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103화 (103/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03화

103. 칸의 신성(3)

“어땠어요?”

두 사람의 면접이 끝나고 촬영감독 유원석이 물었다.

“야…… 대단하네요.”

첫 면접이었다. 중요한 광고 면접은 보통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두 번 세 번은 기본에 광고주가 까다로울 경우엔 면접만 열 번을 보기도 한다.

그만큼 까다롭기에 높은 광고비가 책정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성공한 연예인이 광고 촬영을 희망하는 것.

“특히 박준 씨 연기가 인상적이네요.”

“동감이요. 굉장한 연기파던데.”

배우 박준은 다양한 요구에 맞춰 상황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그의 연기는 절로 감탄사 튀어나올 만한 것이었다.

“활동이 뜸한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대한민국 시니어 배우의 현실이다. 젊은 신예보다 설 자리가 적은 시니어 자리는 대부분 오래전 인기를 얻은 배우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그도 40년이나 연기를 했지만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니 그 나이에 조연으로 캐스팅되기엔 그의 연기가 오히려 지나쳤던 것.

너무 빛나서 오히려 쓸 수 없다. 주인공의 스포트라이트가 희석되니까.

현실적인 연기 판에 대한 지적에 유원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런 광고에 쓰긴 딱 좋죠.”

마침 찾던 배우가 연기력이 좋은 60대 중년 배우.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욱 만족스럽다.

게다가 조금 전과 같은 강렬한 눈빛 연기라면 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니 주연 캐스팅은 단 한 번의 면접으로 결론이 났다.

“박준 씨로 하죠.”

“저도 찬성입니다”

그렇게 이번 광고의 주연 배우가 낙점되었다.

며칠 후 반도 자동차를 다시 찾았다.

“야, 필요 없어. 이런 거 안 해도 돼.”

로비에서 만난 김형철의 목소리. 난 그와 함께 회의실로 이동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래요? 엄연히 광고주가 있는데.”

오늘은 완성된 콘티와 연기자 라인업을 광고주에게 선보이는 자리. 특히 내게 칸 라이언즈 출품을 제안했던 김석만 회장에게 준비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자리였다.

“우리 이번 일은 거의 손 놨어. 광고제에 출품할 광고랑 상관없이 자체 마케팅 준비 중이란 말이야.”

반도의 신차, 스테이블의 출시가 코앞이다. 칸에 출품할 광고가 있지만 그것만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는 반도였다. 그래서 신모델 광고전략은 투트랙이다.

“그러니까 이번 광고는 그냥 원하는 대로 만들어. 힘들게 시사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럴 순 없죠.”

아무리 친하더라도, 우리에게 전권을 위임하더라도 예산이 들어가는 거래다. 허접한 광고를 만들건 대작을 뽑건 광고주의 합의와 컨펌은 기본.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죠.”

“뭐 맘대로 해라.”

어느새 회의실이 코앞이다. 문 앞에 다다르니 익숙한 얼굴 하나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박철환 과장님?”

“어! 안덕모 대표님.”

오래전 반도 차의 첫 광고 때, 우리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던 남자. 부담스러운 선물 공세에 가끔은 야근 중인 사무실로 쳐들어와 날 긴장하게 만들었던 마케팅 담당자.

자기 속에 들인 사람하고는 평생 간다고 선언했던 이제 팀장이 된 산적.

“아이고! 이제야 다시 만나네.”

박철환이 날 와락 끌어안았다.

* * *

“얘기는 다 듣고 있었어요. 하필 미국 가신 동안 그렇게 돼버리는 바람에 제가 맘이 좀 많이 그랬어요.”

광고주에 대한 컨펌의 기본은 자료 준비. 노트북에 저장해온 자료를 확인하고 프로젝터를 점검하는데 끊임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맘고생 심하셨죠? 그래도 다행이에요. 창업한 회사가 잘돼서.”

산적 같은 이 남자의 어디에 이런 수다스러움이 숨어 있었을까? 오랜만에 다시 만난 박철환은 그간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다 전해버리겠다는 듯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참, 영상 제작사도 인수하셨다면서요?”

“팀장님도 기억하시죠? 판타지아라고.”

“알아요. 거기 좀 특이하던데.”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은 회사거든요. 그래서 정리하는 데 고생 좀 하고 있죠.”

“그렇구나.”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불만스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김형철이 더는 참지 못했다.

“둘이 사귀어? 아주 애인이 따로 없네.”

찌릿.

박철환이 김형철을 노려본다. 산적의 살기 어린 눈빛에 그가 황급히 시선을 회피한다.

“아무튼 이렇게 다시 봐서 반가워요. 저는 회장님이 직접 추진하셨다는 거 좀 늦게 알았어요. 스테이블 광고로 칸에 출격하신다고.”

“네.”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제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겼고 웃는 얼굴로 박철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기획하고 모델 보여드리려구요.”

박철환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기대되네요. 안 되겠다. 조만간 제가 한번 DNP로 갈게요. 양손 무겁게 해가지고.”

“아…… 아닙니다.”

당황해 양손을 내저었다. 선을 넘나들던 그의 선물 공세는 부담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괜찮아요. 사무실도 가깝던데?”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김석만 회장과 차기인 김형준. 내게 시선을 맞춰오는 반도의 오너 부자를 향해 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준비해 봤습니다.”

광고주에 대한 FM대로의 발표였다. 광고의 기획 의도와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소개하고 실제 영상화될 콘티를 보여주고.

발표가 끝난 화면에 광고의 주연 모델인 박준의 프로필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그윽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김석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아주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네. 이대로 진행해 주게.”

이번 광고 기획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기획팀 녀석들이 열정을 활활 불태운 덕에 그렇지 않아도 대단했던 콘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였다.

“다만 주연은 무명입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완벽한 콘티를 무명이 연기한다. 회사의 많은 역량이 들어가는 신모델에 대한 광고인 만큼 오너 입장에서 탐탁지 않을 수도 있다.

“……음.”

과연 그가 잠시 할 말을 고른다. 난 긴장한 채 그의 입에 집중했다.

“마음에 드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목표를 세우면 좌우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한 방향으로만 달려갈 인상이구만. 자기 몸에 생채기가 생기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멈추지 않을 거야. 아, 이 길이 틀렸구나 생각하면 그때가 바로 숨넘어가는 순간일 테지.”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 난 멍한 눈만 깜빡였다.

“……네?”

김석만이 날 향해 빙긋 웃어 보인다.

“아닐세. 우리 이미지랑 아주 잘 맞는다고. 둘 다 고집쟁이니까.”

“아 네.”

김석만을 만나는 건 이번이 두 번째, 난 김형준이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20년간 방황한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나고 사옥을 나오는 길.

“아우 징그러운 놈. 쟤 이상해. 너한테 말고 저러는 거 본 적이 없거든?”

내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박철환, 그가 사라진 곳을 보며 김형철이 투덜거렸다.

“잘해주세요.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요.”

“하긴, 당근과 채찍을 아주 잘 쓰는 놈이긴 하지.”

밤늦게 DNP 사무실을 양손에 족발 따위를 사 들고 찾아올 생각을 하니 다시 한번 소름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다.

“참. 이사님.”

“음?”

“회장님이 관상 보세요?”

“아…… 너 몰랐구나?”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반 점쟁이야. 좀 웃기긴 한데, 사람 사귀는 것도 관상 보고 사귀는 양반이니까.”

혹시나 했던 예상은 적중했다.

“내가 말을 안 했구나? 저번에 너 처음 만났을 때, 그때도 관상 보신 모양이더라.”

“절요?”

흥미로운 이야기다. 기대와 우려가 섞인 눈으로 김형철을 바라보았다.

“뭐랬더라? 목표가 보이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스타일? 그래서 원하는 목표에 도착해 놓고 ‘어? 내 목표가 어디 갔지?’ 할 녀석이라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평가가 별론데요?”

“뭐, 우리 노인네 평이 다 그래. 나한테는 날 저무는 줄 모르고 퍼질러 자는 놈이라고 했으니까.”

“하하.”

평가는 의외지만 난 그제야 김석만의 속내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보자마자 인생의 목표를 물어온 이유,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칸 라이언즈라는 목표를 던져주신 게 아닐까?

그렇다면 너무나 고마운 배려다.

다만 좀 묘하다. 박준에 대한 평가와 나에 대한 평가가 묘하게 비슷하다. 어째 한눈에 확 꽂히더라니, 동류끼리 알아본다 뭐 그런 건가?

“그만 갈게요.”

“그래. 회의 있어서 멀리 못 가. 다음 주 저녁에 시간 내. 한번 보자.”

“네, 그래요.”

김형준은 더 이상 우리 동료가 아니지만 여전히 많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그와의 저녁 자리는 부담 없이 기껍다.

“들어가세요.”

“오냐.”

그가 휘휘 손을 흔들며 멀어진다.

* * *

그날 밤, 서울 모처의 식당. 불판 위엔 화려한 마블링의 소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어? 저 주세요.”

집게로 고개를 집어 드는데 황아람이 놀라 손을 뻗는다.

“괜찮아요. 저 고기 잘 구워요.”

두툼한 고기를 들어 올렸다. 익숙한 가위질에 고기가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려 나간다. 집게로 잘 익은 한 조각을 집어 박준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노배우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식기 전에 드세요.”

“아. 네…….”

그가 젓가락 고기 조각을 집어 입에 넣는다. 난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박준의 캐스팅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누가 뭐래도 주인공의 역량이 광고의 큰 부분을 차지하니까.

“제가 사야 하는데 부담스럽네요.”

황아람은 계속 미안한 눈빛이다.

“괜찮아요. 부탁하는 사람이 사는 거죠.”

난 박준의 빈 잔에 소주를 부었다.

“이번 광고 정말 중요하거든요.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아. 예.”

어느새 딱딱하던 분위기는 많이 풀어졌다.

“세상에 그런 애들이 없어요. 대스타가 됐는데 아직도 신인 같다니까요? 그걸 순진하다고 해야 돼요? 착하다고 해야 돼요?”

황아람의 톤은 많이 올라간다. 하지만 박준은 웃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 과묵한 성격인지 그는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 말을 붙였다.

“예전에 왕성하게 활동하셨다고 들었는데…….’

40년 경력의 연기자는 참을 수 없는 미끼.

“뭐. 옛날얘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박준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입을 다문다. 말을 더 걸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대신 조용히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 잔 더 괜찮으시겠어요?”

“딱 한 잔만 더 받겠습니다.”

잔을 받친 두 손도 지나치게 공손하다.

“편하게 받으세요.”

“아닙니다. 대표님이 주시는 술인데.”

연기할 땐 활활 불타오르던 사람이 사석에선 어찌 저리 소심하고 얌전한지. 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결국 나와 황아람만 떠들었다. 고기도 술도 충분히 먹었으니 슬슬 정리할 시간.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데 박준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덕분에 잘 얻어먹었습니다.”

“다음엔 제가 쏠게요. 대표님.”

식당 앞,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 난 우리 광고 주인공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럼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아…… 저기…….”

습관처럼 허리를 숙인 그가 말끝을 흐린다.

“말씀하세요.”

“제가 대표님 성함을 모르는데.”

“아!”

생각해 보니 내 소개도 못 했다. 면접장에서도 식사 자리에서도 모두가 날 기획사 대표님으로 불렀을 뿐.

“이거 큰 실례를 했네요.”

재빨리 품을 뒤져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수수하게 만들자는 말에 ‘대표님인데 절대 그래선 안 된다’는 김다미의 요구에 못 이겨 두툼한 종이에 금테를 둘러 새로 만든 그 명함.

[DNP 애드 대표이사, 애드온 부대표. 안덕모.]

“소개가 늦었습니다. 안덕모라고 합니다.”

박준이 명함을 받아 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명함을 바라보는데 그대로 굳어버린 것.

“……선생님?”

이상함을 눈치챈 황아람이 물었고.

“아! 죄송합니다.”

그가 황급히 명함을 품에 넣는다. 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중요한 촬영이 코앞인데 주연 배우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으면 곤란하다.

“……매니저님이 좀 챙겨주세요.”

“네, 그럴게요.”

황아람의 손에 이끌려 멀어지는 노배우, 유난히 수척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난 한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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