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10화
110. 광고 전쟁(2)
차혜민의 소개로 가람 필름의 대표를 만나는 자리.
“네, 맞습니다. 정해진 배역은 여주의 절친 역인데 김현정 씨가 개인 사정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분 출연 영상 받아서 검토했습니다. 연기가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꼭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정도였죠.”
여기까진 완벽하다. 감독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사실 내 마음은 계약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었다.
“근데 써니 엔터랑 아직 계약 전이라고 하더라구요.”
잘 짜인 시나리오, 설명만 들어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문제점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쉽지만 안 되겠다고 했죠. 크랭크인이 코앞이에요. 며칠 후면 대본 리딩 들어가는데 계약도 안 된 조연 때문에 전체 일정을 미룰 수는 없으니까…….”
“아…….”
실망감과 함께 분노가 차오른다. 완벽했던 시나리오는 거짓임이 드러났다. 내 표정 변화를 살피던 감독.
“저기, 안 대표님.”
조심스레 물어온다.
“차혜민 본부장님, 아니지, 이제 차 대표님. 제게 고마운 은인이세요.”
들어본 적 있다.
눈앞의 후덕한 남자는 작년 큰 흥행을 이루었던 작품으로 대종상 시상식에 올랐던 인물, 하지만 그의 늦은 성공 이전엔 긴 무명생활이 있었다.
“영화감독 되기 전에 본부장님 광고 많이 찍었어요. 상업영화 입봉하고 바닥 기어 다닐 때 PPL 넣어주고 광고 붙여주고 하셨던 유일한 분이거든요. 그분 없었으면 저도 없어요. 그러니까 안 대표님.”
목소리엔 존경심이 풀풀 묻어난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해볼 테니까.”
표정은 절절하기까지 했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동생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만나봤어?”
돌아온 사무실, 차혜민이 묻는다.
“네 덕분에 큰일 하나 막았어요.”
“무슨 일인데?”
조금 전 이야기를 들은 감독은 길길이 뛰었다. 동생에게 일어난 일은 있지도 않은 배역으로 순진한 신인을 낚으려던 미끼일 뿐이었다.
이후의 조치는 간단했다. 주미에게 사실을 알리고 빌어먹을 매니저 놈에게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아쉬운 건 매니저와 통화가 됐으면 하는 거였다. 그랬으면 욕이라도 실컷 해줬을 텐데.
하긴 어제 그 상황을 보고도 전화를 받을 리 있겠냐마는.
“그러고 끝이야?”
차혜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뇨.”
감독은 안주미를 원했다. 이미 그 역할에 캐스팅된 배우가 있었지만 대본을 수정해서라도 꼭 세우고 싶은. 지망생의 꿈과 재목을 알아보는 감독의 욕심, 그리고 매개체로서의 차혜민이 만났다.
그리고 유명인사의 반열에 오른 나라는 존재는 덤이고.
“배역을 꼭 맡기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BK엔터랑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아하.”
차혜민이 짝 박수를 친다.
“잘했네. 잘했어.”
BK라면 믿을 수 있다. 내가 발굴한 신인을 성공 가도에 올려놓은 믿을만한 기획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와 여러모로 관련된 회사니까.
“이번 일로 대표님 인맥 써먹는 건 인정해요. 근데 BK에 강압적으로 한 건 없어요. 진짜로.”
“알아.”
차혜민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걔 연기 내가 봤잖아. 게다가 대작 조연 확정받은 신인이면 BK 입장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지.”
찜찜했던 부분을 차혜민이 열심히 봉합해 준다.
“뭐 아니었어도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네?”
“아니야. 그나저나 끼라는 건 역시나 타고나는 건가 보다.”
묻는 말에 돌아온 건 엉뚱한 소리. 마땅한 대답이 없어 그저 쓰게 웃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차헤민이 사무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귀찮은 손님 오늘도 많이 와 있어. 어쩔 수 없이 우리 안 대표가 대응을 해줘야 할 것 같네?”
그쪽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바라보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단의 무리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온다.
“기자들이에요?”
“뭐 보다시피. 아침 일찍부터 자리들 지키시는 중이야. 안 대표 인터뷰 따기 전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더라고.”
익숙해진 풍경이다. 귀국 후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 기다려도 시간을 약속받지 못한 기자들은 결국 사무실로 찾아왔고 오늘 인터뷰를 따내지 못한다면 내일도 회사를 찾아올 터였다.
“네.”
그래서 웃는 표정을 그려 보이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기다리던 사냥감이 다가오는 순간, 긴장한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각자의 장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각자 인터뷰를 해드리고 싶은데 아쉽게도 제가 시간이 없어요. 한꺼번에 같이, 괜찮으신가요?”
“네.”
“그럼요.”
환해진 얼굴들이 끄덕인다.
“장근원 씨.”
“네, 대표님.”
품속에서 카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미안한데 마실 것 좀 부탁해요. 여기 기자님들 거랑 직원들 것도.”
기획팀의 막내인 장근원. 조심스레 카드를 받아 든 그가 후다닥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그럼. 다들 회의실로 갑시다.”
인터뷰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많았던 인터뷰 중 이런 상황은 없었다. 인터뷰는 항상 어려운 자리였고 기자와 카메라맨은 내겐 갑이었다. 그래서 긴장한 채 인터뷰에 더듬더듬 답했고 리드는 항상 기자가 해주었다.
하지만.
“대표님 인터뷰 못 따오면 들어오지 말래요. 오늘 못 만났으면 진짜 집 앞에 진 쳐야 할 판이었다니까요?”
여기자가 투덜거렸고.
“사실 저희 한 팀은 대표님 집 근처에 가 있어요. 들어가시는 길 막으려고.”
센스 좋은 장근원은 음료에 더해 간단한 간식거리들을 한가득 챙겨 왔다. 덕분에 회의실에서는 기자들과 나의 자유분방한 대화의 장이 열렸다.
“참 대표님 이력이 특이하던데. 광고기획사가 아니라 식품회사 마케팅에 계셨더라고요?”
“네, 맞아요. 거기서는 광고주라 갑이었는데 제 발로 걷어차고 을이 된 거죠.”
대화 속에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문답, 가벼운 대답에 기자들의 눈매가 한결 더 부드러워진다.
“칸 대상이라는 대단한 성과를 내셨는데. 결과를 예상하셨나요?”
“아뇨, 근데 솔직하게 말해서 금상 정도는 기대했어요.”
난 부담을 완전히 내려놓고 솔직한 대답을 내어놓는다. 이제 이 자리에 딱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광고 의뢰도 엄청 들어오시죠?”
“휴우…… 말도 못 합니다. 잠 안 자고 24시간 광고만 만들어도 감당 못 할 판이에요.”
“고민이시겠어요.”
“행복한 고민이죠. DNP의 전신인 동남풍 애드는 광고주가 없어서 힘들었으니까요.”
기자들은 주고받는 이야기 중 핵심만을 적어 나간다. 차와 다과를 곁들이며 이어지던 대화.
“광인 기획 시절 동료분들 인터뷰를 했는데 중원 자동차와 악연이 있으셨다고 하던데.”
민감한 주제가 테이블에 올랐다. 난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내며 단호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그건 노코멘트하겠습니다.”
기자들 앞에서 언급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의중을 이해한 기자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SBC 광고 전쟁 출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광고 전쟁…….”
이번엔 피할 수 없는 떡밥이 날아왔다. 난 자세를 바로 하며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그 건은 대충 넘어갈 수가 없겠네요.”
편안하던 대화에 빠져 있던 기자들이 긴장한다. 난 눈빛을 반짝이는 그들을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 * *
SBC 광고 전쟁, 일주일 전 우리에게 날아온 제안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유명세를 타고 단숨에 국가 대표 광고기획사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중원의 위협에 굴하지 않을 만한 규모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
찬성파의 의견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결과가 좋지 않다면 유명세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리스크.
대표인 내가 온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빡빡한 스케줄.
게다가 참석이 예정된 강력한 라이벌.
반대파의 의견 역시 일리가 있었다. 회사의 결정권자들을 모두 모은 자리는 정확히 5대5의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고 결국은 대표의 결정에 모든 걸 맡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참가합시다.”
반대 측도 찬성 측도 조금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참가를 결정하신 결정적인 이유가 있나요?”
기자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DNP는 갑각류와 같습니다.”
“갑각류?”
“게, 가재 그런 거요?”
“네 맞습니다.”
갑각류는 단단한 외피를 가진 생물이다.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탈피를 해야 한다. 피부가 부드러운 다른 생물과 달리 갑각류는 탈피에 목숨을 거는 것으로 유명하다.
“DNP는 일 년 만에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성장의 순간이 곧 위기의 순간이었어요.”
실패할 거라 생각했던 광고에 과감히 베팅했고.
우리의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는 광고주에 도전했으며.
때가 왔을 때 동남풍이라는 이름을 과감하게 버렸고.
우군의 지원을 받아 제작사를 인수했다.
그 하나하나의 성장의 순간이 위기로 느껴지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전 지금이 바로 한 번 더 탈피해야 할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회의실에 둘러앉은 십여 명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광고제 대상으로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이 기회를 통해 성장하지 못한다면 맞지 않는 갑각 속에서 천천히 죽어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수상에 대한 관심은 길어야 3개월이다. 광고사를 다시 써야 할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대한민국은 매일같이 새로운 사건과 이슈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다.
그러므로 우린 쏟아지는 관심을 에너지 삼아 다시 갑각을 찢어발기고 새로운 위협에 맨살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이번 결정의 이유입니다.”
“포맷이 광고를 통한 기획사들의 대결인데 참여 업체도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던데요.”
곧바로 이어지는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결 상대에 대한 대표님 평가는 어떠신가요?”
과연 곤란한 질문을 내어놓는다.
“규모와 역량으로 본다면 DNP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단한 회사들이죠.”
제삼 기획, P&S, 애드 토탈, 자인 기획.
“그중 가장 작은 회사도 저희보다 배 이상 큰 곳들입니다.”
지난 십 년간 대한민국의 광고계를 이끌어온 업계의 선두주자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여 기업 리스트의 말석에 끼어 있는 바로 그 이름.
“좋은 광고는 규모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가진 역량 모두를 쏟아붓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쉬운 먹잇감이 될 겁니다.”
[성수 기획]
기자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숨겨진 참가의 이유. 투지가 묻어나는 말에 회의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럼. 대표님이 직접 나서시는 건가요?”
“그건 대결 상대가 결정하게 될 겁니다.”
이제 DNP는 대표가 모든 광고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
김다미, 윤재원, 주희정은 어디서든 톡톡히 자기 몫을 해낼 수 있는 검증된 카피라이터. 그들을 좌우에서 보좌해 줄 디자인팀, 미디어팀 또 그 뒤엔 애드온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자리하고 있다.
“제가 나설 만한 상대라면 나서겠다는 뜻이죠.”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자리가 길어졌다. 미뤄두었던 회의도 있고 반도차를 비롯한 광고주들의 미팅이 줄줄이 잡혀있다.
“아쉽지만 마지막 질문 하나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기회를 틈탄 기자 한 명이 재빨리 손을 들어 올린다.
“DNP의 광고 전쟁 출연 의미를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신다면요?”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 질문의 의도는 기사의 헤드카피를 뽑기 위한 나름의 요령.
“우리가 원맨팀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타다닥.
슥슥.
조용해진 회의실. 각자의 수단으로 기사를 적어나가는 기자들의 손만이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