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07화
107. 칸의 신성(7)
“팀장님!”
미팅이 끝난 후 사무실로 돌아온 이미래, 디자인팀 직원의 목소리에 이미래는 책상 위에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았다.
“클락에서 컨펌 나왔어요. 보내준 그대로 하고 제품 구도만 조금 손보면 될 것 같다네요.”
“그래? 다행이네.”
이미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패션 시계 전문 브랜드 클락, 디자인팀 창설 이후 가장 컸던 의뢰에 대한 컨펌이 마침내 떨어졌다.
“두 시간만 하면 끝날 것 같은데, 오늘 끝내 버리죠?”
팀원의 말에 이미래가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외근이 늦어지는 바람에 벌써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아니. 오늘은 그만.”
의외의 말에 팀원들의 고개가 하나둘 파티션 위로 올라온다.
“너희들 이번 주 내내 야근했잖아.”
그녀가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회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없어서였을까? DNP의 사무실이 오늘따라 왠지 허해 보였다.
“일찍 끝내자. 이런 날이라도 일찍 퇴근해야지.”
“팀장님 그럼…….”
팀원이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린다.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같이 시상식 볼까요?”
“아!”
이미래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시상식 오늘이었나?”
“네. 이따 밤 9시.”
그랬다. 칸 라이언즈의 초대를 받아 안덕모와 김다미 그리고 차혜민이 프랑스 칸으로 떠난 지 벌써 3일째, 바로 오늘이 DNP의 미래를 결정지을 시상식 당일이었다.
자칫 중요한 행사를 놓칠 뻔했다. 그러니 알게 된 이상 결정은 빨랐다.
“자, 주목!”
짝짝.
우렁찬 목소리에 DNP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오늘 저녁 광고제 시상식이 있습니다. 다 같이 모여서 봅시다. 각자 업무들 정리하세요.”
조용하던 사무실에 파장이 일었다. 웅성대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 뒤늦게 시상식이라는 걸 알게 된 직원들의 놀란 얼굴들.
“미영아, 근처 조용한 데로 예약해. 밖에 있는 직원 있을 테니까 문자 좀 돌리고.”
“네, 그럴게요.”
직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이미래는 시선을 돌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두근거리며 시상식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DNP의 대표단이 있을 방향.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이미래는 서쪽 하늘 먼 곳을 바라보며 보며 작은 기도를 읊조렸다.
* * *
[엄마가 좀 이상해.]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안주미의 목소리, 난 놀라 되물었다.
“왜? 어디 편찮으셔?”
[아니, 아니.]
한국과의 거리 때문에 느껴지는 묘한 딜레이. 그래서 녀석의 대답은 반 박자 늦게 돌아왔고 가끔은 말꼬리를 잘라먹었다.
[아픈 건 아니고. 며칠 전부터 그냥 표정이 영 별로야.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말도 안 하고.]
“그래?”
걱정스러운 한편 혹시나 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혹시 광고 보고 그러셔?”
[광고? 어, 그런가? 그런 거 같은데.]
“지금 일하시나? 어머니 좀 바꿔줘 봐.”
[지금은 바빠서 전화 못 받아, 시상식 코앞인데 괜한 소리를 했다 내가.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마.]
짜식이 웬일로 배려를?
난 내심 뿌듯한 맘을 숨기며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좀 더 챙겨드려. 돌아가면 바로 내려가 볼 테니까.”
[알았어. 꼭 상 받고, 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거기 프랑스잖아? 패션의 도시, 그러니까 샤넬…….]
띠링.
하하하. 어쩌지? 전화가 그만 끊어져 버렸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데 문자 도착 알람이 울렸다. 난 조금 불안한 얼굴로 내용을 확인했다.
[꼭 샤넬 아니어도 돼. 그리고 나 얘기할 거 있거든?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고. 아무튼 수상 기원!]
“누구예요?”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긴 김다미가 있었다. 이곳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칸, 펑퍼짐한 반팔 셔츠 차림이 무척 편안해 보인다.
근데 입술에 묻은 마카롱 가루가 눈에 들어온다. 손을 뻗은 건 특별한 고민 없는 행동이었다.
“동생. 올 때 명품백을 사 오라네? 미친 게 틀림없어.”
그러며 입가에 묻은 가루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주었다.
“어…….”
당황한 녀석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잠깐 쉬었다 가자.”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벤치 중 빈자리, 난 앞장서 걸어가 거기 앉았다. 뒤늦게 날 따라온 녀석이 내 옆자리를 차지한다.
눈앞에 해변과 그사이를 가득 채운 자유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좋다.”
“정말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힐링되는 기분.
“맘 같아선 한 일주일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곳에 온 지 벌써 삼 일이 흘렀다. 하지만 오늘처럼 쉬어보는 건 처음.
그제와 어제 계속해서 입상작들 시사회가 있었고 오늘이 마침내 수상작 발표. 행사 전 잠깐 시간이 남아 김다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길이었다.
휴양지를 걷고, 길거리 음식을 즐기고, 이곳의 분위기에 녹아들고. 여기까지 와서 누리지 않고 지나갔다면 후회했을 만한 것들.
“그럼 좀 더 있다 올래? 그동안 휴가도 제대로 못 썼잖아.”
“그럼 대표님도 같이?”
“아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돌아가야지.”
아쉽지만 지금은 여행을 즐길 팔자가 아니다.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이미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그득그득 쌓이는 중이니까.
“그럼 저도 됐어요.”
그때 음악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리의 악사가 기타를 튕기며 버스킹을 시작한 모양.
걸어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즉석 공연장이 완성되었다.
“상…… 받을 수 있을까요?”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
이틀간의 시사를 통해 칸 라이언즈에 출품된 수십 개의 강력한 경쟁작들을 감상했다.
신선하고 강렬하고 때로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로 기발했던 그들의 광고. 그 사이에 낀 우리 광고는, 우려와 달리 상당히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시사회장을 빠져나올 때 현지 언론사가 인터뷰를 따 갔을 정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차혜민.
[돌아와. 슬슬 출발해야지.]
“네. 그럴게요.”
아쉽지만 휴양은 여기까지.
“가자, 다미야.”
“네.”
버스킹 공연장에 가득 모인 사람들을 뒤로한 채 멀리 보이는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에서 일행을 만났다. 그리고 박준은 언제나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건 칸에 도착하면서부터 계속된 이상한 행동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시사회장에서도, 하루 일정이 끝나고 간단히 맥주 한잔할 때도.
그는 내게 죄지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가자, 차 대기 중이야.”
차혜민이 앞장서고 그 뒤를 나와 김다미가 따른다. 우리의 주인공이면서도 엑스트라를 자처하는 그를 보며 난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팀장님 한잔 더?”
“야야. 천천히 마셔. 너 그러다가 훅 가.”
이미래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희정은 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는다.
“뭔 술 하고 원수가 졌나.”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안주도 안 먹고 다시 술을 채우는 모습을 보며 이미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결국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테이블마다 행사를 생중계하는 영상을 띄워놓고 모처럼 편안한 회식을 즐기는 중.
이미래가 고개를 돌렸다. 주희정 옆에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재원 씨.”
“네, 팀장님.”
“지낼 만해?”
“네. 좋아요.”
그가 살짝 웃는다.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좀처럼 볼 수 없던 편안한 미소였다.
“부럽네요. 저도 저기 가고 싶었는데.”
이미래는 DNP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자 직원들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가장 크게 보이는 건 역시 윤재원의 성장이었다.
지금 회사를 리드하고 있는 건 안덕모와 김다미지만 성장세가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윤재원이었다.
잘생기고 능력 있고 집안 좋고 똑똑한 저 녀석이 대체 왜 이런 회사에 들어오려고 그 고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마 곧 갈 수 있을 거야. 재원 씨는.”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은 그녀였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감사할 것까지야. 참, 가게 되면 나도 좀 꼭 데려가 줘. 알겠지?”
“네. 그럴게요.”
녀석이 활짝 웃는다. 그때였다
“자, 자. 다들 여기 보세요.”
지원팀 직원 하나가 시선을 모은다.
“수상 결과로 내기해요. 딴사람이 그걸로 2차 쏘는 걸로.”
“좋아. 난 동상.”
“나도 동상.”
직원들이 베팅을 이어가는 가운데.
“난 금상.”
조영찬 팀장이 오만 원을 내민다.
“와, 금상이요?”
“에이. 그건 힘들어요, 팀장님.”
“맞아요. 지금까지 한국 최고 수상기록이 은상이라고요.”
터져 나오는 반응들. 떠들썩한 가운데 이미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품에서 오만 원짜리를 꺼내 내민다.
“나는…….”
직원이 받아 적을 준비를 한다.
“대상!”
“네? 대상…….”
“오…… 포기하시는 겁니까? 뭐 저희야 좋지만.”
“아닌데?”
“네?”
“내가 이길 거 같은데?”
이미래가 히죽 웃었다.
* * *
“올해 칸 라이언즈의 대상은…… 축하합니다. 한국의 DNP 애드!”
현실감이 없다. 외국인들 가득한 이국이라서 더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수상자가 호명되고 카메라 플래시와 박수가 쏟아지고 멍한 가운데 단상에 올랐다.
시상자가 환하게 웃으며 트로피를 건넨다. 마침내 손안에 들어오는 황금색의 사자 트로피.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은 이것이 꿈이 아님을 어필해 주고 있다.
언제 준비해 온 건지 김다미가 내 품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준다. 녀석과 차혜민이 한 번씩 날 안아주고 뭔가 감동 어린 표정을 한 박준의 얼굴이 시야에 스친다.
“그럼 수상 소감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몸은 알아서 움직인다. 꽃다발과 트로피를 안은 채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감사합니다. 어…….”
증폭된 목소리가 조용해진 행사장을 가득 울린다. 여전히 둥둥 떠 있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야기는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먼저 영광스러운 자리를 허락해 주신 칸 라이언즈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광고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신 DNP, 애드온, 그리고 BK엔터와 무엇보다 우리의 광고주인 반도 자동차에 감사드립니다…….”
단상 아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먼 곳까지 함께해 준 소중한 동료들. 그리고 그사이의 한 남자.
붕 떠 있던 느낌이 사라진 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리고 줄줄 나오려던 말은 목구멍을 통해 쑤욱 내려가 버렸다.
“이번 광고의 주제는 가족입니다.”
그 대신 흘러나오는 건 나의 진심이었다.
“영원히 화목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가족은 없습니다. 가족이란 때론 부딪치고 깨지며 구성원이 바뀌면서 세월을 따라 변해가는 것이죠. 이번 광고는 그렇게 변해가는 가족에게 차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단상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광고에서 아들은 결국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내 시선은 유난히 얼굴이 굳은 그를 향한 채였다.
“부딪치고 싸워서 가장의 자리를 내던지고 떠났어도 아들은 아들, 아버지는 아버지인 거죠.”
핵심을 벗어난 이야기에 조금 웅성이는 사람들.
“아들한테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마세요. 세상에 절 있게 만들어준 분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요.”
박준의 경악한 얼굴.
“감사합니다.”
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쏟아지는 박수 속, 한 남자의 떨리는 시선만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