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25화 (125/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25화

125. 화려한 휴가(4)

“어머, 오셨어요?”

회사로 돌아왔다. 결혼 후 행복한 신혼생활 덕에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이미래가 반겨온다.

“얘기 들었어요. 휴가 동안 동생 뒷바라지하셨다고…….”

“하하. 네.”

“아쉽네요. 저라면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왔을 텐데.”

“다녀왔어요.”

“어디?”

“강릉.”

이미래가 날 향해 몇 번 눈을 깜빡인다. 하긴 늦은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이때 바다를 보러 가는 사람이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겠지.

아무튼 대표의 휴가에 관심들이 많았던 모양. 한 달간 내 동향은 이미 공유가 끝난 상태였다.

“매니저는 재미있던가요?”

“네, 생각보다는요. 그나저나 분위기는 좀 어때요?”

빛나던 이미래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별로예요. 중원 일로 새로운 광고주가 뜸하네요.”

예상했던 바다. 그래서 휴가를 선택할 수 있었던 거고.

“뭐 덕분에 좋아진 것도 있어요. 직원들 못 간 휴가도 좀 보내고 팀별로 워크샵도 한 번씩 했어요. 뭐 일에도 더 집중할 수 있어서 고객만족도는 확 올라간 느낌이네요.”

“좋네요.”

일감이 늘어나던 기세는 꺾였지만 확보해 둔 고객까지 등 돌리지는 않았다. 광고 부적합 판정이 쏟아질 때도 버텼던 회사였다.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양호하다.

게다가 모처럼 성장만 해온 DNP라는 조직은 누적된 피로를 풀고 결속을 다질 기회가 되었다.

한 달간 수장이 없던 회사지만 든든한 동료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그때 이미래의 책상 위 액자에 끼워둔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편안한 평상복 차림으로 한 소파 위에서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부부.

“신혼생활은 할 만해요?”

“아…….”

이미래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한다. 그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진다.

“어제도 술 처먹고 연락도 안 되더라구요. 짜증 나서 현관문 비밀번호 바꿔놨어요. 새벽 세 시에 기어들어 오길래 문 안 열어줬죠.”

“……네? 그럼 잠은 어디서?”

“아침에 보니까 차에서 자고 있더라구요. 지하주차장이 없어서 밖에 세워놨던데 개처럼 떨고 있는 거 보고 기분은 좀 풀렸어요.”

“…….”

마냥 달콤한 신혼생활은 아닌 모양이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향할 때였다.

“이야, 안 대표님!”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이세요?”

거긴 자신이 대표로 있는 애드온이 아닌 본사로 출근한 차혜민이 있었다.

“어쩐 일은? 안 대표 없는 동안 계속 여기로 출근했는걸.”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동료가 여기 또 있다.

“제로 스웨트 광고 봤어. 그 홍서희라는 애, 안 대표한테 단단히 찍혔나 봐?”

등을 맡길 동료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와 있었네?

“하하.”

난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준비 다 끝났어. 검토해 봤는데 성 팀장이 꼼꼼하게 챙겨놔서 더 손댈 건 없더라고.”

집무실에 마주 앉은 차혜민 그녀가 가방에서 파일철 하나를 내게 내민다. 제목부터 살폈다.

[자인 기획 인수합병 실사 보고.]

오랜 시간 추진해온 M&A가 이제 사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살피는 서류 속 성재호의 꼼꼼함이 느껴진다.

내가 직접 대표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했더라도 그 절반도 따라 하기 힘들 만한 꼼꼼함.

스륵, 스륵.

그래서 장을 넘길 때마다 입가엔 미소가 찾아들었다.

“김상인 대표도 만나봤거든? 조건에 대해서는 이견 없대. 다만 좀 빨리 진행했으면 한다던데.”

“사인 말인가요?”

“그래.”

차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 건 때문에 일정 많이 늦어졌잖아. 김 대표 많이 지친 상태더라고.”

난 휴가 기간 내내 고민했던 바를 입에 올렸다.

“합병 끝나고 김 대표 우리 쪽으로 영입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놀란 두 눈이 후욱 커진다.

“그럴 수 있다면 좋지. 자인같이 큰 회사는 단시간에 한 식구 되기 어려워. 김 대표가 짧게라도 이끌어준다면 우리 입장에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지.”

커졌던 눈매가 다시 가늘게 좁혀진다.

“당사자가 문제야. 김 대표가 거부할 텐데.”

그렇다. 김상인 대표는 오랜 시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온 사람, 원치 않는 최고 경영자라는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거기서 빼 달라고 아우성치는 자다.

“아뇨. 경영자 자리 말구요.”

“뭐?”

“카피라이터로 영입해 볼까 합니다.”

잔뜩 찌푸려지는 미간, 하지만 찡그린 표정은 이내 풀렸다. 내 속을 손바닥처럼 보고 있던 그녀답게 곧바로 의미를 파악한다.

“좋은 생각이야. 나도 김 대표 활동하던 세대는 아니라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 업계에선 나름 전설이었거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전설이라도 광고일 손 뗀 지 오래됐어. 뭣보다 자기가 대표로 있던 자인에서 부하직원이었던 애들하고 일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렇겠지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가 제안을 받을지 알 수 없지만 난 생각해온 바를 입에 올렸다.

“테스트를 한번 해볼까 해요.”

부연은 필요 없었다.

“좋은 아이디어네.”

이야기를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시게요?”

“그래. 애드온에서 빨리 오라고 난리네. 결재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대.”

그녀가 쓰게 웃는다.

“참 일정까지는 마무리해 줘야겠네. 사인은 언제 할래? 그쪽은 내일이라도 했으면 하는 눈치던데.”

“아…… 내일은 제가 일이 있어요. 모레 했으면 좋겠네요.”

“알겠어. 성 팀장한테는 그렇게 전달할 테니까.”

가방을 챙겨 든 그녀가 뒤돌아선다.

“모레 자인 기획에서 봐.”

“네.”

차혜민의 어깨 위 올라온 오른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미래, 차혜민 다음은 김다미였다. 밀린 결재 서류를 검토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고 있는데 퇴근 시간 무렵 김다미가 집무실로 쳐들어왔다.

“강릉 갔다 왔다면서요?”

회사에도 김다미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휴가 마지막 3일의 행적, 그걸 이미래한테 전해 들은 모양.

그런데 이상하다. 눈빛이 좀 날카롭다.

“어…… 그러긴 했는데.”

“누구랑요?”

“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혼자 갔어.”

“거짓말.”

“진짠데?”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한 손을 내 앞에 올려놓는다.

“증거요.”

“하하.”

난 허탈하게 웃으며 핸드폰에 찍은 사진을 찾아냈다. 혼자 다녀온 여행이지만 사진은 몇 장 찍었다.

조용한 식당에서 혼자 생선구이를 뜯는 모습, 넘실대는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강한 바람 덕에 지나치게 모발이 흩날리고 있는 사진.

대부분은 셀카였고 그래서 구도도 연출도 엉망이었지만 그걸 화면에 띄워 녀석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녀석이 슥슥 핸드폰 사진을 살피더니 그제야 날카롭던 표정을 푼다.

“혼자 뭔 청승이에요?”

“이야. 평가가 누구랑 똑같네?”

의미 모를 말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바짝 얼굴을 내민다.

“내일은 저랑 가요.”

난 멍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어딜? 강원도? 거길 또 가자구?”

“아니요.”

피식 웃은 녀석의 작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아주 식품이요. 거기 주한준 대표가 한번 보고 싶다고 난리예요.”

“아…….”

주한준, 젊은 인플루언서이자 지난 KJ와의 경쟁에서 나와 동맹 관계를 맺었던 내 편.

주한준에게 난 단지 광고 기획사의 대표가 아니다. 말하자면 고락을 함께한 우군. 광인 기획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광고를 맡겨온 그들이었으니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내게 조금은 섭섭함을 느꼈을 터.

“내일 오전은 안 돼.”

“왜요?”

“어…….”

난 잠시 할 말을 골랐다.

“내일 아침에 더 게이트 배우 인터뷰가 있거든. 거기서 임시 매니저로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

“배우 인터뷰에 매니저가 왜…….”

중얼대던 녀석이 뭔가를 깨달았다.

“아…….”

그러더니 혼자 뭔가 납득해 버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끝나고 오세요. 어차피 미팅 오후니까.”

“네. 그러겠습니다.”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며 그제야 박력 있게 책상을 짚었던 두 손을 거둔다. 몸을 돌려 빠져나가던 녀석이 뭔가 생각난 듯 뒤돌아본다.

“참,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네? 아니요?”

“그럼 저녁 시간 비워두세요.”

뒤돌아선 채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모습. 모델의 포즈를 연상시키는 자태로 한쪽 입꼬리는 들어 올린다.

“무사 복귀 기념으로 한턱 쏘죠.”

“네, 그럼 기쁘게 맞겠습니다.”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김다미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뭐야? 여기까지 매니저 달고 왔네?”

간만에 다시 만난 홍서희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참 놀라운 점 중 하나가 안주미는 절대 저런 식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차가 없어서.”

깊이 허리까지 숙이는 모습이 누가 봐도 착한 후배다. 홍서희와 함께 들어온 장진구가 둘 사이에 끼어든다.

“너 주미만 보면 이상하게 날카로워. 적당히 해, 적당히.”

“죄송합니다.”

구박받는 신데렐라에 빙의한 듯 이번엔 장진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워. 그러지 마.”

장진구가 휘휘 손을 내젓는다. 입가에 걸린 흐뭇한 미소가 제법 인상적이다.

“저쪽에 찌그러져 있어. 짜증 나, 진짜.”

“네에…….”

홍서희의 명령에 고개를 숙인 주미가 걸어간다. 촬영장에서 홍서희 뺨을 내려치던 모습과 다소곳한 녀석의 모습이 겹쳐져 머릿속이 무척 혼란스럽다.

오늘은 공중파 연예 프로그램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진행에 도가 튼 리포터가 인터뷰를 이끌었고 장진구와 홍서희에게 이어지던 질문은 가장 끝에 앉아 있던 안주미에게도 날아들었다.

“안주미 씨는 이번 영화가 데뷔작이라고 들었는데 첫 작품에 블록버스터 메인 조연이라니.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녀석이 부끄러운 듯 양 볼을 붉힌다.

“저한텐 너무 과분한 기회였어요. 대단한 선배님들과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구요.”

흐뭇하게 인터뷰를 바라보던 감독의 멘트가 이어진다.

“안주미 씨는 숨겨둔 우리 히든카드예요. 영화 속 모습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오, 그래요?”

리포터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네 사람을 비추던 카메라가 주미의 단독 샷을 비춘다. 홍서희의 얼굴이 점점 못마땅해진다.

“콜라보 광고에서 봤어요. 안주미 씨 연기력이 상당하던데요?”

리포터의 평가와 함께 분위기가 무척 화기애애해진다.

“참, 홍서희 씨는.”

그가 고개를 돌린다. 자신을 향한 질문에 인형처럼 눈을 깜빡이는 홍서희.

“그 장면, 좀 충격적이었어요. 막 찐득한 거 잔뜩 묻히고 펑펑 우시던 거.”

충격적인 광고 속 씬을 떠올리는 리포터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미안한데, 노코멘트할게요.”

홍서희의 정색.

매몰 씬은 홍서희를 고생시키기도 했지만 광고를 보는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녀만 보면 체액에 전 모습이 떠오른다는 댓글이 대부분.

좋았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녹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스태프와 홍서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누었고 겨우겨우 녹화를 마칠 수 있었다.

“극장 개봉 전에 무대인사 있을 거니까 그때 봅시다.”

감독이 먼저 자리를 떴고.

“주미 씨, 저랑 잠깐 얘기 좀.”

신데렐라 동생을 바라보는 착한 오빠 얼굴로 장진구가 안주미를 데리고 나갔다.

남은 건 나와 홍서희뿐.

“야.”

역시나 그녀가 손가락으로 날 부른다.

“매니저면 담당 연예인 하는 짓도 통제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너 촬영장에서 쟤가 나한테 하는 거 봤어, 못 봤어?”

“봤습니다.”

“하. 봤어? 보고도 그냥 있었어?”

기가 막힌다는 듯 양손을 허리에 붙이는 홍서희, 그리고 힘없는 학생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일진처럼 고개를 비튼다.

“얼굴 좀 보자. 얼마나 잘났길래 그렇게 꼭꼭 감추고 다녀?”

삐딱한 시선이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진 내 얼굴을 훑는다.

“가만. 너 전에 나랑 어디서 보지 않았어?”

그녀의 손이 모자챙에 닿으려는 순간.

화악.

내가 먼저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마스크도 치워 버렸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홍서희에게 드러난 나의 정체. 삐딱하던 시선이 그대로 얼어붙는다.

“아…….”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더듬대는 목소리.

“홍서희 씨.”

“……안 대표님? 대표님이 왜? 언제부터?”

“처음부터요.”

딛고선 다리가 휘청인다. 비틀대며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는 그녀를 아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왜?”

“안주미가 제 동생이거든요.”

“아…….”

입에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홍서희 씨 본모습 아주 잘 봤습니다.”

비틀거리던 걸음은 조금 전 인터뷰를 위해 설치된 의자까지 이어졌다.

덜컥.

의자에 부딪힌 그녀가 의자 위로 무너져 내렸고.

“광고 모델 이미지는 광고주에게 무척 중요하죠. 서희 씨 본모습, 앞으로 광고 만드는 데 큰 참고가 될 것 같네요.”

이 자리에 참석한 목적이었다. 광고모델로서 홍서희의 가치는 향후 무에 수렴할 것이다. 응당한 처벌을 내리고 돌아서 걸어가는 걸음.

“자, 잠깐만요.”

뒤에선 영혼 없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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