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24화
124. 화려한 휴가(3)
“하기로 했다고, 그걸?”
놀란 안주미가 묻는다.
“그래.”
“대단하다. 아무리 전속모델이 탐나도 그렇지.”
제로 스웨트 전속이 탐난 건 맞지만 홍서희가 매몰 씬을 오케이 한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안주미 씨라면 쉽게 오케이 할 거 같은데. 그렇게 되면 이번 콜라보의 주인공도 저쪽으로 넘어가겠지만…….’
홍서희의 결심을 촉구하기 위해 던졌던 말, 그게 보기 좋게 결정타로 작용했다.
자신의 존재가 동기가 되었다는 말을 동생에게 전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홍서희가 상대역일 때마다 지나치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으니까. 그래서 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집어삼켰다.
“꼭 모델이 탐나서 그런 거 아니야. 나름 이유 있는 결정인 거지. 이번 광고로 연기 스펙트럼이 넓힐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굳이 그쪽까지 넓힐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핵심을 꿰뚫는 안주미의 지적에 난 말 없이 웃어버렸다.
며칠 후 제로 스웨트 광고 컷 촬영이 있었다. 그 자리엔 안덕모가 아닌 안주미의 매니저로서 현장에 참석하게 되었다.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스태프들로부터도 제법 멀리 떨어진 채였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현장 모습을 직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촬영장에 거대한 괴수가 등장했다.
정확히는 영화 등장인물들에게 공격을 당해 몸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는 괴수의 사체. 특수효과팀에서 혼신을 다해 만들어낸 거대 괴수의 사체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정교했다.
세트장엔 무너진 건물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 분장을 마친 홍서희가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몸 위로 건물 잔해가 얹히고 그 위로 크레인 줄에 매달린 거대 괴수의 사체가 옮겨지기 시작했다.
자칫 배우가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작업, 세트장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됐다. 서희 씨 괜찮아?”
“……아 네.”
배우와 괴수의 세팅이 끝났다. 하지만 촬영은 이제 시작. 특별히 제조된 괴수의 체액이 준비된 배관을 따라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소품들이 자리를 잡았고 마지막으로 분위기를 좌우하는 조명이 미세 조정되기 시작했다.
레일을 따라 카메라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고.
“레디, 액션!”
감독의 신호가 떨어졌다.
* * *
촬영은 끝났다. 사실 끝난 건 안주미의 촬영분일 뿐이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역할인 까닭에 녀석의 촬영 분량은 예상보다 빠르게 끝났다.
안주미가 없어도 더 게이트의 촬영은 계속된다. 촬영이 끝나면 효과와 CG 작업이 시작된다. 영화 개봉은 빨라야 올봄.
아무튼 임시 매니저 역할이 끝나서 난 3일의 완벽한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후련하냐?”
“에효. 생각보다 힘들더라.”
소파와 한 몸이 된 채 녀석이 중얼거렸다.
“고생했다. 이 몸은 삼 일간 사라질 테니까 굶지 말고 쉬고 있어라.”
“어디가?”
“겨울 바다.”
기껏 한 달이나 휴가를 내놨는데 동생 뒷바라지로 끝낼 순 없다. 남은 삼 일은 날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다였다.
“이 추운 날?”
안타깝게도 현재 기온은 영하 10도.
“혼자서 뭔 청승이야? 나라도 같이 가줘?”
“됐다.”
한 달간 지겹도록 봤으면 됐다. 혼자 밥 먹기가 제법 쓸쓸하겠지만 이렇게 혼자 떠나볼 기회가 언제 또 있겠어?
“숙소는 잡았고?”
“모텔이나 그런 데서 대충 자면 돼.”
“어이구…… 뭔 회사 대표가 그래?”
녀석이 무척 한심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궁상이야, 궁상.”
“시끄럽다. 쉬어라.”
“올 때 오징어 좀 사 오고.”
무심한 인사를 받고 짐을 챙겨 차에 올랐다.
부응.
무작정 동해안으로 향하는 차 안. 적적함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온다.
[지난달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광배 회장의 칩거가 길어지며 중원 자동차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레기온의 판매 부진에 이어 출시 예정된 신모델들의 줄줄이 출시가 연기된 상태입니다. 결국 어제 기준 중원 자동차 시가 총액이 사상 최저치를 경신한 가운데 총수의 공백 상태가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중원은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쓰레기온 사태를 필두로 중원 차에 쏟아지던 비난과 질책은 어느새 많이 잦아들었다.
중원은 대한민국의 대표기업, 대표기업이 흔들리니 이광배 재등판 여론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
탁.
라디오를 껐다. 차 속도를 늦추고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은 아찔할 정도로 차갑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지고 차 안의 잡동사니가 이리저리 날아다녔지만.
부웅.
난 한동안 창문을 열어둔 채 평일이라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렸다.
3일간 나 홀로 여행.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 묶는 숙소는 적적했다. 맛집으로 알려진 곳엔 사람이 너무 많아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혼자 먹는 밥맛은 그저 그랬고 조금 쓸쓸했다.
그래도 겨울 바다는 좋았다. 파도는 사람 높이만큼 높았고 그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질 때 강한 생명력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손에 든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인적 없는 해변에서 바다를 보았고, 머릿속엔 정리되지 않았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영화를 좋아했던 학생.
광고가 좋아서 내 손으로 만들고 싶어서 선택했던 길.
그 과정에서 생겨난 악연, 그 악연을 이겨내며 걷고 있는 경영자의 길.
DNP는 어느새 소속 직원 수백에 이르는 회사가 되었다. 우린 칸에서 대상을 수상한 회사고 공중파 방송을 통해 능력을 입증했다. 또 중원이라는 거대 공룡의 압박에서 스스로를 지켜냈다.
이젠 그 누구도 DNP를 힘없는 신생회사라 부르지 않는다.
곧 자인 기획이라는 대한민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회사를 인수 합병한다. DNP와 자인 기획이 하나가 되고 거대해진 조직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우린 P&S나 애드토탈에 어깨를 견줄 만한 초대형 기획사가 될 수 있다.
그 엄청난 회사를 이끄는 안덕모. 이미 집무실을 쓰고 있는 것처럼 나와 실무자들 간의 거리는 더 멀어질 것이다. 계속되는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중요한 결정 사항에 사인만 해도 24시간이 부족해질 것이다.
휴가를 떠나기 전 차혜민 대표는 말했다.
‘슬슬 전담 비서가 필요하지 않을까?’
경영자 안덕모.
난 지금보다 더 큰 예우를 받을 것이다. 내 소유의 지분 가치는 계속 상승할 것이고 엄청난 연봉, 손발을 편하게 해줄 전담 비서, 그리고 품위를 유지해 줄 고급 세단과 직원들의 존경도 받을 것이다.
‘그럼 만족해도 되는 걸까?’
파도와 파도가 합쳐져 더 큰 파도를 만들어냈다. 거대한 파도는 멀리 방파제를 때렸고 충격으로 높게 치솟아 오른 물줄기가 방파제로 이어진 길 위에 쏟아져 내렸다.
‘안 대표님은 광고가 재미있어요?’
자인 김상인 대표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목소리가 신호가 되어 아주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낸다. KJ식품에서 사표를 던졌을 때 날 불러낸 선배에게 했던 말.
‘광인 기획이요. 거기서 광고를 만들고 싶어요.’
선배는 내게 미친놈이라 했다.
촤아악.
귓가에 다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상념에서 벗어났다. 바다로 향했던 시선은 내가 밟고 선 곳으로 향한다. 하얀 백사장, 발치에 주먹만 한 조개껍데기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색 조개껍데기를 집어 들었다, 이건 원래 바다에 있던 거다. 거친 파도에 휩쓸려 여기까지 휩쓸려 왔겠지.
휘익.
멀리 그걸 던져 버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껍데기를 파도에 삼켜 버린다.
“후우…….”
생각의 정리는 끝났다. 돌아서 걸어가는 내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 *
아주식품 제로 스웨트 광고 시사회장.
“아우, 떨려.”
시사를 맡은 주희정이 어깨를 움츠렸다. 윤재원은 회의실에 비치된 음료 중 적당한 것을 골라 그녀 앞에 올려놓았다.
“고마워요, 선배.”
윤재원이 피식 웃는다.
“뭘 떨고 그래? 주희정답지 않게.”
김다미 팀장은 오늘 다른 시사가 있다. 덕분에 처음으로 광고 시사 메인을 맡게 된 주희정.
“제가 어떤데요?”
“알코올 중독, 막무가내 불도저.”
주희정의 눈이 몇 번 깜빡인다.
“……심하다. 말로 사람 패기 있어요?”
“그러니까 떨지 말라고.”
“와, 너무하네.”
하지만 다음 순간 떨림은 잦아들었다. 주희정다운 자신감이 무럭무럭 차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주희정은 첫 시사회를 아주 잘 이끌었다. 아주식품 대표가 배석한 자리였지만 적당한 농담까지 섞어가며 시사회 분위기를 리드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제로 스웨트 더 게이트 콜라보 광고 보시겠습니다.”
영상이 시작되었다. 타이밍에 맞추어 회의실 조명이 꺼지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한 곳을 노려보는 눈빛들만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공중에서 촬영된 수도 서울의 모습이 화면에 펼쳐진다.
쿠궁.
[인구 천만 대도시 서울.]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나타나는 문자들.
오늘도 바쁜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추어 선다. 그때 누군가 허공을 가리킨다.
“저게 뭐야?”
[서울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돔.]
“어?”
[그곳에 지옥문이 열린다.]
“도망쳐!”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으악!”
“꺄악!”
“이거 놔!”
시민들의 아비규환이 펼쳐진다. 화면은 이제 우리가 알던 서울이 아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거대한 돔, 무너진 빌딩, 연기를 내뿜는 자동차가 초록색 피부의 괴생명체의 발에 짓밟힌다.
콰직.
인간들의 도시를 점령한 괴수들.
“우리가 이길 수 있어요! 저것들도 생물일 뿐이라구요!”
자신을 향한 사람들에게 소리치는 남주인공이 등장하고.
“죄송해요……. 저 이 세상이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대미문의 사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여주인공의 고백이 들려온다.
[도망칠 곳은 없다.]
쿠궁.
이제 화면은 초 단위로 바뀌기 시작한다. 괴수의 발치로 돌격하는 화물차, 소방 도끼를 휘두르는 주인공, 문을 부수고 밀려드는 소형 괴수.
괴수가 장악한 주유소를 향해 바이크를 내달리는 남자가 외친다.
“죽어어!”
[저항하라!]
[처절하게 몸부림쳐라!]
쿠궁.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빠르게 지나가던 화면이 멈춘다. 느려진 화면에 등장하는 안주미.
“지수야!”
쓰러진 괴수 아래 매몰되었던 여주인공. 그녀가 생존자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몸을 빼낸다. 온몸을 덮은 진득한 체액, 괴수 아래 용케 확보된 공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녀가 괴수의 진득한 체액을 뒤집어쓰고 등장한다.
완벽하게 망가진 모습, 여배우가 보여주기 힘든 처절한 모습.
“너 괜찮아?”
안주미가 물었고.
“아…… 어.”
넋이 나간 대답이 들여온다.
“마셔.”
주미가 캔을 내민다. 잔뜩 찌그러지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캔, 자연스레 노출되는 제품명.
[제로 스웨트]
홍서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죽음의 경계 앞에서 어렵게 다시 얻은 삶.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돔으로 격리된 세상이고 그녀가 알던 세상이 아니다.
다시 찾아올 죽음의 위협,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삶.
“흐아앙.”
서러움이 터진다. 체액에 범벅이 된 몰골로 오열을 터트리는 모습에 동료들이 숙연해진다. 홍서희와 생존자들을 비추던 화면이 천천히 멀어지고.
떠오르는 헤드카피.
[뜨겁게 생존하라]
[제로 스웨트 X 더 게이트]
“흐허엉!”
홍서희의 오열이 서럽게 울려 퍼진다.
[제로 스웨트, 더 게이트, 콜라보 CF 40초.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