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26화
126. 화려한 휴가(5)
건물 로비, 동생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부터 이쪽을 힐끗대던 여자 두 명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저기…….”
“네.”
“안덕모 씨 아니세요?”
“네, 맞습니다만.”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낯선 얼굴들이다.
“어머, 맞대.”
“우와. 우와.”
무슨 일인지 두 사람은 어깨까지 들썩이는 중.
“절 아시나요? 전 기억이 없는데.”
광고주였나? 아니면 내 광고에 출연했던 배우나 스태프?
“아뇨, 아뇨.”
대답을 돌려준 그녀가 뭔가를 내 앞에 내민다. 뭔가 싶어 바라보니 수첩과 펜이다.
“저희는 알지만 안 대표님은 모르시죠.”
본능적으로 수첩과 펜을 받았다.
“방송으로 봤으니까. 저 사인 한 장만 해주세요.”
“아…….”
광고 촬영장에서 광고모델이 사인해주는 모습은 매번 보았다. 가끔은 철없는 학생들이 내가 스태프인 줄 알고 광고모델의 사인을 부탁해 온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입가엔 조금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제 사인요?”
“그럼요.”
“대표님 광고 팬이에요. 이번에 광고전쟁 출연하신 것도 봤구요.”
사인을 했다. 결재판이 아닌 남의 수첩에 사인을 해보는 건 처음이지만.
“감사합니다.”
대단할 것 없는 사인이다. 결재판에 쓰던 사인을 조금 크게 해서 그려 넣고 그 아래 오늘 날짜와 ‘행복하세요’라는 멘트를 적어 넣었다. 두 사람이니까 다음 장에도 또 한 번.
“진짜 잘생기셨어요.”
픽.
뜻밖의 말에 펜이 엇나간다. 덕분에 행복하세요는 행복하새가 되어 버렸다. 다시 하겠다고 했지만 상대는 괜찮다며 결국 나와 악수까지 한 번씩 나누고 깔깔대며 멀어졌다.
“하…… 참.”
기획사 대표로서 해보기 힘든 경험. 난 그녀들이 멀어진 곳은 한동안 바라보았다.
“뭔 짓을 한 거야?”
잠시 후 안주미가 로비로 내려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날 심각한 얼굴로 바라본다.
“홍서희 완전히 맛이 갔던데?”
“해야 할 일.”
난 조금 전 홍서희와의 일을 짤막하게 평가했다. 그제야 내가 모자와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녀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완전 나라 잃은 표정이더라. 그러게 성깔 좀 죽일 것이지.”
그럴 수밖에.
하대하던 신인 배우, 더욱 하찮은 신인배우의 매니저. 촬영 기간 내내 홍서희와 그 매니저는 나와 안주미를 멸시해왔다.
그런데 그 매니저가 자신을 그 자리에 있도록 만들어준 광고를 만든 기획사의 대표였다. 게다가 배우는 대표의 친동생.
촬영 기간 내내 그녀가 했던 언사가 떠올랐을 거다. 힘들어서 인터뷰 요청에도 노코멘트 선언을 했던 제로 스웨트 매몰 씬이 떠올랐을 거다.
“당분간 광고판에서 그 사람 얼굴 볼 일 없을 거야.”
안주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과거에 큰 사건 하나가 있었다. 광고 기획사끼리 유명한 광고모델들에 대해 등급을 매기고 은밀한 사생활에 저열한 평가까지 덧붙여 만들어냈던 리스트.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예계 X-파일이 그것이었다. 그건 범죄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저열한 방식이었다.
파일의 목적이 연예인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자기들끼리 돌려보고 낄낄거리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니까.
그 사건이 이슈가 된 후 이 바닥에 X-파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카피라이터들 간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엄청난 예산, 수백 명의 노력이 투입되어 만들어낸 광고. 광고와 광고 제품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광고모델에게 논란이 벌어지면 그 피해는 상상하기 어렵다.
모델과의 광고계약서에 품위유지에 대한 조항과 빡빡한 제약사항이 가득한 건 그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
당연하지만 예견된 리스크는 피해야 한다.
덕분에 소속 회사를 가리지 않고 카피라이터는 활발히 정보공유를 하고 있고 품위 손상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되는 연예인은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1순위로 배제된다.
홍서희는 누구보다 품위 손상 리스크가 큰 연예인 반열에 오를 것이다.
“쯧쯧.”
이제 진짜 연예인이 된 녀석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난 손에 든 모자를 들어 올렸다. 휴가가 끝나 할 일이 산더미라도 하루를 비워 이곳을 찾은 이유는 홍서희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니다.
“자, 이걸로 임시 매니저는 끝. 앞으로 BK에서 잘 관리해 줄 거야.”
어제 황아람과 통화를 했다. 안주미를 위한 관리 프로그램이 시작된다는 얘기였다. 전담 매니저가 붙고 이동을 위한 차량이 지원되고 전문적인 스케줄 관리는 기본이고.
더 게이트를 통해 검증된 연기력, 콜라보 광고를 통해 화제성. 이제 안주미는 BK엔터에서도 신경 써서 케어해야 하는 중요한 연예인이 되어 있었다.
푸욱.
손에 든 모자를 안주미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인터뷰를 위해 공들여 스타일링한 머리가 모자 안에 쏙 들어갔다.
놀란 녀석의 두 눈이 내게 향한다.
“이제 어디 다닐 땐 얼굴 잘 가리고 다녀.”
그렇지 않아도 건물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 전 내게 사인을 받아간 사람들처럼 기획사 대표에게 관심을 보이는 대신 언젠가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안주미에게 향하고 있다.
막바지 작업 중인 영화가 개봉되면 이제 안주미를 이런 공간에 두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무척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고마워.”
녀석이 고개를 작게 숙인다. 난 그런 녀석을 데리고 로비를 나섰다.
* * *
다음 날. 난 자인 기획 대표실을 찾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성재호 팀장이 나와 김상인 대표 앞에 고급스러운 재질의 결재판을 올려놓는다.
“각자 하단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결재판에 들어 있는 건 인수합병 계약서. 계약서에 사인이 되면 자인 기획의 주인은 DNP가 된다. 준비된 만년필을 들고 고개를 돌렸다.
중원과 있었던 일 때문에 늦어진 인수합병. 안 그래도 늙어 보이던 김상인 대표의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다.
어렵게 눈앞에 다가왔던 기회, 자신을 옥죄고 있던 경영자라는 차가운 감옥에서의 탈출이 어그러질 뻔했으니 그 마음고생이 눈에 선하다.
“사인하실까요?”
“그럽시다.”
김상인의 주름진 두 눈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린다.
슥슥.
큼직하게 사인을 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바꾸어 다시 한번.
“됐습니다. 이로써 인도, 인수절차가 끝났습니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성재호의 선언으로 길었던 자인 기획 인수가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김상인과 굳건한 악수를 나누었다.
찰칵, 찰칵.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사진을 찍는다. 김상인을 따라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뭘 하실지는 결정하셨나요?”
“아니요. 지금은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냥 한 일주일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려구요.”
회사 매각의 대가로 김상인은 보유지분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그의 오랜 노력, 털어 넣은 사재에 비해 충분하다고 할 순 없는 보상이지만 확실한 건 남은 삶을 풍족하게 지낼만한 액수다.
그래서였을까? 얼굴에 가득했던 그림자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끝나고 저랑 커피 한잔 어떠신가요?”
“좋지요.”
김상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두 분 잠시 이쪽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진 기사의 요청, 우린 굳건히 손을 맞잡은 채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찰칵.
기사의 커다란 사진기에서 의미심장한 셔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마음이 편하지가 않네요. 제가 망쳐놓은 걸 대표님에게 넘기는 거 같아서.”
커피숍. 이제 더 이상 대표라는 수식언을 붙일 수 없게 된 김상인이 감회를 털어놓는다.
“아뇨. 자인은 기본이 탄탄한 회사입니다. 그런 회사를 낮은 가격에 인수했으니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죠.”
매년 적자를 내는 자인 기획. 무리한 인수라고 생각했던 차혜민도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성재호가 오랜 시간 조사해온 자인 기획엔 좋은 인재가 풍부했고 오랜 시간 쌓아온 시스템이 있는 회사였다.
정상운영을 위해서는 큰 규모의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그 방향에 대해서도 DNP의 수뇌부는 이미 구상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김상인과 이번 인수합병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분위기가 풀어졌을 때 난 생각했던 본론을 입에 올렸다.
“사실 광고업계에 저와 저희 회사를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광고업계에요?”
그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온다.
“황재평이라고…….”
“아. 성수 기획 대표 말씀이시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최근에 성수 기획 이야기가 좀 많더군요. 방식이 좀 많이 공격적이라고.”
업계인답게 그 역시 성수 기획과 황재평을 알고 있었다. 회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후 성수 기획은 황재평의 스타일로 바뀐 상태.
이미 전담 기획사를 가진 광고주에게 접근해 매수에 가까운 방식으로 영업을 하고 광고비를 후려치는 고약한 방식.
게다가 광고의 느낌도 바뀌었다. 경하나가 있었을 때만 해도 참신함을 앞세웠던 스타일은 이제 여기저기 뾰족하게 날이 선 느낌이었다.
“네. 얼마 전 EM 냉장고 광고도 그렇죠.”
얼마 전 백색가전의 쌍두마차인 신성 전자에서 기록적인 대용량 냉장고를 출시했다. 외관 크기는 그대로 둔 채 내부 용량을 천 리터까지 늘린 엄청난 물건이었다.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EM의 최고용량 980리터급의 아성에 큰 위협이 될 만큼. 그렇게 트렌드가 바뀌려는 찰나. 성수 기획에서 만든 EM의 광고가 전파를 탔다.
[천 리터 표기는 거짓말.]
신성의 신모델을 세트장으로 들여와 백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용량을 평가했고 그렇게 도출된 결과에 대해 광고는 무척 공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확인된 실 수납 용량 990리터.]
천 리터라는 상징성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신성 전자 측은 즉각 반박자료를 냈다. EM의 측정 방식에 분명한 문제가 있으며 자신들의 리터 표기는 공신력 있는 기관의 평가 결과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하지만 광고는 이미 전파를 탄 후였다. 많은 소비자들의 뇌리엔 거짓말이라는 인식이 틀어박혔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김상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좀 놀랐습니다. 상대 업체 비방은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는데.”
“과거엔 이런 일이 많았었나 보군요.”
“네. 그때는 무법천지, 정글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오랜 기간 업계에 몸담아본 자의 평가, 그건 차혜민으로서도 불가능한 광범위한 통찰이었다.
“성수 기획과 한번 붙어보고 싶습니다.”
자인 기획 인수의 또 다른 이유였다. 과거 DNP는 성수와 광고경쟁을 벌여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김상인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그럼 신성과 접촉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원했던 대답이 나왔다. 지금 신성전자의 EM의 어처구니없는 공격으로 인해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상태.
그리고 무법천지의 시대를 몸으로 겪어본 김상인은 최적의 대응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 대표님께서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DNP의 카피라이터로 말입니다.”
앞뒤 자르고 날아간 뜻밖의 제안, 김상인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