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08화
108. 칸의 신성(8)
“세상에…….”
이미래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K팝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K콘텐츠가 핫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현대. 국제 영화제, 빌보드 차트에 한국사람이 등장하는 게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게 된 오늘이지만.
“……대상이라니.”
한국은 여전히 국제 광고제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광고 약소국이었다.
그렇다고 노력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매년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광고 기획사들이 칸을 비롯한 국제 광고제에 노크를 해왔지만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소득은 없었다.
그걸 DNP가 해냈다.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거대 기획사도 아니요, 고작 창립 일 년을 맞이한 이 작은 광고기획사가.
“말도 안 돼……. 우리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떨리는 어느 직원의 목소리에 이미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름 없는 한국의 작은 기획사가 칸 라이언즈의 대상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광고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인 동시에 DNP가 맞이하게 될 미래가 격변하는 순간이었다.
“야야, 일단 조용히 해봐.”
핸드폰 화면 속 시상식장에 안덕모 대표가 단상에 오르고 있었다.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좋은 광고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신 DNP, 애드온, 그리고 반도 자동차에 감사드립니다.]
전 세계 광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DNP의 이름이 당당히 울려 퍼졌다. 이미래는 지금 가슴이 터져버릴 듯한 흥분을 느꼈다.
“야! 내가 뭐랬어. 대상 받을 거라고 했지?”
흥분은 거대한 목소리가 되어 식당에 울려 퍼졌다. 내기를 진행했던 직원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팀장님 혼자 독식이네요.”
“세상에, 이게 도대체 얼마야?”
그 말처럼 대상에 베팅한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덕분에 수북한 지폐 다발은 온전히 그녀의 차지가 되었다.
“걱정 마세요. 설마 이걸 나 혼자 꿀꺽하겠어?”
그녀가 두툼한 지폐 다발을 차르륵 넘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차로 좋은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제대로 한턱 쏜다.”
“팀장님, 잠시만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상식을 바라보고 있던 직원.
“왜?”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그 표정이 조금 심각했다.
“조금 이상한데요?”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마세요. 세상에 절 있게 만들어준 분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요.]
이미래는 보았다. 그의 시선이 오직 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화면에 보이지 않지만 단상 아래 누가 있음을 단숨에 직감할 수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박수를 받으며 단상 아래로 사라지는 안덕모.
이미래는 한동안 주인공이 사라진 무대를 바라보았다.
* * *
박준의 정체에 대한 의심은 제법 오래된 것이었다.
묘하게 닮은 이목구비, 나를 알아보지 않고서는 보일 리 없는 반응. 그럼에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 전 가족을 버리고 떠난 배우가 무명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그의 자식이 광고기획사의 대표가 되어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광고모델로 세울 확률이란 얼마나 될까?
소설의 소재로 써도 개연성 지적이 쏟아질 그런 상황을 계속 의심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증거를 나타나 버렸다.
첫 번째는 그의 여권.
해외여행을 위해서 배우의 예명이 아닌 실명이 필요했다. 그와 함께 긴 여행을 하는 동안 보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여권, 그리고 입국서류. 결국 난 배우 박준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안지한.’
가슴속에 밀어두었던 의심에 다시 불이 붙었다. 물론 크게 번질 불은 아니었다. 세상에 안 씨는 많고 만에 하나 그가 그라도 이제 와 관계를 확인할 필요 따윈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좀 이상해.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도 안 하고.]
안주미의 전화는 결정타였다. 자신의 아들이 프랑스의 유명한 시상식에 초대되었다는 걸 알게 되신 어머니가 그 광고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식이 찍은 광고, 오래전 자신과 어린 두 자식을 초개처럼 버리고 떠난 그 인간이 그 광고에 등장했다.
그것이 어머니를 이상하게 만든 이유이자 내가 공식 석상에서 부자 관계를 특정하도록 만들었던 이유였다.
“…….”
박준의 흔들리는 시선은 나와 마주치지도 못하고 내 턱쯤까지 겨우겨우 올라왔다가 재빨리 내려간다.
이곳은 호텔 근처의 펍. 조금 전 시상식에서의 발언으로 나와 박준의 관계를 일행들 모두가 알게 되었고 결국 내 눈치를 보던 일행 등의 배려로 이 자리가 마련된 것.
“많이 놀라셨죠?”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겁니까?”
변함없는 존대, 입맛이 쓰다.
“처음 눈치챈 건 촬영할 때였던 것 같군요. 제 명함 받고 보이신 반응도 그 후로 절 보면 피하시는 것도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그랬군요…….”
그가 말끝을 흐린다. 가슴속 한구석에 깊숙이 처박아 놓았던 감정, 어느새 있는지도 몰랐던 그 감정의 덩어리가 꿈틀대며 터져 나오려 한다. 난 한쪽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겠습니다.”
이 자리는 부자 상봉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감격의 포옹을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난 칼같이 선을 그었다.
“박준 씨.”
가슴 한구석이 찔린 듯 아파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게는 당신에 대한 결핍이나 미움이 전혀 없습니다.”
“……네. 그러시겠죠.”
갈라지는 그의 목소리, 이것은 연기일까 아닐까. 머릿속에 작은 의문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다.
“우린 칸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주연인 박준 씨는 이제 유명해질 겁니다.”
시상식이 끝나고 한국으로부터 수많은 취재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칸 라이언즈 대상, 그건 도저히 묻힐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성과이기 때문이다.
“박준 씨가 그토록 열망해온 당신만을 위한 무대가 열릴 겁니다. 당신의 연기력이라면 늦깎이 스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성과는 관심을 부른다. 관심은 기회를 만들고 기회는 성공을 부른다. 이제 40년 무명 배우 인생에서 무명이라는 딱지는 떨어질 것이다.
“이제 저와 계속 부딪쳐야 한다는 말과 같아요. 우린 행사장에서 마주칠 겁니다. 촬영장에서 마주칠 수도 있고 어쩌다 보면 제 회사가 만드는 광고의 모델이 되실 수도 있겠죠.”
공식 석상에서 그와의 관계를 특정한 이유, 지금 이 자리를 피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물론 차혜민과 김다미는 다른 뜻으로 자리를 준비했음을 잘 알지만.
“저 어엿한 성인입니다. 그리고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지요. 그리고 그건 박준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만 보면 죄인처럼 고개가 숙여진다고 이 일 포기하실 거 아니잖아요?”
박준은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반도 김석만 회장의 평가처럼 죽을 때가 되어서야 뒤를 돌아볼 남자.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연이 끊긴 부자는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운명을 걸어간다. 그러므로 더더욱 그와의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전 다시 당신을 완벽한 타인으로 여길 겁니다. 박준 씨도 그래 줬으면 좋겠습니다. 제 말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죠?”
“아…… 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흔들리는 시선이 날 따라붙는다. 미련 없이 앉아 있는 그를 빗겨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말.
“참. 박준 씨 연기 정말 대단했습니다. 얼마만 한 열정을 쏟았을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을지 저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예요.”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욕심 같아선 제 광고의 페르소나로 삼고 싶을 정도였어요. 물론 지금은 무리겠지요. 그래도 언젠간 다시 좋은 작품 같이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
등 뒤에선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돌아가면 저와 다시 보게 될 겁니다. 아까 시상식에서의 부탁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곧장 걸어가는 길, 펍 밖을 지키고 있던 차혜민과 김다미가 놀라 몸을 숨긴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객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 *
프랑스를 떠난 비행기가 한국에 도착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멈춰 서고 성질 급한 한국인들이 일어서 통로를 가득 채운다.
“이게 뭐야?”
“선글라스요.”
그때 김다미가 건넨 안경 케이스, 그걸 보며 난 미간을 찌푸렸다.
“샀어? 나 선글라스 안 쓰는데.”
“받으세요. 필요할 거예요.”
“선글라스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비행기가 멈춰 다시 연결된 모바일 데이터, 녀석이 기사 하나를 띄워 내게 내민다.
[칸 라이언즈 대상, DNP 안 대표와 배우 박준의 입국을 기다리는 기자들.]
기사의 제목을 보는 순간 한숨이 흘러나왔다.
“플래시가 많이 눈부실 거예요. 또 다크서클도 생기셨고.”
녀석이 손가락 끝으로 내 눈매를 슥슥 매만진다.
“이거 너 써라. 너도 지금 다크서클 장난 아니거든?”
무려 프랑스까지의 여정이었다. 시상식 당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여유라곤 없었고 시차까지 더해져 몹시 피곤한 상태.
“제 것도 있거든요?”
녀석이 가방에서 선글라스 하나를 꺼내 쓰며 비죽 혀를 내민다. 녀석을 따라 왜인지 커플룩처럼 보이는 선글라스를 쓰고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공항의 상태는 예상대로였다.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 빠져나오는 길.
“저기!”
“나온다!”
삑, 삐빅.
퍼버벙.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터뜨린 플래시의 섬광이 온몸에 쏟아진다. 눈을 찌푸리며 걸어 나오는 길, 다급한 발걸음들이 따라붙는다. 공항 보안직원들이 기자들을 제지하면 순식간에 아비규환 몸싸움이 벌어진다.
“안덕모 대표님! 칸에서 대상을 받으셨는데!”
“한국 광고계의 기적이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회사 설립 일 년 만에 엄청난 결과물을 손에 넣으셨는데요!”
“다음 광고제 도전 계획도 있으신가요?”
“심경은 어떠세요?”
동시다발적으로 질문들이 도저히 답할 여유 없이 쏟아졌다. 결국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순식간에 내 주변을 포위한 기자들을 보며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대상 수상으로 대한민국을 알릴 수 있어 큰 영광입니다. 작은 DNP로서는 기적 맞고 심경은 아주 기쁩니다. 저희와 함께 광고제에 도전해볼 광고주님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와다다다 흘러나온 답변에 기자들의 손이 분주해진다.
“안 대표님, 시상식에서의 발언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저 인간이?
난 날카로운 눈으로 말 안 듣는 기자를 쏘아보았다.
“아, 그건 이번 광고에 대한 카피라이터로서의 생각일 뿐입니다. 당시에 많이 당황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요. 오해가 있었다면 그건 서툰 표현의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가요? 일각에선 대표님의 가족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나오던데.”
곤란한 질문이다. 기자들의 포위를 강행 돌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어? 박준이다!”
“박준?”
“저기 나온다!”
우르르 몰려왔던 기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겨우 열린 퇴로, 우린 재빨리 공항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