞네?”

“어…… 진짜네.”

“안 대표가 왜 신입 행세를?”

“가만 안덕환, 안덕모?”

가중되는 혼란은 제법 흥미롭다. 하지만 재미를 위해 모은 게 아니기에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신입사원 안덕환은 제가 만들어낸 가짜니까요.”

선언과 함께 웅성거림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난 자인 기획 직원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지난 보름간, 여러분과 섞여 지내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죠. 사실 개인적으로 실망이 컸습니다.”

이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은 건 실망했으니 앞으로 잘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새로운 주인과 힘 내보자는 얘기도 아니다.

“인사팀장님, 자료를 띄워주시겠습니까?”

불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내 뒤편, 대회의실 화면에 정리된 표 하나가 떠올랐다.

사명, 직원의 이름, 직급과 근속연수, 그리고 마지막에 칸 위에 떠 있는 단어.

[인사 조치]

직원별 인사 조치엔 빈칸인 사람도 있지만.

“해고?”

누군가의 중얼거림처럼 해고자도 표시되어 있었다. 수많은 자인 기획의 인사 조치를 한 화면에 담을 수는 없었기에 인사팀장이 조심스럽게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해고, 해고, 정직, 해고.

우수수 쏟아지는 믿기 어려운 두 글자.

“자인 기획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전통 있는 대형 기획사였습니다. 회사의 규모는 회사의 능력과 비례하게 마련이죠. 하지만 자인은 적자를 거듭했고 그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네요. 아주 확실한 이유 말이죠. 아쉽지만 이번 인사 조치가 끝나면 대형이라는 꼬리표는 사라지고 전통만 남게 되겠네요.”

경악하는 시선들, 인사팀장의 스크롤이 끝났고 거기엔 이번 인사 조치의 종합된 결과가 표시되어 있었다.

총직원 350명, 해고 102명, 정직 93명.

절반 이상이 해고와 정직 처분을 받았다. 경악한 얼굴들은 이제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반응 따위와는 상관없이 칼날 같은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해고와 정직의 사유는 각자의 업무 메일로 전달되었습니다. 조치에 불만이 있으신 분이 있다면…….”

난 다시 한번 대혼란에 휩싸인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법적 대응을 하시면 되겠군요.”

한곳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해고자 명단에 빠짐없이 들어 있는 기획 2팀장과 휘하의 세 명의 책임.

내 광고를 자신들의 실적으로 만들려 했던 파렴치한 월급 도둑들의 얼굴은 참으로 볼만한 것이었다.

해야 할 말은 끝났다. 더 이상 이 자리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졌다. 난 그렇게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사상 초유의 대량 해고, 직원의 절반을 날려 버린 전대미문의 인사 조치.

누군가는 억울하다 하소연할 것이고 누군가는 정체를 속이고 파놓은 함정에 빠진 처사라 항변하겠지만.

“네. 문제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DNP, 집무실로 호출받은 성재호 팀장의 입에선 이번 조치에 대한 종합 판단이 흘러나왔다.

“사내 폭력과 폭언, 직무 유기, 허위 보고, 문서 위조까지. 이견 없이 모두 적법한 해고 사유에 해당합니다.”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지난 보름 자인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단지 관찰만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필요하면 증거를 모았고 가끔은 촬영도 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을 해고자들은 자신의 과오를 숨기지 못했다.

해고 후 법적 대응을 위해 법무법인 계약도 끝난 상태였다. 소송으로 우리 직원이 피곤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 성재호는 단언했다.

“해고자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재취업이 가능하긴 할 겁니다. 물론 광고업계에 다시 발을 들이긴 어렵겠지요.”

고개를 끄덕였다.

자인 기획 인사 폭풍은 이미 업계에 소문이 쫙 퍼졌다. 경력란에 자인 기획이 남아 있는 한 업계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바닥은 전 직장의 레퍼런스가 중요한 분야. 자신이 회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해고자들이 광고회사에 재취업하는 일은 없을 거다.

“당분간 개인 경호를 붙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으흠.”

날카로운 지적이다. 이번 일로 막대한 원한이 쌓였을 것이다. 극단적인 결정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경호는 됐습니다.”

“대표님,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재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경호가 있다고 절 해하려는 의지를 꺾지는 못할 겁니다. 모두 제가 풀어야 할 일이니 쓸데없는 지출은 하지 맙시다.”

“네.”

지원팀장이 입을 다문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다른 걸 물어온다.

“정리가 끝나면 자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새 출발을 시켜야겠죠.”

“혼란이 클 겁니다.”

성재호의 말처럼 유지하는 것은 명맥뿐, 정상적인 가동을 기대할 수 없다.

“제가 벌인 일이니 책임도 져야겠지요.”

다시 이어지는 침묵, 그리고 조심스러운 물음.

“DNP와 완전 합병을 하시거나 사명을 바꾸시는 게 어떨까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인 기획은 직원의 절반이 갈려 나가는 대수술을 겪었지만 여전히 회사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명을 바꾸는 게 새 출발에 도움이 되겠지만 전통 있는 그 이름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옥을 한번 알아봐 주세요.”

“저희와 같이 쓸 수 있는 사옥 말씀이십니까?”

“네.”

의자를 돌렸다. 집무실 안쪽 유리창 너머 서울의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남이 멀지 않은 위치에 매입 가능한 부지로 알아봐 주세요. 가능하면.”

DNP는 성장했다. 엄청난 회사들이 득실거리는 저 서울 아래 내 회사 명의의 땅을 노려볼 수 있을 만큼.

“신사옥을 올렸으면 하네요.”

“알겠습니다.”

성재호가 빠져나갔다. 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였고 화면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이다은 사원]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 난 나의 기획 2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선배, 선배.”

“아 왜?”

“저 쫄려서 죽을 것 같아요.”

이다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해. 나도 죽겠으니까.”

어제 안덕모가 전화를 해왔다.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고 받은 게 실수였다. 상대가 그인 줄 알았다면 아마 이다은은 높은 확률로 전화를 받지 않았을 거다.

목소리를 듣고서야 상대방을 알았다. 당황한 건 당연했고 간단한 대답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그건 후배로 데리고 있던 사람이 DNP 대표여서가 아니었다.

얼마 전 인사 조치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영문도 모르고 회의실에 모인 350명 직원 중 200명이 해고되거나 정직을 먹었다. 대한민국 기업사에 유례없을 대 숙청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실행해 버렸다.

천재 카피라이터, 칸 광고제에 태극기를 날린 자랑스러운 한국인, 거대기업 중원에 맞서 회사를 지켜낸 신화적인 인물.

안덕모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은 한 번에 날아갔다. 자인 기획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덕모는 잔혹한 기업가요, 피도 눈물도 없는 상사일 뿐이었다.

그런 안덕모가 자신을 불렀다. 이다은은 조금 전까지 그와 함께했던 보름간 무슨 실수를 했나 끊임없이 고민했다.

“저 잘리겠죠? 안 대표한테 회의실 청소시켰단 말이에요. 해고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실업 급여는 받을 수 있겠죠?”

6개월 후배 하병철, 평소 말 없던 놈이 오늘은 완전히 수다쟁이다. 왜 그러는지 알고 있기에 이다은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잘랐으면 진작 잘랐겠지. 조용히 좀 해라.”

결국 타박을 당하고서야 입을 다문다. 그리고 그때 횟집 프라이빗 룸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이다은의 머릿속엔 슬로비디오가 돌아가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안덕모가 보인다. 자유분방했던 의상 대신 대표에게 걸맞은 정장을 입었다. 그 옆에 한 여자가 보인다. 옆 팀에 있을 때 말이 없어 냉미녀라 불렀던 안덕환의 입사 동기, 알고 보니 안덕모의 오른팔인 동시에 부대표이자 애드온의 대표를 겸임하고 있는 차혜민이다.

이다은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는 저승사자들.

“선배.”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하병철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잘 지내셨죠?”

안덕모다. 그는 왜 선배라 부르고 존대를 하는가. 언어중추가 마비되고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온 건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 제가 다 잘못했어요.”

두 손을 모은 채 오열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에 다가오던 안덕모가 우뚝 굳었다.

* * *

한 번도 쓰지 않은 젓가락, 그 젓가락으로 먹음직스러운 회한 점을 집어 이다은의 앞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멍한 눈이 올려놓은 회에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가 없다.

다시 한 점을 집어 하병철 앞에 올려놓는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회에 독이라도 탄 줄 알겠다.

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다시 집어 한 점을 차혜민의 접시 위에 올리니 그제야 따가운 시선이 사그라든다.

“다은 선배.”

“어으으.”

“왜 또 떨어요? 그러지 마세요, 진짜.”

그렇게 말을 해도 저런다. 섭섭함에 날아간 목소리에 양손이 올라온다.

“잘못했…….”

“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차혜민이 잔을 부딪쳐 온다. 술이 입으로 넘어오고 목을 타고 넘어간다. 일본술 특유의 비릿함이 느껴질 즈음이었다.

“일단은 선배라고 안 해주실 수는 없으신 거겠지요?”

존칭을 넘어선 극존칭, 부정에 부정법을 더해 한 5초 생각해야 의미 파악이 가능한 요상한 어법.

“안 돼요.”

답답한데 고집을 부리게 된다. 자꾸 떠니까 더 하게 되는 고약한 악취미. 내가 그 고약한 재미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고집을 꺾기로 했다.

“알겠어요. 이다은 씨.”

그제야 긴장한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지금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지요?”

“아…… 네. 팀장도 없고 결재해 줄 사람도 없고.”

걱정스러운 얼굴이 쓰게 웃는다.

“아무것도 안 되고 있지요.”

“며칠 안에 새로운 조직이 구성될 겁니다. 아마 기존 팀들을 통합하는 방향이 될 것 같네요.”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졌기에 난 이 자리에 두 사람을 부른 이유를 입에 올렸다.

“광고 기획사는 카피라이터가 있는 기획팀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자인은 네 개 기획팀을 가지고 있었지만 새 조직에선 한 팀으로 모일 겁니다.”

이다은의 고개가 작게 끄덕인다. 그녀의 모습에서 함께 일했던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팀장과 선임들이 먼저 빠져나간 회의실, 후배들에게 줄 음료를 사 와 회의를 이어나가던 모습.

자신의 후배에게 닥친 팀장의 부정에 대항해 끝까지 항변하던 용기 있는 모습.

고작 입사 일 년이 지난 이제 막 신입 딱지를 뗀 새내기 카피라이터일 뿐이지만.

“새로운 기획팀의 팀장을 맡아주세요.”

그녀는 할 수 있다. 김다미가 그러했듯.

“예? 저요?”

“네. 이다은 씨요.”

황망함에 떨리는 눈동자. 차혜민 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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