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09화
109. 광고 전쟁(1)
“야, 유 피디. 너 지금…….”
SBC 방송국,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예능국 조 국장 앞엔 기획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거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유진석 피디, 한때 예능국을 이끌던 에이스였지만 공백이 길어지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안 될 것도 없죠.”
“야, 너…….”
폭발하려던 조 국장은 겨우 분을 삼켰다.
“진석아. 네 맘 아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야. 방송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
“…….”
입술을 다문 부하직원을 바라보는 조 국장의 얼굴엔 후배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이건 못 하는 거야. 대놓고 특정 기업 광고 만드는 걸 누가 오케이 하겠냐고.”
“그거 문제없어요.”
“뭐?”
조금 커진 목소리, 하지만 유진석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프로그램 취지 밝히면 문제 없다구요. 그리고 포맷의 핵심이 광고가 아니라 광고 기획사예요.”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저 한번 믿어주세요. 분명 성공할 겁니다.”
유진석은 새 예능 프로그램 기획서를 만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에이스의 차기작에 대한 우려가 커지던 상황이었기에 국장은 큰 기대를 가득 안고 기획서를 검토했다.
하지만 기대는 박살 났다.
프로그램의 메인 포맷은 광고기획사의 명예를 건 대결, 요즘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광고기획사를 소재로 한 나름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프로그램 본편에 광고가 등장한다는 것.
광고비로 운영되는 방송국이기에 누구보다 광고를 민감하게 다뤄야 할 방송국 입장에선 쉽게 오케이 할 수 없는 포맷이었다.
“확인 다 했어요. 허위 과장 광고만 아니면 다뤄도 문제없답니다.”
“방통위도 확인해 봤어?”
“당연히, 제일 먼저 했죠.”
국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규정문제가 없다는 건 나도 이해했어.”
광고에 대한 제재는 크게 완화되었다. 공중파 방송에서 금기로 여겨지던 중간광고도 하고 있고 특정 기업을 배경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도 전파를 탔다.
“근데 돈 내고 광고하는 다른 광고주 생각은 안 해봤어?”
프로그램에서 광고를 만든다. 그건 광고비로 운영되는 방송국에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이슈다.
“해봤죠. 오히려 새로운 서비스가 될 수도 있어요. 다른 방송국, 다른 프로그램은 제공 못 하는 광고 서비스로 돋보일 수 있으니까.”
“허…….”
유 피디의 의견은 가능성과 위험의 영역을 위태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바로 본편성 해달라는 거 아니에요. 다음 달에 슈팅 맨 종영하고 딱 3회만 파일럿으로 내보내자구요. 반응 봐서 본편 성하면 되잖아요.”
준비와 접근법도 주도면밀했다. 그렇지 않아도 차기 프로그램으로 골머리를 앓던 조 국장의 폐부를 찌를 만큼.
그래서 조 국장의 마음은 자꾸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상사의 심리를 캐치한 유진석이 못을 박았다.
“DNP라고 아시죠?”
조 국장의 눈이 후욱 커진다.
“광고제 대상 받은 회사?”
유진석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린다.
“그 DNP가 오케이 했다구요.”
“……허.”
국장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저 유진석이에요. 그 정도 카드도 없이 프로그램 기획했을까요?”
의심은 사라졌다. 부하를 신뢰하는 리더의 얼굴로 조 국장이 선언했다.
“오케이, 까짓거 한번 해보자.”
* * *
그날 밤 충남 보령.
“진짜야?”
“그래.”
난 안주미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박준, 실명 안지한. 내 광고에 나온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야.”
우리 집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나이순으로 영향력을 끼친다. 우선 어머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그다음은 나, 마지막은 안주미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건 안주미가 배 속에 있을 때고 그와의 연결고리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면에서 본 그가 아버지는 사실을 알았지만 안주미에겐 어떤 타격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내가 왜 이리 이쁜가 했더니, 역시 아빠 닮은 거였구나.”
우드득.
손에 쥐고 있던 쿠키가 가루가 되어버렸다. 난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을 탁탁 털어냈다.
“아무튼 그 사람 이제 종종 TV에 나올 텐데, 괜찮은 거지?”
“나?”
녀석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내놓는다.
“당연하지. 그저 생물학적 아빠일 뿐이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비해 온 가방을 녀석에게 내밀었다.
“뭐야?”
“뭐긴. 사 달라며.”
봉투 안 내용물을 확인한 녀석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샤…… 샤.”
“큰 건 너무 비싸더라. 두 개 샀으니까 너랑 어머니랑 알아서 나눠 써.”
“와…… 감사합니다요.”
녀석이 테이블 위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잠시 후 게눈 감추듯 사라지는 가방.
“참, 엄마는 뭐래?”
“뭐 알겠다고 하시지. 우리만 괜찮으면.”
“그래? 다행이네.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으니 별 걱정 없구만.”
“그렇긴 하다만.”
알겠다고 하시며 짓던 어색한 미소, 거기서 느껴지는 희미한 감정의 흔적은 그저 기분이었을까?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참. 나 할 말 있다고 했잖아.”
기억난다. 칸에서 동화했을 때 녀석이 했던 말.
“뭔 사고라도 쳤냐?”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근데 이상하다. 녀석의 표정이 뭔가 오묘하다.
“곧 칠 거 같은데.”
“뭐?”
“나 정식으로 연기 도전해 보려고.”
예상치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지난 대환장 카페에서 안주미의 연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녀석에게 연기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난 우리 카페가 단지 배경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사람들이 카페를 찾았을 때 최소한 한 사람이라도 드라마에서 봤던 사람이 카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연기라도 상관없었다. 대본을 외우지 못해 엔지를 연발해도 괜찮았다. 어차피 촬영 현장을 생방송 하는 기획이었기에 녀석의 서툰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더해줄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번에 말했던 매니저 있잖아. 처음엔 안 하겠다고 했는데 포기 안 하고 계속 연락하더라고. 이대로 묻히기엔 재능이 아깝대. 좀 겁나기는 하는데 그래도 도전해 보려고.”
하지만 안주미의 연기는 대단했다. 혈육인 내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함께 연기를 한 사인방의 평가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전공을 하면서도 흥미를 가지지 못한 디자인이나, 웹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녀석의 숨겨진 재능.
재능은 기회를 만나 꽃을 피웠고 그래서 언젠가 그 길을 선택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네 생각은 어때?”
녀석이 조심스레 물어온다.
“말했잖아. 선택은 네 자유지. 근데.”
“근데?”
“그 매니저는 한번 보자. 얼마나 눈이 삐었길래 그런 제안을 하는지.”
“하…… 안 그래도 좀 있으면 올 거야.”
“매니저?”
“그래.”
녀석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끝을 흐린다.
“오늘 오빠 온다고, 오빠랑 얘기해 보고 최종 결정 한다고 했거든.”
단어 하나가 귀에 틀어박힌다. 오빠. 녀석이 날 오빠라고 불러준 게 얼마 만이던가. 난 가슴속 깊숙이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느끼는 중이었다.
“오냐. 이 오라버니가 제대로 검토해 주마.”
커피잔에 조금 남은 커피를 빙빙 돌리며 녀석이 피식 웃었다.
* * *
“아…… 안덕모 대표님?”
“아! 그…….”
얼굴은 안다. 하지만 만난 지 오래되어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저 이호영이라고 합니다. 오래전에 오디션 때 인사드렸던.”
“아…….”
확실한 건 상대가 내가 알고 있는 기획사의 매니저라는 것.
“기억나요. 근데 설마?”
난 손가락으로 안주미를 가리켰다. 깔끔한 정장 차림, 자연스럽게 정돈된 머리. 모델을 떠오르게 만드는 큰 키에 작은 얼굴이 어색하게 웃는다.
“네. 맞습니다. 근데 설마?”
상대가 나와 안주미를 가리킨다.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던 안주미가 대답한다.
“네. 말씀드린 오빠요.”
“아.”
그가 놀란다. 우린 서로 안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쉬워진다.
“주미한테 연기 제안하셨다고 들었는데.”
“아…… 네. 맞습니다.”
대답은 더듬더듬 흘러나온다.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내가 기억하는 이호영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비록 작은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지만 배우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던 사람.
그와 만난 건 광인 기획 시절이었고 모든 모델을 BK에서 구하지 못했을 때 그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소개해 준 배우는 조연이지만 멋지게 자기 역할을 해냈다.
지금은 다니던 회사를 떠나 좀 더 작은 회사에서 매니저 생활을 하고 있었고 덕분에 가능성 있는 신예를 직접 발굴해야 하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 대환장 카페를 보았다. 무명인 안주미가 펼친 연기를 보고 단숨에 그녀의 매니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럼 써니 엔터의 대표 연예인은 누굽니까?”
문제는 그의 소속사, 업계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이름이었다.
“……배우 최원석 씨랑 김현정 씨입니다.”
대표 연예인은 무명을 겨우 벗어난 수준.
“회사 홈페이지는 있나요?”
“아, 네.”
녀석이 핸드폰에서 써니 엔터를 찾아 조심스럽게 내민다. 회사 소개란에 적혀있는 직원 규모, 조직 구성, 배우 라인업을 통해 가늠할 수 있는 써니 엔터의 능력.
탁.
난 녀석의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아…….”
“야!”
낙담한 이호영의 목소리와 놀란 안주미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이 녀석 어린 나이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작은 기획사에서 배우 지망생으로 보낼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엔터 업계의 현실은 냉혹하다. 회사의 규모는 곧 소속 배우를 배역에 꽂을 수 있는 능력과 같다. 유사 업계의 나조차 들어본 적 없는 써니 엔터는 신인에겐 피해야 할 일 순위.
“지망생 아닙니다.”
고요한 눈으로 이호영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제법 진실해 보였다.
“저희와 계약하면 겨울에 크랭크인하는 영화 조연으로 출연시킬 수 있습니다. 제작비 100억 넘는 큰 작품이에요.”
“매니저님…….”
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바보로 보입니까? 광고 기획사 한다고 영화 쪽은 모른다고 생각해요?”
“아…….”
뭔가 말을 꺼내려던 녀석,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간다.
“100억짜리 영화 조연을 오디션도 안 보고 뽑는다구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로써 확실해졌다. 예전 이호영은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눈앞의 사내는 써니 엔터라는 보잘것없는 회사의 매니저이자, 주미 같은 물정 모르는 신인의 희망을 착취하는 하이에나일 뿐.
“더 들어볼 것도 없군요. 그만 가자.”
그러니 선언할 것은 결렬뿐이다. 내 동생을 하이에나의 먹이로 줄 순 없으니까.
“대표님, 잠시만요!”
이호영이 내 팔을 붙잡는다. 난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사실 김현정 씨가 받았던 배역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현정 씨가 촬영을 못 하게 됐어요. 제가 그 자리에 주미 씨 추천했구요. 출연하셨던 웹드라마 보여주고 오디션 생략하기로 한 겁니다.”
멋진 시나리오다. 갑자기 떠올렸다기엔 앞뒤가 너무 척척 맞는. 난 한쪽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그 영화 제작사가 어디죠?”
“……제작사요?”
“왜요? 기억 안 나세요?”
“가람입니다. 가람 필름.”
가람 필름이라. 그래 그 정도 회사라면 제작비 100억은 말이 된다. 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그래. 보령 갔다더니 어쩐 일이야?]
상대는 차혜민.
“혹시 가람 필름에 아시는 분 있으세요?”
[가람? 거기 대표랑 아는데. 갑자기 왜?]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네. 제가 한번 뵙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그의 잘생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