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30화
130. 언더커버 보스(1)
포털에 서일 일보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그간 신성전자와 EM 간의 냉장고 용량 경쟁을 다루며 예리한 예측으로 경제 분야 핫토픽을 지켜왔던 허 기자의 기사였다.
[치밀하게 계산된 비방, DNP의 광고에 감화된 어느 기자의 고백.]
현학적 표제 하에 올라온 기사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광고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다. 제품과 자사 홍보가 주목적인 광고는 뻔히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성의 새로운 광고는 전쟁을 확대하는 방향일 거라 생각했다.
비방 속에서 집중되는 관심, 특수라고까지 할 수 있는 가파른 판매량 상승이 있었음을 알았기에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성은, DNP의 광고는 예측의 범주를 벗어났다. 전쟁 끝냄과 동시에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는 메시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선점하고 상대가 더 이상의 비방을 할 수 없도록 재갈을 물리는 조치였다.
자칭 전문가라 칭했던 그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까마득히 앞선 수. 그 기막힌 수를 DNP가 놓았다.
그것은 놀라움이자 센세이션이었다. 그의 오만을 부끄럽게 만드는 충격이었다.
본문의 마지막에서 허 기자는 말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더라. 상호 비방도 전략적 카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절절한 고백이 담긴 기사는 아쉽지만 핫토픽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빠짐없이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중엔 이번 용량 전쟁의 배패자, 패전의 책임뿐만 아니라 과거의 문제까지 광고주에게 들켜 버려 몹시 곤란한 상황인 황재평이 있었다.
“네. 잘 수습할 수 있습니다.”
성수 기획 대표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황재평.
“직원들 의욕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잘 단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허공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네. 네. 두 번 다시 회장님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불안한 눈빛으로 자리를 지키던 조준용 부장,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대표님.”
“말해.”
“EM에서 조사단이 왔습니다. 대표님께서 한번 만나보셔야 할 듯합니다.”
“……제기랄.”
생각해 보면 무리한 계약이었다. 하지만 당시 황재평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EM의 광고 기획사는 10년이나 함께해온 소울 파트너였다.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쓸 줄 아는 건 돈밖에 없었다.
물론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광고주인 EM의 마케팅 책임자가 적당한 핑곗거리로 소울 파트너를 쳐냈다. 과거보다 좋은 조건인 성수 기획과의 파트너십이 시작된 건 정해진 시나리오대로였다.
황재평은 알았다. 돈 받은 놈들이 입을 다물면 절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광고 실패가 발목을 잡았다. 이슈를 선점한 경쟁사를 깎아내리기 위한 섣부른 대응, 그것이 참사를 불렀다.
신성에 안덕모의 DNP가 붙었다. 거짓말이라는 프레임에 가둬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파격적인 비교 광고가 터졌다. 돈으로 엮인 성수와 광고주간의 파열음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다.
불리한 상황에 처한 EM의 경영주는 의심을 시작했고 유착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돈 받은 놈들의 멍청한 씀씀이 덕에 꼬리가 밟혔다. 사정의 칼날이 휘둘러졌다.
돈을 받은 광고주들은 칼날에 두 동강 나 사라져 버렸고 그 칼끝은 이제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몇 명이나 왔어?”
“열 명입니다.”
두세 명이라면 무마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열 명은 방법이 없다.
“후우…… 그래. 알겠어.”
“저…… 그리고.”
“또 뭐!”
싫고 미운 건 지금 상황이었지만 눈앞의 애먼 조준용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 황재평이었다.
“이번일 KJ에서도 들은 모양입니다. 감사팀에서 조사 시작했다고.”
“망할!”
쿵.
분을 이기지 못해 크게 구른 발.
뒤늦게 찌르르 전해지는 고통에 황재평은 두 눈을 꾹 감았다.
* * *
“감사합니다.”
모처럼 이른 출근, 집무실로 들어가는데 앞을 막아선 김상인이 고개를 숙인다.
“네? 뭐가요?”
올라온 그의 얼굴이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려낸다.
“믿고 맡겨주셔서요.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살아 있는 기분입니다.”
용량 전쟁을 성공으로 이끈 그였다. 믿고 맡긴 건 나지만 부정적 인식이 정면충돌하는 비방전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둔 건 온전히 그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제 그는 실험적 인사가 아닌 확실한 실적을 가진 DNP의 카피라이터이자 어린 동료들에게 훌륭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고참이 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계속 좋은 모습 보여주시면 됩니다.”
난 조심스레 그의 팔을 도닥였다.
자리로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이제 와?”
“아…… 놀라라.”
조금 놀랐다. 내 자리에 어떤 여자가 생머리를 풀어헤친 채 앉아 있었던 것.
“뭘 놀라고 그래? 못 볼 사람 봤어?”
“아니…… 머리가 왜 그래요?”
“아. 조깅 끝나고 바로 왔거든. 덜 말라서 묶어놓으면 냄새난단 말이야.”
“아.”
“머리를 좀 잘라야겠어. 신경 안 썼더니 거추장스럽네.”
차혜민이 풀어헤친 머리를 흩뜨리며 웃는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딱 목 정도 까지만 내려왔던 단발, 큰 키와 단발 덕에 지금보다 차갑고 커리어우먼의 이미지였다.
오랜 시간 함께해온 탓일까? 조금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제 누구보다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근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
그녀가 책상 위 서류 하나를 내 쪽으로 돌려놓는다. 난 그것을 집어 살피기 시작했다.
“신성 전자 급한 일 끝냈으면 슬슬 자인에 손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거긴 지난달 결산보고서가 있었다. DNP와 애드온, 새로 인수한 자인 기획의 한 달간의 성과가 요약되어 있었고 결산의 끝에 각 회사의 한 달의 살림살이 결과가 숫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중원 사태의 여파로 일감이 줄어든 DNP는 약수익, 애드온은 견조한 흑자를 기록 중이었지만 자인 기획은 아니다.
결산 보고서 끝에 자리한 숫자를 확인한 내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적자가 2억이네요.”
차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달에 2억이야. 빨리 정상화 못 시키면 우리까지 골로 간다고.”
“흐흠.”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매달 반복되는 적자 덕에 우린 자인 기획을 무척 싼 가격에 인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전달된 지시사항도 없었고 김상인 대표의 공석은 재무팀장이 임시로 올라와 있는 상황.
지금 자인이 어떤 상태일지 보지 않아도 훤히 보인다.
실행 여부를 두고 고민해왔던 일. 난 그것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대표님, 요즘 바쁘세요?”
“나? 아니. 별로.”
“잘됐네요. 그럼 이따가 저랑 미용실 한번 가시겠어요?”
“미용실?”
영문 모를 소리에 차혜민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머리 자르셔야 한다면서요. 돈은 제가 낼게요.”
의미를 짐작하기 위해 내 얼굴을 살피는 눈길, 그 눈길에 의아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무슨 생각인데?”
“역할극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한쪽 입술이 길게 말려 올라갔다.
“아니요. 저랑 같이요.”
설명이 끝나고 차혜민은 애드온으로 돌아갔다. 오늘 오후에 근처 미용실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받은 후였다.
애드온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앞으로 약 한 달간 자리를 비워도 문제가 없도록 일 처리를 마쳐놓고 와달라는 것.
그건 내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미뤄둔 결재들을 처리하고 성재호를 불렀다.
“당분간 결제는 온라인으로 합니다. 중요한 사항은 문자로 남겨주세요.”
“어디 가시나요?”
“네, 한 달쯤 자리를 비울 것 같네요.”
이미 한 달의 휴가도 다녀왔다. DNP는 대표가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가 없는 시스템을 갖추어 놓은 상태였다.
지시를 마치고 DNP의 오래된 팀장들을 호출했다.
“와…… 이렇게 모인 게 얼마 만이예요?”
참석자들을 둘러보며 김다미가 말했고.
“그러게 예전 사무실 생각나네. 세월이 참.”
이미래가 노인 같은 소릴 중얼거렸다.
“한 사무실에 있어도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모이니까 좋네요.”
영원한 우리 막내, 김다미가 뽑은 직원 1호인 조용찬, 녀석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대표님?”
이곳은 회사 근처의 조용한 식당. 의아한 얼굴을 한 팀장들을 둘러보았다.
“나와 차혜민 대표가 한 달간 자리를 비울 거야.”
이번 역할극의 무대는 자인 기획이다. 자인 기획은 합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 하지만 DNP보다 크고 오래된 회사다.
지금 자인은 혼란스러운 상황일 거다. 대표는 떠났고 회사는 다른 회사에 넘어갔다.
인수합병 이후 방치하듯 놔두었으니 내부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거고, 정상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이상해 보일 지경인지도 모른다.
인수가 끝난 직후 우리 쪽 사람을 자인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낙하산을 타고 숲 위로 떨어진 사람은 나무만 볼 뿐 그 아래의 땅과 키 작은 풀을 보지 못한다. 숲을 이룬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를 보지 못할 것임은 당연하고.
자인엔 좋은 인재가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대부분은 저 아래 깊숙한 밑바닥에 숨어 있을 것이다.
“자인에 정체를 감추고 잠입을 하려고.”
“대표님 얼굴 단번에 알아볼 텐데요?”
김다미의 물음, 난 좀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모습을 좀 바꿔볼 생각이야.”
눈빛들이 미묘하다. 변장을 한다고 안덕모를 못 알아볼까? 그런 눈빛들.
“들키면 어쩔 수 없지만 그전까진 비밀유지가 생명입니다. 아시겠죠?”
고개들이 끄덕인다.
“에휴…….”
미간을 찌푸린 김다미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팀장들과의 점심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 필요한 조치를 취해두었다. 특히 자인 인사팀장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위이잉.
늦은 오후 차혜민과 미용실에서 만났다. 헤어팩을 덮은 머리 위에서 따끈따끈한 열기를 전해주는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용실에서 두 시간, 그곳을 나와 안경점에서 한 시간, 쇼핑몰에 들러 시도해 본 적 없던 패션의 옷을 몇 벌 고르는 데 한 시간, 마지막으로 차혜민을 돌려보내고 태닝샵에 들려 두 시간.
그리하여 그날 늦은 밤. 난 안덕모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 * *
“자, 자. 다들 주목.”
이틀 후. 서초동에 위치한 자인 기획 본사. 기획 2팀장 박진철이 짝짝 박수를 쳤다.
“간만에 신입 왔다.”
각자 업무 중인 고개들이 이쪽을 향한다. 박진철이 내 등을 툭툭 두드린다.
“뭐…… DNP 경력으로 뽑았는데 그쪽 TO에 문제가 생겨서 여기로 내려보낸 모양이더라.”
팀장의 목소리에 시선이 바뀐다. 말하자면 동정 어린 시선.
“자, 인사들 해.”
가장 먼저 다가온 건 팀장의 오른쪽에 앉았던 30대 중반의 여성.
“난 우서연, 책임이고…….”
그녀가 날 빤히 바라본다. 등줄기에 한기가 스쳐 지나간다.
“많이 탔네? 외국 다녀왔나 봐?”
다행이다. 염색한 퍼머머리, 눈을 가린 안경에 게다가 처음 시도해 보는 힙한 의상에 태닝까지 했으니 날 알아보지 못한다.
“아뇨, 원래 까만 편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내민다.
“이름은?”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덕환입니다.”
난 일부러 약간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