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23화 (123/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23화

123. 화려한 휴가(2)

“감독님, 그 장면 빼주세요.”

촬영된 장면을 모니터링하던 감독의 고개가 휘익 돌아간다.

“서희 씨…… 왜 또 그래? 벌써 얘기 끝난 거잖아.”

미지의 돔에 둘러싸여 붕괴하는 도심, 그 안에서 투쟁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더 게이트엔 극단적인 씬들이 등장한다.

극 중 게이트에서 나타난 괴수들은 도시를 부수고 인간을 짓밟으며 먹이로 삼는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캐릭터들은 더러워진 옷을 걸친 채 구정물을 퍼먹고 때론 한 조각 식량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당연히 깨끗한 얼굴로 등장하는 인물은 없다. 그중 특히나 여배우가 꺼릴 장면들도 있었으니.

“꼭 제가 그 밑에 깔려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장면 살리고 싶으시면 저기 안주미도 있고, 조연들도 많은데.”

바로 매몰 씬. 생사의 혈투 끝에 인간의 손에 사냥당한 괴수가 여주인공 위로 쓰러지는 바람에 벌어지는 이번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씬이다.

“저 이미지 관리해야 돼요. 이번 작품 끝나고 바로 드라마 들어가요. 또 제로 스웨트 광고도 찍어야 한단 말이에요.”

“안 돼. 진작 얘기 끝난 거잖아.”

“아, 감독님!”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괴수와 함께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그것도 모자라 진득한 체액까지 온몸에 묻혀야 하는 씬,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여배우에게 달가울 리 없을 터.

하지만 경우 없다. 그녀가 그런 씬이 있었는지 몰랐을 리 없으니까.

“출연 조율할 때 확실하게 말을 하던가. 그 씬 찍는 대가로 개런티도 추가로 받았잖아. 촬영 중에 이러는 거 계약 위반이야. 알아?”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던 감독이 정색을 한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홍서희.

“짜증 나! 진짜.”

그녀가 세트장 바닥을 쿵쿵 찍으며 물러난다.

“와…… 쟤는 진짜 안 되겠다.”

보면 볼수록 양파 같은 인간이다. 저 홍서희라는 배우.

“그렇다니까? 진짜 답 안 나오는 캐릭터야.”

주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도와주겠다고 할 때는 됐다더니 촬영을 빌미로 홍서희를 막 대하는 짓이 조금 이해가 갈 지경

“야. 이리로 온다.”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바닥을 쿵쿵 찍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홍서희. 다짜고짜 걸어오더니 내 어깨를 화악 밀친다.

“왜 길을 막아? 짜증 나, 진짜.”

누가 길을 막아? 아무리 둘러봐도 여긴 사방이 훤히 뚫린 공간이다. 이건 그저 만만한 자에게 터져 나온 짜증일 뿐이다.

“아니…… 하하.”

어이없는 분풀이에 화가 나기보다는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저런다니까? 지보다 인기 없으면 막 대해도 되는 줄 아는 애야. 스태프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대. 인간이 글렀어, 쟤는.”

쯧쯧 혀를 차는 안주미의 목소리에 난 방식이 고약해서 실행을 망설이고 있던 그것을 행동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 * *

며칠 후 남양주 촬영장을 다시 찾았다. 몇 번이나 와서 아주 익숙한 촬영장이었지만. 모자도 벗고 마스크도 벗은 탓에 단숨에 날 알아본다.

“아. 안 대표님!”

감독의 외침에 수십 개의 시선들이 날 향한다. 느슨했던 촬영장의 긴장이 화악 당겨진다.

준비에 한창인 배우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날 향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휘휘 손을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는 홍서희도 보인다.

“와. 이런 데서 여태 안 들켰다고요?”

내 뒤를 따르던 김다미의 중얼거림.

“무명배우 매니저를 누가 눈여겨보냐?”

지금 난 신인배우 안주미의 매니저가 아닌 DNP의 대표. 그래서 대우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아이고. 그냥 부르시면 되지 뭐하러 누추한 곳에 직접 오십니까?”

감독은 한달음에 내게 달려왔다.

“직접 보고 싶어서요. 저 영화 정말 좋아하거든요.”

“하하.”

기분 좋게 웃던 감독이 목소리를 죽인다.

“주미 씨 연기가 정말 좋습니다. 빈말이 아니에요. 저도 볼 때마다 놀라고 있어요.”

내가 굳이 촬영장을 찾은 이유가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저 멀리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분장을 받고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눈이 마주쳤고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 표정을 말로 하자면.

‘재미있냐?’

정도가 되겠다.

“일단 앉으시죠.”

“네. 그럽시다.”

난 이번 영화의 주 협찬사인 아주식품의 대리인이 되어 감독의 지시를 받은 스태프들이 마련해 준 테이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대표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런가요? 못 본 새 더 예뻐지신 거 같아요, 홍서희 씨는.”

“아이,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해온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녀와의 거리도 지나치게 가까워진 채였다.

난 그녀와의 적당한 거리를 벌리는 쪽으로 의자를 고쳐 앉았다.

“저 대표님이 찍어주신 광고로 이만큼 온 거예요. 저번에 칸에서 대상 받으신 거 보고 너무 기뻤다니까요? 근데 이렇게 또 만나잖아요. 이거 운명인 거 같아요.”

간도 쓸개도 다 빼놓은 듯한 소리에 오소소 닭살이 올라온다. 진심이라도 싫고 연기라면 그건 그것대로 소름 끼친다. 난 필사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숨겨야 했다.

“서희 씨가 열심히 해서 잘된 겁니다. 이번 광고도 엄청 중요한데 한 번 더 잘해줄 수 있지요?”

“당연하죠. 대표님 얘기라면 전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그 속 모습을 모른다면 누가 봐도 천사의 모습이다. 안주미의 매니저로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

혐오, 멸시, 증오와 비웃음.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 벌레 보듯 하던 날 내려다보던 얼굴은 빛이 날 만큼 화사한 미소를 그려내고 있었다.

“자, 그럼 슬슬 얘기를 시작해 봅시다.”

난 테이블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더 게이트와 제로 스웨트의 콜라보를 위해 얼마 전 아주식품을 찾았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조성록 부장은 내게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주한준 대표님 영화 취미가 좀 특별하시거든요. 괴수 영화 좋아하시고, 막 세상 멸망하는 내용도 즐겨 보시고.”

인플루언서 주한준 대표의 독특한 영화 취향. 그 덕에 이번 콜라보가 전격 추진된 거였다. 그래서 대략의 설명이 끝났을 때 조 부장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 제품 가치가 잘 드러나도록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주한준 대표의 부탁은 내 꿍꿍이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하겠노라 약속했다.

“설명 들으셨겠지만 첫 번째 광고가 이번 달 안에 나가야 합니다. 내용의 대부분은 더 게이트의 핫클립을 따와서 채워 넣을 거고.”

김다미가 실무자 미팅을 하는 동안 이번 영화 핵심인물들이 따로 한자리에 모였다.

감독과 제작사 대표 그리고 더 게이트의 주연인 홍서희가 둘러앉은 자리에서 난 이번 광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메인 컷입니다.”

이번 콜라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제로 스웨트의 TV 광고.

광고의 촬영 중인 더 게이트의 핫클립과 제품에 맞춘 메인 컷으로 채워질 것이다.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 만들어낸 완성도 높은 CG, 폐허가 된 서울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영상에 등장하는 제로 스웨트의 모습은 대중의 이목을 한 번에 사로잡을 것이다.

두 번째는 영화 속 제품의 노출.

PPL의 본래 의도인 극 중 제품 노출을 통해 광고 효과를 노린다. 강력한 생존수단으로 제품이 등장한다면 그 효과가 증폭됨은 당연한 것이다.

이번 광고 건은 PPL과 영화 제작사의 마케팅이 전략적 제휴를 맺는 제법 규모 있는 콜라보레이션이었다.

제작사 쪽 담당자가 입을 열었다.

“네. 메인 컷을 따로 촬영해서 제공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간단하게 콘티를 잡아봤는데.”

그가 준비해 온 서류를 내게 내민다.

[제로 스웨트 메인 컷 연출안.]

제목 하엔 영화 제작사가 생각한 제로 스웨트 연출 컷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반파된 도시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아스팔트에 쓰러진 괴수가 있고 그 위를 주인공인 장진구와 홍서희가 밟고 올라선 그림.

등을 맞붙인 채 카메라를 노려보는 남녀 주인공의 손에 제로 스웨트가 쥐어져 있다. 그리고 괴수의 아랫부분에 새겨진 이번 영화의 홍보용 카피.

[게이트가 열린 서울, 처절하게 생존하라.]

“어떻습니까?”

“으흠.”

준비성은 좋다. 하지만 난 턱을 슥슥 매만지며 자료를 내려놓았다.

“나쁘진 않지만 광고주가 원하는 이미지는 아니네요.”

“아. 그런가요?”

제작사 담당자가 아쉬운 입맛을 다신다.

그들이 보여준 건 전형적인 홍보용 컷이다. 이번 영화의 포스터로 쓰면 무난하게 좋을 만한.

그리고 나도 광고주인 주한준 대표도 멸망의 절박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런 식의 장면 연출을 원하지 않는다.

“저희는 좀 더 처절하고 절박한 장면을 원합니다.”

돌아간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감독이 물어온다.

“시나리오 검토는 하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거기 쓸 만한 장면이 있던가요?”

“네. 있습니다.”

영화 씬 중에서 원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가 편해진다. 제작자가 금세 환해진 얼굴로 물어온다.

“잘됐네요. 어떤 건가요?”

“여주인공 매몰 씬입니다.”

“……매몰 씬이요?”

미간을 찌푸린 감독이 되물었고.

“매몰 씬이라면 그?”

홍서희의 얼굴에 내내 유지되던 천사의 표정이 박살 났다.

* * *

“서희 씨.”

“네, 대표님.”

“지금은 평면적인 캐릭터로 어필하기 어려운 시대예요.”

“…….”

“예쁘고 착한 이미지만 가지고는 경쟁력이 없다는 거예요. 서희 씨도 알잖아요?”

“네, 알죠.”

조금 전 매몰 씬 이야기에 여주인공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영화에 나오는 건 계약 사항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콜라보 광고 장면을 위해 그 장면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결국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그래서 그녀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

홍서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K-콘텐츠의 성장을 배경으로 대한민국 배우들도 바뀌고 있다. 때론 헬스로 벌크업을 한 여배우가 관심을 휩쓸기도 하고 소름 끼치는 악독한 연기를 펼친 배우가 찬사를 받기도 한다.

물론 매몰 씬같이 이미지가 망가지는 역할을 한 경우는 생각나지 않는다만.

“이번 일,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한 방에 넓힐 수 있는 기회예요. 뭐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 올라온다.

“제로 스웨트, 수십 년간 아이돌 써서 청량한 이미지로만 광고해온 제품이에요. 매몰 씬 정도 되는 파격이 아니라면 아주식품 입장에서 굳이 콜라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리고 듣자 하니 이번 콜라보에 전속 여부도 달려 있는 모양이던데?”

“네, 맞아요.”

“뭐 저도 비주얼이 충격적이라는 건 동의해요. 일종의 도박이죠. 똑같이 충격적인 장면이라도 영화관에서 보는 거랑 안방 TV로 보는 건 파급력이 다르니까.”

자신의 고민을 이해해주는 기획사 대표, 홍서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린다.

“그래서 결정은 서희 씨가 해야 해요.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우린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 수도 있어요.”

“다른 방식이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네. 안주미라는 배우도 괜찮더군요. 연기 되고 비주얼 괜찮고 결정적으로 서희 씨보다 인지도가 낮으니까 쉽게 오케이 할 것 같은데.”

떨리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한다. 난 변하기 시작하는 그녀의 마음에 한 번 더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되면 콜라보 주인공도 저쪽에 넘어가겠지만 난 이번 일은 누구보다 서희 씨의 결정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의도는 통했다.

“아뇨.”

어느새 단호해진 목소리.

“제가 할게요.”

“그래도 되겠어요?”

“네 할 수 있어요. 아니, 하고 싶어요, 대표님.”

분명 도박이라 말했다. 예상되는 리스크도 충분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질투에 눈이 멀어 걸지 말았어야 할 패에 전 재산을 걸었다.

“네. 좋습니다.”

그래서 내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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