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16화 (116/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16화

116. 겨울 장마(1)

“신부 입장!”

사회자의 우렁찬 멘트에 새하얀 웨딩드레스 차림의 이미래가 등장한다.

DNP 디자인팀의 리더가 아닌 이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위해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 그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부를 바라보는 김형철의 상기된 얼굴.

그렇게 김형철과 이미래, 광인 기획 기획본부의 공식 개와 고양이였던 두 사람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축하 영상 함께 보시겠습니다.”

한 달 전 김형철의 부탁대로 두 사람을 위해 축하 영상을 만들었다.

영상을 만들기 위해 두 사람으로부터 엄청난 분량의 사진을 받았다. 그렇게 받은 사진을 시기별로 정리해 영상에 담았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좌우로 분할된 화면 속 두 사람의 모습은 지난 40여 년, 각자 걸어왔던 각자의 인생을 조영해 주었다.

화면을 분할했던 벽이 사라진다. 이후 영상이 보여주는 건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들.

뜨거웠던 청춘의 시절, 두 사람은 선후배였고 회사의 입사 동기이자 각자 팀을 이끌었던 리더로 살아왔다. 김형철이 반도 자동차로 넘어가며 서로의 일터는 달라졌지만 이후 두 사람은 동료가 아닌 보다 특별한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완도 워크숍, 광고주와 기획사 직원의 신분으로 참여했던 회의.

단체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사진 속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주변 인물들과 배경이 사라지고 두 사람의 모습의 모습만이 남는다.

[오늘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길을 걸어가길 약속합니다.]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이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다. 장소는 웨딩 촬영장, 영상 속에서 신랑 신부를 향한 카메라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예비 신랑 신부, 손잡으시고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 오실게요.”

서로를 보며 수줍게 웃는 두 사람, 김형철의 이미래의 손을 잡았고 한 걸음 한 걸음 카메라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왜 똑바로 걷지를 못해?”

“이거 깔창이 너무 두꺼워. 지금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라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이 걸어온다.

“야! 드레스 밟았어!”

“아, 미안.”

“으이그!”

어두워진 화면 속 두 사람의 티격대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맞잡은 두 손 영원히 놓지 않기를…….]

“실감 안 난다. 우리 진짜로 결혼하는 거 맞아?”

김형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네, 그렇답니다, 서방님.”

늘 입버릇처럼 해왔던 형이라는 호칭, 신부는 이제 그를 다른 호칭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호칭을 마지막으로 준비된 영상이 끝났다.

행사장을 비추던 스크린에 신부의 얼굴이 나타난다. 터져 버린 눈물로 화장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

“으이그, 저런.”

내 옆의 차혜민이 쯧쯧 혀를 찼다.

훈훈했던 결혼식은 그렇게 끝났다. 식을 마치고 퇴장하는 김형철을 향해 폭죽과 샴페인 축하 케이크와 구두약 세례가 날아들었고 덕분에 신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인마! 신부를 울리면 어떡하냐?”

전투에 나서는 군인처럼 얼굴 가득 구두약을 묻힌 김형철이 따져 물었다.

“미안요.”

서툰 솜씨였지만 이번 영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만들었다. 수많은 사진에서 필요한 걸 찾아내 배열하는 작업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작업에만 신경 쓰느라 예상 못 했다. 영상을 보게 된 신부가 울어버릴 거라고는. 진짜로 미안한 모습의 날 보며 그가 쓰게 웃는다.

“농담이야. 근데 진짜 잘 만들었네? 나도 울컥해서 혼났어.”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려다 멈칫한다. 손이며 옷이 온통 엉망인 까닭.

“아무튼 축하해요.”

“고맙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음…….”

그가 행사가 끝난 야외 식장을 둘러본다.

“그런 거 같네.”

“그럼 전 이만.”

“어딜 가?”

그가 내 앞을 막아선다.

“기다려, 나 옷 갈아입고 같이 가야지.”

“어딜?”

엉망이 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뒤풀이해야지.”

정신없던 주말은 끝났다. 결혼식에 참석하고 4차까지 이어진 마라톤 뒤풀이 덕에 다음 날인 일요일이 그냥 녹아 사라졌다.

다시 월요일.

사무실로 출근하는 대신 다른 곳에 와 있었다. 성재호 팀장이 오래전부터 공을 들이고 있던 DNP의 차기 M&A 대상, 자인 기획의 근처.

자인 기획의 본사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 몸담았던 회사가 M&A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구성원들에겐 제법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만나야 할 건 지난 20년간 자인을 설립하고 키워왔던 현 오너,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광고계들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거물 카피라이터였던 김상인 대표였다.

“아, 저기 오시네요.”

성재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중년 남자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발이 된 머리, 탄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야윈 얼굴. 그의 외모는 50대 초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노쇠해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온 그가 손을 내민다.

“반가워요. 김상인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안덕모입니다.”

한때 광고계의 전설, 하지만 이제 자신의 회사를 남에게 넘겨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내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자인 기획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김상인 대표가 20년 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회사는 수년 전부터 벼랑 끝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회사 수익이 적자로 전환된 지 이미 몇 년이 지났고 부족해진 운영 자금을 조달할 방법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신용평가기관은 자인의 평가등급을 해마다 하향했고 그 덕에 은행에서 운영 자금을 조달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김상인에게 남은 선택은 폐업을 하느냐, 매각을 하느냐. 아니면 사채를 끌어오느냐.

가장 좋은 방식은 매각이었지만 전성기를 완전히 지나 쇠퇴기에 들어선 회사, 보유하고 있기만 해도 매년 십억 이상의 적자를 내는 기업을 인수할 대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성재호를 통해 DNP가 접촉해왔다. 든든한 자금줄을 바탕으로 규모를 키워야 하는 DNP의 요구와 폐업의 길로 접어든 노쇠한 자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처음 성재호는 빠른 M&A 진행을 점쳤다. 하지만 무슨 변덕이었을까? 성재호는 DNP의 인수 제안에 반대를 표했고 오늘 그와 마주하게 된 것.

테이블에 커피가 올라왔다. 누구도 마시지 않은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어갈 무렵, 김상인의 입에서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대표님은 광고가 재미있어요?”

그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네.”

“왜죠? 당신이 직접 만든 제품도 아닌데, 남의 물건을 돈 받고 홍보해 주는 일이 왜 재미가 있는 거죠?”

대답은 곧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답하기 어렵지는 않다.

“제가 만든 광고로 사람들이 제품에 흥미를 갖고, 올바른 평가를 받게 되는 과정이 재미있으니까요.”

“그렇군요.”

힘없는 눈길이 창밖으로 향한다.

“저도 비슷했습니다. 이 일…… 천직이라 생각했죠. 광고를 만들고 그 광고가 세상에 알려지고, 판매가 늘고 히트상품이 되고…… 이 현대 자본주의 세상이 움직이는 데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묵묵히 들었다. 그의 말은 자인 기획 대표 이전에 거물 카피라이터였던 김상인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회사를 만들었어요. 처음엔 그게 커나가는 게 너무 좋더군요. 어쩔 땐 밥도 거를 만큼 열심히 했어요.”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주름진 그의 눈이 완만한 호선을 그린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해요.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회사가 DNP에 고스란히 넘어가는 게 싫어서 응석을 좀 부려봤습니다.”

그는 나와 닮았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나처럼 광고에 미친 인간이었고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사를 차려 정성을 다했다.

자신의 회사가 생기면 자기가 좋아하는 광고를 계속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일차원적인 것이었다. 규모가 늘어나자 신경 쓰고 챙겨야 할 일들이 많아졌고 결국 열정적인 카피라이터는 경영자가 되었다.

원치 않았던 경영자의 자리, 그것만이라도 성공이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현업을 떠나 있으니 광고판 변하는 걸 알 길이 없더군요. 제가 좋아했던 걸 남의 손에 맡긴 게 결국 독이 되었습니다.”

거물 카피라이터는 실패한 경영자가 되었다.

“주제넘지만 선배로서 조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네.”

“광고를 좋아한다면 끝까지 카피라이터로 남아주세요.”

그의 조언은 내 고민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김상인은 오랜 고민에 대한 명쾌한 정답을 내려주었다.

“회사는 수단일 뿐입니다. 수단이 목적을 가리는 어리석음을 안 대표님은 반복하지 말아주세요.”

조언을 마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주에 M&A를 공식화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만날 땐 경영자 대 경영자로서 인사드리도록 하지요.”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김상인.

“선배님…….”

난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심을 담은 목소리, 정중하게 숙인 고개에 노쇠한 중년의 발걸음은 한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 * *

“무슨 일이야?”

미팅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핸드폰엔 다섯 통의 부재중 전화가 떠 있었다. 발신자는 김다미.

[어디세요? 혹시 지금 사무실로 오세요?]

녀석의 목소리는 어딘가 다급했다.

“무슨 일 있어?”

[그게…….]

녀석이 말끝을 흐린다.

[방금 광고 부적합 통보가 나왔어요.]

“뭐?”

완성된 광고의 방송 적격 여부를 검토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그곳에 제출된 광고 중 방송에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떨어지는 광고 부적합 통보.

“어떤 광고가?”

[에어닉스 차량용 에어 리프레셔요.]

이해할 수 없다. 에어닉스 신제품인 차량용 공기청정기 ‘에어 리프레셔’의 광고는 지난주 내부 시사를 끝냈고 광고주의 컨펌도 끝난 것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부적합 통보를 받을 만한 요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부적합 사유는 뭐야?”

[과장 광고래요.]

“과장 광고?”

광고업계에서는 광고 부적합 통보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때론 애매한 기능성을 과장해 징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없는 효과를 있는 것처럼 표현해 지탄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초심자의 무지이거나 악의적으로 의도된 거짓말. 당연한 말이지만 DNP 같은 전문 광고 제작사가 절대로 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네. 저도 이해가 안 가요. 문의를 넣어봐도 돌아오는 대답도 이상하고.]

그래서 김다미의 말은 신호탄이었다. 오랜 시간 우려해왔던 위협이 실체화되어 DNP를 덮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

“알겠어. 30분 안에 들어가니까 긴급 간부회의 소집해 줘.”

[네, 대표님.]

전화가 끊어졌다. 긴장한 얼굴로 핸들을 잡고 있던 성 팀장이 뒤돌아본다.

“조금 서두릅시다.”

“알겠습니다.”

그가 가속페달을 밟은 다리에 힘을 주었고.

부웅.

날 태운 세단 위, 초겨울 비가 예보된 하늘엔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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