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22화 (122/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22화

122. 화려한 휴가(1)

남자 주인공 장진구의 도착을 끝으로 모든 출연자가 모였다.

배우들의 분장과 촬영 준비가 시작되었고 점심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마침내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100억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더 게이트. 영화의 메인 스토리는 서울 핵심적인 중심가가 정체불명의 돔에 의해 차단되고 그 안에 열린 게이트를 통해 미지의 세계에서 날아온 크리처들과 인간의 사투였다.

이곳 남양주 촬영장은 특수효과가 들어간 씬을 찍기 위해 온통 블루 스크린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

배우들이 약속된 장소에 자리를 잡았고 카메라 감독은 지미집 위에 올라 허공에서 천천히 현장을 비추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났고 감독의 사인이 떨어진다.

“액션!”

드디어 안주미의 첫 번째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주눅 들었던 안주미의 얼굴이 돌변한다.

번쩍.

촬영장 한편에서 강력한 조명이 밝혀지고 동시에 강풍기에서 불어온 바람이 출연자들을 덮친다.

바람과 함께 날아오는 잡동사니들. 극 중 인물의 당황을 제대로 표현한 얼굴로 안주미가 첫 번째 대사를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녀석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킨다. 특수효과가 없어 그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떨리는 손가락 끝은 마치 거기 뭔가가 있다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충격적인 상황, 표현할 수 없는 현실에 떨리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지…… 지수야, 도망쳐야 돼.”

녀석이 홍서희를 이끈다. 넋을 잃은 홍서희가 녀석의 손에 끌려갔고.

턱.

그때 의도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쿠당.

“아야!”

안주미의 힘에 이끌린 홍서희가 촬영장 바닥 조형물에 걸려 뒤로 쓰러지며 나뒹굴었던 것. 엔지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홍서희는 쓰러진 자세 그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나…… 나 다리에 힘이 없어.”

“나한테 기대!”

안주미가 홍서희를 한쪽 팔을 목에 두른다. 그리고 자꾸만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여주인공을 이끌고 멀어진다.

“오케이, 컷!”

첫 번째 씬 촬영이 끝났다.

“괜찮아 서희 씨?”

감독이 물었고.

“아. 괜찮습니다, 감독님.”

홍서희가 천사 같은 미소로 답했다.

“다행이다. 서희 씨 넘어지는 장면 너무 잘 살았어. 주미 씨 연기도 정말 좋았고.”

“감사합니다.”

안주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자, 자. 다음 씬 바로 들어갑시다. 장진구 씨 준비됐나요?”

짝짝 박수를 치며 감독이 멀어졌다. 짧은 순간을 난 놓치지 않았다. 자신에게 미안하다 고개를 숙이는 안주미를 내려다보는 불타오르는 눈빛. 그것이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음.”

먼발치에서 현장을 바라보는 내 입에선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점심 식사 후 촬영이 이어졌다. 안주미는 신인답지 않게 노련한 연기를 이어갔고 그때마다 감독과 스태프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언젠가 감독의 약속처럼 조연이면서도 안주미의 등장 씬은 제법 많았다. 좋은 연기력을 가진 신인을 위해 대본이 수정된 건 확실해 보였다.

덕분에 안주미는 분장실과 촬영장을 계속 오가야 했고 난 촬영장을 눈에 담으며 개인적인 욕심을 양껏 채우고 있었다.

그때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누구 매니저셔?”

“아. 안주미 씨 매니저입니다.”

“누구? 아 안주미?”

몸에 쫙 달라붙는 하얀색 티셔츠, 겨울인데도 살짝 올라간 소매 아래 선명한 문신이 눈에 들어온다.

“저런 쌩신인한테도 매니저가 붙나? 첫 작품인데 등장 씬 많이 받았다더니 진짜 뭐 있나 보네?”

그의 한쪽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간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모자에 마스크까지 쓴 채여서 비웃음이 보이진 않았겠지만.

그래서 난 표정을 감춘 채 점점 선을 넘는 그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었다.

“마침 잘됐네. 아까 봤지?”

이제는 숫제 반말투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 어린것 같은데.

“안주미 말이야. 집합 시간 늦은 것도 기가 차는데 개 때문에 서희 씨 넘어졌잖아.”

연기자도 인성이 별로고 매니저도 똑 닮았다. 가만 저것들도 오누이 뭐 이런 건가?

“앞으로 조심하라고, 안주미한테도 주의 좀 시키고. 앞으로 촬영 계속 있는데 이러면 서로 피곤하지 않겠어?”

그가 반말을 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 많은 촬영 현장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연기자의 인지도는 매니저간 우열을 결정한다.

홍서희는 인기 배우, 주미는 신인이니 이런 식의 하대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난 분명 말했다?”

턱.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 멀어진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거만하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 * *

“후아, 힘들다.”

“고생했다.”

하루 종일 이어진 촬영은 날이 저물고서야 끝났다. 난 보조석에 앉는 주미에게 준비해 온 커피를 건넸다.

“언제 사 왔어?”

“뭐. 남는 게 시간이더라.”

“땡큐.”

짧은 대답과 함께 녀석이 미지근해진 커피로 목을 축인다.

“주미야.”

난 녀석을 나직이 불렀다.

“왜?”

“홍서희 말이야.”

“아…….”

녀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각한 아침 스태프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 연기자를 꾸짖던 모습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홍서희는 말했다.

-너 저번에도 한 번 경고했지?

크랭크인 들어가기 전 사전 미팅과 대본 리딩에서 녀석과 홍서희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업계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만한 신인이라고 생각하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치기 어린 행동들.

“계속 이럴 거 같은데……. 조치를 취했으면 하거든?”

“조치? 어떤?”

녀석이 동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본다.

“감독한테 말할 수도 있고, 홍서희 소속사가 어디더라? 아 범일, 거기다 말할 수도 있고.”

영화계는 아니지만 광고 기획사의 대표라는 자리는 결코 연예인이 만만히 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연예인은 평판으로 먹고사는 직업, 소문이 빠른 광고업계에 나쁜 소문이 퍼졌다가는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광고 한 편 못 찍고 은퇴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난 칸 광고제를 휩쓴 DNP의 대표다. 뭐 지금은 DNP보다 안덕모라는 이름이 더 알려진 것 같긴 하지만.

“방법은 많아. 단순한 경고로 입을 다물게 할 수도 있고 맘먹으면 이번 작품에서 아예 빼버릴 수도 있어.”

농담이 아니다. 이번 영화의 감독은 차혜민은 은인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하루 촬영을 해버렸지만 더 게이트의 마케팅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배우를 캐스팅해서 재촬영에 들어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일정 지연과 손실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줘야겠지만.

“말만 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놀란 녀석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원하면 해줄 수 있다. 그래야 할 이유는 확실하고 내겐 그 정도의 힘도 있다.

“아니, 그러지 마.”

하지만 의외의 답변이 되돌아왔다.

“왜?”

“……유치하잖아. 홍서희 걔가 날뛰는 것도 유치하지만 너 그러는 것도 똑같은 거 같은데?”

“허…….”

조금 놀랐다. 하다못해 경고 정도는 해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나 안주미야, 안주미.”

녀석의 얼굴에서 신인배우의 공손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아는 되바라진 동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까 홍서희 넘어진 거, 과연 실수였을까?”

“…….”

잊고 있었다. 이 녀석은 점쟁이가 우백호라 했던 녀석이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에 난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 * *

더 게이트 촬영은 계속되었다.

때론 세트장에서 때론 야외에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야. 담배 좀 사 와라. 너도 하나 사고.”

가끔 홍서희의 양아치 매니저가 짜증 나는 일을 시켜오곤 했지만 참아 넘길 수 있었다.

“지수야, 정신 차려!”

쫘악.

큰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 안주미의 손바닥. 그 손바닥이 홍서희의 뺨을 후려갈겼다. 극 중 크리처의 공격으로 정신을 잃은 여주인공을 정신 차리게 하는 씬이지만 안주미가 투혼을 활활 불태워 버린 것.

뭐 양아치 매니저가 짜증 나게 해도 가끔 보는 저런 모습이 충분히 보상이 된다. 뭐 촬영 끝나면 홍서희한테 또 한 소리 듣겠지만 이제 나도 주미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어…… 우와.”

고개가 크게 돌아갈 만큼 강력한 타격에 영상을 모니터링하던 감독의 입에서 정체불명 탄식이 흘러나온다. 잠시 후 벌게져서 좀 부어오른 볼을 한 채 홍서희가 다가왔다.

“서희 씨! 이번 씬 너무 좋았어. 어? 피 난다. 코피.”

넘어지고 두들겨 맞을 때마다 최고의 씬이 나온다. 그러니 홍서희 입장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야…… 좀 살살.”

난 촬영장에 우뚝 선 채 홍서희를 보며 미소 짓는 안주미에게 열심히 사인을 보냈다.

촬영이 매일 있지는 않았다. 하루 촬영을 하면 다음 날은 쉬는 패턴이었고 덕분에 난 임시 매니저의 역할을 하면서도 본연의 휴가를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늦은 산책을 하고 식사를 하고 돌아와 모처럼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 정주행을 시작했다. 고막을 때리는 웅장한 OST의 선율에 온몸을 맡기고 있을 때였다.

우웅.

기막히기 진동하는 핸드폰, 발신자를 확인하니 김다미다.

[죄송해요. 쉴 때는 연락 안 하려고 했는데.]

“어…… 영화 보고 있었는데 몰입이 딱 깨졌어. 괜찮아, 뭐. 급한 일이라서 전화했겠지.”

[어…….]

전화기 너머에서 곤란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농담이야. 뭔데?”

[영화 PPL 건인데요.]

“PPL?”

극 중 제품을 배치해 자연스러운 노출 효과를 노리는 오래된 광고기법.

혹자는 PPL 하면 드라마를 꼽지만 사실 훨씬 규모가 큰 건 영화 쪽이다. 집 안에서 가정용 TV를 통해 노출되는 제품과 몰입을 위해 완벽하게 통제된 영화관이라는 환경에서 노출되는 제품은 효과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주식품 이온음료예요. 아시잖아요, 전에 퍼플 캔디 광고하셨던.]

“그래. 알지.”

뿔뿔이 헤어졌던 1세대 걸그룹을 다시 뭉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광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퍼플 캔디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주하고 영화사가 콜라보 마케팅을 하기로 했대요.]

제품과 영화의 콜라보 마케팅. 과거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나 통용되는 줄 알았던 그 기법은 이제 국내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제품 입장에선 극 중 노출을 노리고 영화 입장에서는 개봉 전 제품 광고를 통해 마케팅 비용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근데 그게 하필 더 게이트예요. 거기 홍서희 씨가 장진구 씨랑 더블 주연이라면서요. 이번 PPL 나오는 거 보고 홍서희 씨 제로 스웨트 전속 여부 결정하는 모양이던데.]

“아…….”

[그래서 대표님한테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한 달간의 휴가, 당연하지만 현 메인 카피라이터인 김다미에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어떡할까요? 그냥 우리 애들 보내서 세팅해요?]

“뭘 물어? 그냥 말해.”

그래서 녀석이 전화를 한 이유 역시 알 수 있었다.

[네. 현장에 계실 거니까 이번 건 대표님이 챙겨주세요.]

그때 머릿속에 아주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네. 제가 챙기지요.”

[그럼 하루 시간 내세요. 아주 하고 미팅 한번 하셔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돌아간 대답,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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