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21화
121. 겨울 장마(6)
중원 기획실은 강력한 법적 대응을 검토했다. 광고 기획사가 광고 계약에 위배되는 짓을 한 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고발장이 접수되기 하루 전, 법적 대응은 없던 일이 되었다.
터져 나온 폭로 때문이었다.
폭로는 심의 분과에서 밀려난 심의관들의 양심 고백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심의 광고 정재계 거물들의 커넥션에 대해 털어놓았고 어지럽게 배치된 화살표 끝엔 중원 자동차가 있었다.
폭로의 결과, 모든 정황은 안덕모의 기자회견이 사실임을 다시 한번 증명해 주었다. 중원의 스탠스는 피의자에서 명백한 가해자로 변했다.
그리고 그날 우린 광고 심의 분과를 고소했다.
고소장을 품에 들고 법원 앞에 정렬한 안덕모와 DNP의 관계자들의 모습은 그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국민적 지탄, 끓어오르는 여론. 법원은 발 빠르게 움직였고 며칠 만에 서규원이 검찰에 소환되었다.
마케팅 이사인 서규원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수사관들에 둘러싸여 빠른 발걸음으로 포토라인을 빠져나갔다.
[중원 사태의 몸통, 서규원으로 밝혀져.]
이틀간의 수사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당사자는 자신이 몸통이 아니라 발뺌했지만 나머지 참고인들의 증언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규원을 사태의 핵심으로 특정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알았다. 중원이 꼬리 자르기를 했음을.
사그라지지 않는 여론에 몰린 검찰은 결국 이광배를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웠다.
촤르르륵.
휠체어에 올라 비서의 손 이끌려 포토라인에 선 이광배. 온몸을 감싼 담요, 염색하지 않아 새하얘진 머리, 병세가 완연한 야윈 얼굴로 이광배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열었다.
“중원의 수장으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참담함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한 후 거취를 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조사가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검찰청을 빠져나온 이광배는 한층 더 초라해져 있었다.
“……저 이광배는 사죄의 뜻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재벌 회장의 전격 소환, 그리고 은퇴. 그건 한 달 넘게 이어진 중원 사태의 클라이맥스였다.
절정의 순간 터져 나온 불꽃처럼 다음날 이광배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에 대서특필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일주일.
중원에 대한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내내 주요 기사 상위권에 랭크 되었던 광고심의 분과 수사에 대한 내용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뜨거웠던 여론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잠잠해졌다.
일면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슈 전환은 누군가의 필사적인 노력 끝에 이루어낸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뿐이었다.
“……조용하네, 조용해.”
차혜민의 집무실, 기사를 살펴보던 차혜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후륵.
난 그녀가 만들어준 루이보스티를 조금 음미했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자꾸 먹다 보니 어느새 입에 붙어버렸다.
“안 대표는 만족해?”
차혜민이 물어온다. 찻잔을 내려놓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족합니다.”
애초에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우리는 개미, 중원은 코끼리라고 했던 이광배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개미는 발악했다.
주목을 받았고 덕분에 힘을 얻어 코끼리를 밀어 쓰러뜨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그 숨통을 끊어놓을 순 없다.
“얻을 만큼은 얻었으니까요.”
멤버가 모두 교체된 광고심의 분과는 정상 가동을 시작했다. 이광배는 표면적이지만 총수직을 내려놓았고 당분간 우리에게 수작을 걸어온 가능성은 없다.
태풍이 지나간 후 보장받은 안전. 마침내 우린 외부에 대한 경계를 풀고 우리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또 DNP로서도 많은 걸 얻었다.
겨울 장마 시작과 함께 덮쳐온 회사의 고난을 함께 겪었고 그걸 이겨내는 과정을 함께 경험했다.
길었던 장마가 끝난 지금. 우린 고락을 함께 나눈 동지이자, 중원이라는 거대한 적과 싸워 이겨보는 경험을 한 아주 특별한 동료들이 되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자하더라도 결코 얻을 수 없는 막대한 유대감. 난 달라진 직원들의 눈빛 속에서 생생히 빛을 발하는 뭔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근데 회사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것도 사실이야.”
차혜민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안타깝지만 이번 사태로 DNP는 너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중원의 광고에 세로드립을 넣고 메시지를 숨기면서 다양한 의미로 부담스러운 기획사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
“그래서 자인 기획 인수작업 다시 시작했어요.”
“아, M&A?”
“네.”
하지만 해답은 있다. 자인 기획 M&A는 다시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사태가 있기 전 조율을 끝낸 상태였으니 성 팀장이 마무리만 해준다면 더 이상 문제 될 건 없다.
빠르면 앞으로 한 달, 자인 기획이 우리와 한 식구가 된다. 광고주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DNP는 당분간 자인 기획의 그늘에 숨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DNP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누그러질 때까지.
“우리 안 대표는 다 생각이 있구나?”
후륵.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차혜민을 바라보았다. 날 향한 신뢰의 눈빛.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달만 쉴게요. 그동안 회사를 부탁드립니다.”
“뭐 한 달? 어디 가?”
신뢰의 눈빛이 사라진 곳엔 당혹이 차오르고 있었다.
“휴가요, 휴가.”
난 쓴 미소로 그녀에게 답했다.
* * *
“우와!”
안주미가 탄성을 내지른다. 난 녀석의 반응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너무 마음에 들어. 큰돈 썼겠다, 오빠.”
“흐흠.”
아암, 큰돈 쓰다마다.
BK엔터와 계약 후 보령과 서울을 오르락내리락하던 녀석이었다. 그간 서울에 올라올 땐 내 오피스텔에서 생활했을 했다. 내 오피스텔은 한 명이 생활하기 위한 공간이었고 그래서 나도 안주미도 여러모로 불편했다.
어느덧 안주미의 배우 데뷔작인 영화 ‘더 게이트’의 크랭크 인이 코앞에 다가왔다.
대부분의 촬영이 서울과 수도권에서 이뤄질 것이었기에 지낼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얼마 전 내 오피스텔과 같은 층에 나온 매물 하나를 사버렸다.
“있을 거 다 있네. 침대랑 소파도 있고 가전제품도 필요한 거 다 있고.”
처음엔 오피스텔만 사 주는 걸로 끝내려 했다. 전주인이 살다 나간 흔적 가득한 오피스텔을 보았고 생각은 바뀌었다.
‘도배랑 바닥은 새로 해줘야겠지?’
그것이 시작이었다. 깔끔하게 도배된 벽과 바닥을 보고 있으니 너무 휑해 보였고 침대를 사서 놓고 소파도 하나 사서 놓고 그러다가 그냥 몸만 들어오면 살 수 있도록 모든 걸 새 걸로 준비하게 되었다.
지출은 상당했다. 뭐 내 수입으로 감당 못 할 수준은 아니지만.
“기획사에서 해준다고 했는데…….”
“크흠.”
녀석이 아픈 곳을 찔러온다. 준비 다 끝나고 나서 원래 이런 건 기획사에서 해주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연예인을 해봤어야 알지.
“됐어. 어차피 다 네가 버는 돈에서 까는 거겠지.”
“아무튼 고마워.”
지출은 크지만 뿌듯하다. 모처럼 오라버니 역할을 제대로 한 기분?
모든 준비가 된 상태라 이사는 간단하다. 옮길 거라곤 차 트렁크에 한 번에 다 들어갈 분량의 짐과 옷뿐.
주미가 옮겨온 짐을 풀고 정리를 시작하는 동안 난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두툼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표지에 선명히 박혀 있는 이름.
[더 게이트.]
녀석의 데뷔작의 대본이다. 살펴보니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대본이 손때가 가득하다.
스륵, 스륵.
대본 속 녀석이 출연하는 부분을 형광펜으로 칠해놓았다. 그 옆에 가득한 메모.
긴박하고 빠르게, 숨을 헐떡이며, 살았다는 느낌으로 안도하며.
이 녀석 자기 배역뿐만 아니라 해당 씬에서 자기가 해줘야 할 역할을 제대로 연구했다.
준비성이 훌륭하다. 실전에서 어느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녀석이 내 광고에 출연하는 연기자였다면 난 이 대본만 봐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대본 봐?”
“아, 어.”
정리를 끝낸 녀석이 날 바라본다. 난 전부터 한번 물어보고 싶었던 걸 물었다.
“연기 재미있냐?”
녀석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진다.
“응. 많이.”
“그래.”
안주미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웹툰 작가를 지망했고 보령으로 내려가서 어머니 카페를 도우며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연기를 접했다.
녀석의 나이 어느새 20대 중반.
연기자로서는 상당히 늦은 시작이다. 대부분 10대에 연기를 시작하는 게 그쪽 바닥이니까.
“모레 첫 촬영 들어가지? 당분간 촬영장 내가 데려다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뭐?”
놀란 녀석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바쁘지 않아? 너랑 너희 회사 뉴스 나오고 난리던데.”
“이제 다 끝났어. 그리고 나 휴가 냈다.”
“휴가? 대표가 휴가를 내?”
쓰게 웃었다.
“쉬어야 또 일하지. 모자란 동생도 영 걸리고.”
“안 모자라거든?”
발끈하는 녀석.
“시끄럽다. 정리 끝났으면 나가자.”
“어디를?”
대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사했잖아. 짜장면 먹어야지.”
“아, 그렇지 참.”
“밥은 네가 사라.”
앞장서 걸어갔다.
“아, 네.”
흔쾌한 대답과 함께 녀석이 내 뒤를 따라붙는다.
* * *
[뭐하러 그러세요? 죄송스럽게.]
“휴가 내고 하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니, 그래도…… 아우.]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BK엔터 황아람의 미안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진짜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영화 찍는 거 구경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중원 일로 지쳤고 안주미는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간 좋아하던 영화도 못 봤다. 그래서 이번 휴가의 목적은 제법 복합적이다.
그리고 난 이 모든 결핍을 한 방에 해결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로 안주미의 임시 매니저.
아직 전담 매니저가 없는 녀석 옆에 붙어서 촬영장을 따라다니며 영화 촬영 구경도 하고 동생 케어도 하고 남는 시간엔 쉬고.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다.
[그럼 안 대표님 계좌번호 불러요. 매니저 일당 입금해 드릴 테니까.]
“아이고, 됐네요.”
전화가 끝났다. 그리고 초조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좀 더 빨리 가자. 이러다 늦겠다.”
옆자리의 안주미는 안절부절못하는 중. 임시 매니저는 첫날 실수를 하고 말았다.
배우들의 집합시간은 아침 아홉 시, 남양주 촬영장까지 9시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근데 주연 제외 조연들은 최소한 한 시간은 일찍 도착해야 하는 게 불문율이라고.
“알았다. 알았어.”
난 평소보다 힘주어 가속페달을 밟았다.
8시 50분, 촬영장에 도착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안주미가 뛰어들어 갔고 난 주차를 마치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좀 곤란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첫날부터 지각을 해? 감독님이 오냐오냐하니까 무서운 게 없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홍서희다. 오늘따라 일찍 도착한 모양.
더 게이트의 여주인공이자 최근 무섭게 부상 중인 인기 배우. 그리고 안주미는 극 중 그녀의 친구이자 동료로 미지의 크리처에 의해 폐허가 된 도심에서 생존하는 연기를 펼쳐야 한다.
“……죄송합니다.”
안주미가 깊이 고개를 숙인다. 늦은 건 나 때문인데 괜히 욕먹는 건 녀석이 된 상황. 미안하다 하지만 끼어들 수 없다.
매니저의 영역은 여기까지. 한 발짝 더 들어가면 거긴 배우와 스태프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난 마스크 위 얼굴을 가린 모자를 더욱 눌러썼다.
“너 저번에도 한 번 경고했지?”
지난봄 광고 촬영장에서 천사 같은 미소로 내게 고개를 숙이던 홍서희.
“계속 이딴 식으로 해봐. 내가 가만히 두는지.”
독기 어린 목소리, 머릿속에 홍서희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이 부서진다. 그래서 내 눈매는 더욱 가늘게 좁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