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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32화 (132/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32화

132. 언더커버 보스(3)

[건일 건설, 뉴캐슬]

광고가 시작된다. 이곳은 뉴캐슬 아파트 내부, 모델하우스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광고 모델이 등장한다.

음악 소리와 함께 리드미컬한 발걸음이 박자를 맞춘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델의 모습이 줌인되고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왜 뉴캐슬에 사냐구요?]

그녀의 발걸음이 거실에 자리한 큼직한 창문으로 이어진다. 품위 있게 창문에 기댄 그녀 너머로 창밖 세상의 모습이 비친다.

황사로 누렇게 변한 하늘, 나무라곤 보이지 않는 황량한 도시, 그위를 몰아치는 거친 바람.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모델의 모습엔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은 위험하니까.]

모델의 시선이 이동한다. 조금 열려 있는 창문 틈, 그 작은 틈을 통해 누런 먼지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동요 없던 그녀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진다.

“벤트 에어.”

모델이 읊조림과 동시에 작동음이 들려온다. 공조장치가 가동되고 창문 틈으로 들어왔단 누런 먼지는 천장 위로 빨려 들어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모델이 돌아섰을 때였다.

웨에에엥.

어디선가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모델이 멈춰 서고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뉴캐슬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외출을 삼가 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립니다. 뉴캐슬 주민 여러분들께서는…….]

모델이 소파에 앉는다. 모델 너머 창문 그곳에 비친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콰아아.

알 수 없는 굉음과 함께 먹구름과 누런 하늘을 뚫고 몇 개의 불덩이가 쏟아진다.

쿠궁.

이번엔 지진이다. 창밖의 세상은 지진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아파트 내부와 모델은 평화롭기 짝이 없다. 그녀가 소파에 앉은 채 여유롭게 커피잔을 들어 올린다.

[황사, 기후변화, 지진. 무엇하나 안심할 수 없는 불안한 세상]

콰앙.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이가 멀리 건물과 충돌한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건물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반 토막 나 무너져 내린다.

“크아앙.”

화염에 휩싸인 건물의 잔해 너머 정체불명의 거대 괴수의 그림자가 등장한다.

콰아아.

누런 하늘에서 나타난 전투기 편대가 괴수를 향해 화기를 난사한다. 창문 밖의 대혼란 따위는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것처럼.

호륵.

커피를 음미하는 모델의 모습은 그저 평온하다. 모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들려오는 내레이션.

[뉴캐슬이라면 언제나 안심.]

퍼엉.

괴수가 있던 곳에 치솟는 버섯구름. 세상의 멸망을 배경으로 한가롭게 소파에 몸을 파묻는 모델. 그 모습을 끝으로 화면이 암전 된다.

[신 공법으로 구현된 압도적인 안전성, 당신을 위한 최고의 편의사양.]

[벙커 포 마이 라이프, 뉴캐슬.]

[건일 건설, 뉴캐슬. TV CF 30초 END.]

광고주를 대상으로 한 광고 콘티 시사가 끝났다. 영상이 아닌 간략한 스케치로 구현된 광고였지만.

“와…… 이건.”

건일 건설 마케팅 담당자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말씀하신 대로 만들어봤는데…….”

자인 기획 담당자의 목소리는 불안으로 떨렸다.

“어떤가요? 제가 보기엔 좀 과한 듯한…….”

“너무 좋습니다!”

“네?”

담당자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대로 가시죠!”

긍정을 넘어 대만족 선언.

“아…… 감사합니다.”

한방에 컨펌이 떨어졌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컨펌을 받아본 적 없던 자인 기획 직원들의 얼굴은 말 그대로 볼만했다.

“하…… 이것 참.”

자인 기획 직원들 사이에 끼어있던 김다미가 허탈하게 웃었다.

* * *

“그래.”

신분을 숨기고 있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다. 특히 안덕모를 찾는 전화가 왔을 때가 그렇다.

핸드폰 진동이 울리자마자 조용한 회의실로 들어왔고 귀에 붙인 전화기에선 김다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

[네. 있죠.]

그 목소리가 심각하다.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목소리에 집중했다.

[건일 건설 광고, 대표님이 만든 거죠?]

“아…….”

한껏 올라왔던 긴장감이 푸쉬쉬 흩어진다.

“그래. 근데 어떻게 알았어?”

[왜 몰라요? 대표님하고 일한 게 몇 년인데. 극단적인 연출, 그 뻔뻔함. 딱 안덕모라고 적혀 있던데요, 뭐.]

그런가? 함께 오랫동안 일하게 되면 그런 것까지 알아보는 건가?

“크흠.”

며칠 전 진전없는 기획 회의가 답답해 아이디어를 쏟아낸 게 화근이었다. 김다미가 알아본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볼지도 모른다.

자인에 대해 한참 조사 중인 이런 때 정체가 발각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앞으론 조심해야겠네. 혹시 또 알아본 사람 있나?”

[아뇨, 그건 아니고.]

김다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진다. 그건 묘하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오늘 건일 건설에서 콘티 시사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수정 없이 한방에 컨펌 났어요.]

“그래?”

좋은 결과다. 건일 건설은 조금 특별한 광고를 원했고 그건 마침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광고주의 요구와 카피라이터의 장점이 일치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물론 좋은 결과로 주목받게 되는 건 조금 위험하지만.

[근데 이상하단 말이에요. 그 광고 메인 카피라이터, 우서연 책임으로 되어 있던데요?]

“뭐?”

광고는 카피라이터의 고뇌와 노력의 산물이다. 카피라이터의 능력은 그가 만든 광고의 필모로 결정되기에 보통의 광고에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카피라이터의 이름이 붙는다.

물론 공동의 아이디어라면 팀의 이름이 붙고 메인을 특정하기 어렵다면 회사의 이름이 붙기도 하지만.

“우서연이라고?”

전혀 기여도가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법은 없다. 우서연은 자인 기획 2팀의 차석이자 기획 회의 때 5분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선 팀장을 따라 회의실을 떠났던 책임 삼인방 중 하나.

[네. 광고는 너무 대표님스러운데 엉뚱한 사람 이름이 붙어있길래 전화 드린 거예요.]

전화를 끊었다. 단지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기획 2팀의 팀장과 책임은 내가 예상했던 선을 아득히 넘고 있었다. 회의실을 나와 기획 2팀으로 돌아가니 분위기가 묘하다.

“수정해 주세요!”

분위기를 이렇게 만든 이의 정체가 뜻밖이다.

“팀장님! 당장요.”

이다은, 기획 2팀 사원 삼인방 중 선임이자 팀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지금 팀장 자리 옆에 선 채 수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해 주세요.”

귀찮다는 듯 시선을 화면에 못 박은 박진철 팀장. 그의 입술에 조소가 피어오른다.

“이다은.”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싸늘했다.

“네가 만든 광고야? 아니잖아. 안덕환이 만든 거라며.”

하지만 이다은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네, 맞아요. 그러니까 메인 안덕환 씨로 수정해 주세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된다. 조금 전 김다미를 통해 들었던 내용, 그걸 이다은도 알았던 모양.

광고주에게 나간 광고 콘티의 주인이 바뀌었다. 카피라이터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중요한 필모에 엉뚱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지난 며칠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모습만 보아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대체 어디에서 저런 용기가 솟아나는지 자기 일도 아닌 일에 앞장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던 것.

“오지랖 떨지 마. 일 년이나 이 바닥 경험해 봐서 알잖아? 덕환이 입사한 지 보름 된 햇병아리야. 아직 필모 같은 거 붙일 짬이 아니라고.”

하지만 상대는 팀장이다. 서릿발 같은 팀장의 목소리에 이다은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진다.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 우린 개인이 아닌 회사야. 팀이 다 같이 잘되자는 건데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굴면 더는 못 참아.”

“과분해도 엄연한 실적이에요. 아무리 선배고 회사라도 그걸 빼앗는 건 잘못된…… 아.”

그때 이다은이 날 눈치챘다. 박진철이 마침 잘되었다는 듯 내게 손짓한다.

“네. 팀장님.”

난 깍듯한 막내에 빙의한 채 이다은의 옆에 섰다.

“네 아이디어, 우리 차석 서연이 이름 달아줬어. 회사 분위기도 어수선한 마당에 차석한테 실적 달아준 게 잘못된 거냐?”

박진철은 아주 당당했다.

“덕환이 네가 말해봐.”

그래서 응당 받아야 할 대가처럼 동의를 요구해 온다.

공동체인 팀에서 만든 광고에 차석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내가 자인에 와있는 목적이 광고를 만드는 게 아니니 거기에 누구 이름이 달리더라도 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기획 2팀장과 차석은 안된다. 회의 시작 5분 만에 자리를 떠 새카만 후배들끼리 회의를 하는 동안 퇴근을 해버리는 고참들.

이다은과 하병철 사원이 기획안을 정리하는 동안 주식시장에 대한 잡담이나 지껄이고 있던 그들의 이름은 안 된다. 그러니 허용될 수 있는 건 이다은과 하병철까지다.

여기서 정체를 밝히고 확 뒤집어 버릴까 하는 마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 고쳐먹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야, 이다은 들었지?”

말 아직 안 끝났다, 이 자식아.

“입사 보름 된 신입사원 실적 훔쳐야 할 만큼 무능하다면, 그래요,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비아냥을 섞어 내뱉은 말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이가 있었다.

“야! 너 지금 뭐라고?”

자신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는 동안 남일 대하듯 관심 없던 우서연이 폭발한 것.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다은을 이 자리에 두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가요. 선배.”

이다은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놀란 이다은은 날 따르면서도 팀장과 우서연을 힐끔거린다.

“하…… 진짜 팀 자알 굴러간다.”

뒤통수에서는 박진철의 푸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생각보다 상황 심각하네요.”

그날 저녁. 난 차혜민과 어김없이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커피숍에 와서도 커피 대신 주문한 차를 홀짝이며 차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팀도 그렇고 다른 팀도 비슷해. 3년 차 이하 애들은 괜찮은데 그 위는 답이 안 나와.”

지난 보름, 우린 자인 기획에 섞여 회사의 현실을 살폈다. 혹시나 했던 기대는 빗나갔고 역시나 했던 건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수백 명의 인재를 보유한 자인 기획, 업계 5위 수준으로 평가받는 대형 기획사가 어째서 매년 엄청난 적자를 보고 있었는지 이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김상인 대표도 여러모로 노력했을 거다. 직원들의 기도 살려보고 동기부여도 해보고, 하지만 소용없었을 거다.

자인 기획의 윗물, 회사의 주축을 담당해야 할 3년 차 이상의 고참들이 완전히 썩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일 건설 광고 얘기 들었어. 근데 그런 게 기획 2팀만 그런 게 아니더라.”

그들은 후배의 성과를 당당하게 빼앗았다. 자신은 놀면서 후배들에겐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면서도 그 입에 팀워크와 조직을 달고 살았다.

썩어버린 윗물, 그걸 알면서도 방치한 인사조직, 그리고 임무를 방기한 임원들.

“아무래도…… 대대적인 조정이 필요할 것 같네요.”

실상을 보지 못했다면 핵심 임원 정도를 교체하는 선에서 끝났을 거였다. 일 년 이 년, 기다림에 대한 결과는 실망스러운 결과로 나왔을 거고 그 기간은 일, 이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야 할 것 같네.”

이로써 보름간의 암행은 끝났다. 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네. 안덕몹니다.”

전화기 너머 긴장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일 전 직원 회의실로 모아주세요. 아. 이유는 알 필요 없습니다.”

단호하게 전달되는 지시, 찻잔을 돌리며 차혜민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뭐야, 이게? 홍 팀장 무슨 얘기 들었어?”

박진철 팀장, 그는 갑작스러운 소집에 기분이 상했다. 아침에 한참 올라가고 있던 주식, 잠시 후면 기세가 꺾일지도 모르는 그 종목의 매도 타임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네. DNP에서 누구 오는 거 아닐까?”

“DNP?”

박진철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하긴 때가 되긴 했다.

기껏 회사를 인수해 놓고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새 대표라도 발표하려나?”

회사가 넘어가고 지난 한 달 반, 박진철에겐 꿈같았던 시간이었다.

월급을 받으면서 주식 공부도 많이 했고 남 눈치 때문에 소홀했던 골프 실력도 많이 늘었다.

회사 적자? 경영진의 고민? 그런 건 오래전에 관심을 끊어버린 지 오래된 그였다.

“……근데 왜 안 와?”

대회의실에 직원이 모인 지 십 분여가 지났다. 직원들을 소집한 인사팀장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웅성이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좁은 회의실에 콩나물시루처럼 모인 사람들의 불쾌함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움직임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박진철은 아니었다.

“쟤는 어디 가니?”

자신의 팀 막내, 보름 전 신입으로 온 안덕환이었다. 회의실의 가장 앞쪽, 진행자가 있어야 할 위치까지 걸어온 안덕환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직원들이 모인 곳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하, 저…….”

운 좋게 좋은 광고 아이디어를 냈던 놈이다. 밑에 두고 오래 빨아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어제 깨져버렸다.

“싸가지없는 놈.”

웅성거림 속에 박진철의 목소리가 들렸을 리 없다. 하지만 안덕환은 마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자신을 노려보았다.

“반갑습니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 웅성이던 직원들의 고개가 안덕환에게 향했다. 녀석이 쓰고 있던 테가 굵은 안경을 천천히 벗었다.

“DNP 대표 안덕모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소리, 박철환은 멍한 눈만 껌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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