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01화
101. 칸의 신성(1)
“스테이블이요?”
“그래. 스테이블(Stable).”
이곳은 DNP 인근의 고깃집, 불판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소리와 함께 김형준이 반도 차의 새로운 모델명을 전해왔다.
“요즘 미국지사 잘나가잖아. 우리도 겪어보니까 알게 된 거지. 반도 차, 국내보단 미국이랑 유럽에 잘 맞아. 이번 신모델도 내수보다 미주랑 유럽 타깃으로 한 녀석이야. 패밀리 밴 스타일이고 동급 모델 중에선 성능 제일 좋을걸?”
그가 보란 듯 가슴을 편다. 김형철은 어느새 완벽한 반도 차의 마케팅 임원이 되어 자랑스럽게 자사의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아니…… 프린시플, 스테이블? 참 나.”
하지만 내 옆 이미래는 탄식한다.
“원칙, 안정? 반도 차는 어째 하나같이 이름이 그래? 길가는 초딩 데려다 놓고 이름 지으래도 그것보다 잘 나오겠다. 좀 더 쌈빡하게는 못 뽑아?”
“왜? 스테이블이 어때서?”
박한 평가에 김형철이 발끈한다.
“아무튼 반도 차는 마케팅 수장부터 잘라야 돼. 차만 잘 만들면 뭐하냐고. 마케팅을 개똥같이 하는데.”
“안 되겠다. 나랑 싸우자.”
지목받은 마케팅 수장이 발끈한다. 오늘도 투덕대는 두 사람, 난 말 없이 찬으로 나온 파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근데 덕모 너 진짜로 해볼 생각이야?”
김형철이 묻는다.
“네. 해야죠.”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일인데. 아버지 때문에 네가 괜히 고생하는 거 같아서 맘이 좀 그렇다 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잘 익은 조각을 뒤집어 놓으며 중얼거렸다.
“제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기도 하니까.”
“참 우리 대표님 보면 볼수록 대단하세요. 야망도 크고, 열정적이시고.”
이미래가 김형철을 바라본다.
“누군 후계자 자리 걷어차고 뛰쳐나갔는데 말이야. 안 그래?”
“야! 안 되겠다. 덤벼라.”
김형철이 젓가락을 내뻗는다. 이미래의 숟가락이 그걸 탁 쳐낸다.
탁탁. 챙.
장난스러운 두 사람의 펜싱 승부를 보며 난 씩 웃어버렸다.
* * *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좋아하던 영화를 대신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마케팅 담당자로서 광고에 대해 많은 걸 알아야 했기에 국내 광고는 물론 해외 광고를 찾아보는 게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게 되었다. 태국에서 만들었던 그 광고. 그건 학대받는 아이들을 지키자는 공익 캠페인 광고였다.
광고엔 아버지와 어린 딸이 등장한다. 어린 딸은 학교를 다니고 학예회에서 발표도 하며 다른 아이와 같은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이상하다.
구겨지고 품이 맞지 않는 정장은 무척 어색했다. 헝클어진 머리, 땀에 찌든 얼굴 그리고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백팩.
쾌활하게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과 함께 일기장을 읽는 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빠는 슈퍼맨이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을 한다.]
[직업이 있다고.]
[돈이 많다고.]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고.]
느릿한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일상이 펼쳐진다. 어느 날은 일용직을 전전하고 공사장 인부로 무거운 짐을 지는 그의 모습.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급하게 씻고 머리를 정돈하고 딸을 맞이하는 아빠.
[너무 행복하다고.]
[아빠는 거짓말을 한다. 나를 위해서.]
딸의 편지를 받은 아버지가 어린 딸을 끌어안으며 광고가 끝난다. 그것을 보았을 때 난 거대한 충격을 느꼈다.
영화가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그 광고는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장면으로 전달해 냈던 것.
그것은 내가 알고 있던 광고라는 존재에 대한 배반이자,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광고를 만들 수는 없었다. 광고주는 감동적인 메시지보다 단 일 초라도 제품이 더 노출되기를 원했고 그건 KJ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광고 기획사의 대표가 된 후에도 광고주를 상대하는 이상 그런 광고를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생겼다. 광고라는 범주 안에서 자유로운 광고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칸 라이언즈라는 무대.
“……언제 오실 거예요?”
김다미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빼꼼 열린 대표실 문 너머 녀석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
“음, 미팅 끝나고 출발하면 저녁 식사할 때쯤?”
“아무튼 빨리 오세요. 잔뜩 기대했는데 뭐예요? 이게.”
녀석이 입술을 비죽거린다. 하긴 그럴 수밖에.
칸 라이언즈에 출품할 광고 기획을 위해 1박 2일의 기획팀 워크숍을 잡았다. 내가 제안해 만든 행사인 만큼 나 역시 일정에 동참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 중요한 미팅이 생겨버렸다.
“미안, 먼저 회의하고 있어. 저녁은 같이할 수 있을 테니까.”
바쁜 기획팀 일정을 어렵게 뺐다. 나 하나만 늦으면 되니 워크숍을 강행하기로 했다. 모처럼 큰 차에 함께 타고 복작복작 드라이빙을 즐길 생각에 들떠 있던 녀석 입장에선 김빠지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죠. 저희 먼저 출발할게요. 이따가 봬요.”
“그래.”
난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녀석을 보며 쓰게 웃었다.
예상보다 미팅이 길어졌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아주식품, 마케팅팀 조성록 부장은 옛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끝없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지난 서이준의 광고 이후 아주식품 기업 이미지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착한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화되며 KJ와의 격차도 많이 줄어들었다.
문제는 그 시기에 광인 기획이 망해 버렸던 것.
당장 광고를 만들 곳이 필요했던 그들은 다른 기획사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센세이션했던 광인 기획의 광고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일 년, KJ 불매 움직임도 약해졌다. 착한 기업의 이미지도 흐릿해졌다. 빠르게 따라붙던 KJ와의 격차 역시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성록이 광인 기획의 후신인 날 그냥 보낼 수 없던 까닭이었다. 겨우 조성록과 미팅을 마치려는데 주한준 대표가 나타났다.
“오셨다는 말 듣고 만사 제쳐두고 들어온 길입니다. 같이 저녁이라도 하시죠.”
광고주의 배려는 고맙지만 그것까지 오케이 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주한준의 청을 어렵게 뿌리치고 택시를 잡아타니 시간은 어느새 밤 8시.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묵음으로 해두었던 핸드폰을 여니 거긴 김다미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못 오실 것 같아서 저희끼리 저녁 먹어요. 천천히 오세요.]
배려의 메시지에 미안함이 몰려온다.
[지금 미팅 끝나고 출발한다.]
문자를 전송하고 택시 기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최대한 빨리 갑시다.”
워크숍 장소는 경기도 가평의 어느 펜션. 택시에서 내리니 시간은 이미 밤 9시를 훌쩍 지나버렸다. 어둠에 잠긴 펜션의 어딘가 을씨년스러웠다.
술을 마시고 있을까? 아니면 벌써 잠들었을까? 많이 삐졌을까?
갖은 고민들이 머릿속에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다급했다.
벌컥.
회의장 문을 열었다. 일제히 내게 쏠리는 시선들, 열 명이 넘는 카피라이터들의 시선을 받으니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다.
“아 오셨어요?”
하지만 술을 마시지도 삐지지도 않았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기획팀의 직원들, 그리고 홀로 일어선 채 화이트보드에 가득한 아이디어를 적어나가는 김다미.
“미안합니다. 많이 늦었네요.”
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직원들 사이에 앉았다.
“회의 계속합시다.”
날 보는 김다미, 녀석의 두 눈이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 * *
“괜찮으시겠어요?”
워크숍이 끝났다. 이제는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 승합차 보조석에 오르는 김다미의 물음에 어제의 악몽이 떠오른다.
“안 괜찮지. 근데 나 아니면 운전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거 같은데.”
“그렇긴 하네요.”
아이디어 회의가 끝난 건 새벽 한 시, 이후는 광란의 밤, 아니, 광란의 새벽이었다.
만만하게 보고 참석했던 회식 자리. 준비된 술이 바닥났다고 생각하면 귀신같이 새 술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취한 직원들은 내가 술 대신 물을 먹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마신 물이 큰 생수 한 통.
하지만 생 알코올에 절은 직원들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하나둘 꿈나라도 떠나고 있는 중이었다.
“너 아니었으면 나도 죽을 뻔했네.”
술 대신 생수를 따라주던 김다미의 필사적인 케어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시체가 되어 승합차 구석을 뒹굴고 있었을 거다.
“애들 주량으로 뽑았어? 뭔 술을 저렇게들 잘 마셔?”
“그러게요. 뽑아놓고 보니 회사 주량 원탑들만 모였어요.”
녀석이 쓰게 웃는다. 그런데 문을 닫으니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한다.
“어으. 다미야, 창문 열어라. 이러다 다 죽겠다.”
그렇게 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데 김다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결국 소득은 없네요.”
1박 2일간 기획 회의를 했지만 결국 멋진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수십 개의 아이디어 모두 버리기 아까울 만큼 괜찮은 것들이었지만.
‘광고제에 출품할 수준은 아니다.’
이번 광고는 무려 칸 라이언즈에 선보일 광고, 선택의 기준 역시 그에 맞춰야 했고 그래서 수십 개의 후보 중에 기준을 충족하는 아이디어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워크숍 한다고 무조건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
좋은 기획, 신선한 아이디어란 언제나 그렇다. 원하지 않아도 품속으로 달려들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몇 날 며칠을 헤매어도 소득 없다.
“편하게 생각해. 팀워크 다진 것도 큰 소득이잖아?”
“네…….”
녀석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부웅.
차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드렁드렁 직원들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팀장인 김다미도 과음을 했다. 잠들었나 싶어 바라보는데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전 생각나네요. 김 광고 찍으러 완도 갔을 때요.”
“그래. 그때도 워크숍이었지?”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전 이렇게 큰 차에 같이 타고 다니는 게 좋아요. 나중에 결혼하면 아이 많이 가질 거예요. 다 같이 이렇게 다니고 싶으니까.”
날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다.
“좋네. 대가족.”
“앞에 봐요. 앞에.”
“아 그래.”
핸들을 고쳐 잡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외동딸이거든요. 아빠는 툭하면 출장 가셔서 거의 엄마랑 지냈어요.”
처음 듣는다. 녀석의 어릴 때 이야기.
“그래서 생긴 로망이에요. 투덕대는 애들을 큰 차 뒤에 태우고 이렇게 아빠는 운전하고 엄마는 먹을 거 집어주면서 멀리 떠나는 거요. 바다도 좋고 산도 좋고……. 대표님은 그런 로망 없어요?”
녀석이 물어온다.
“……아.”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대표님?”
“……다미야. 지금 내 말 좀 받아 적어봐.”
“네?”
당황하는 녀석.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녀석의 로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고생한 직원들을 뒤에 태우고 운전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만났다.
이야기와 상황이 맞물리며 머릿속에 멋진 아이디어가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지금 안 적으면 사라질 것 같아.”
이 느낌, 이 시퀀스. 지금 기록해 두지 않으면 두 번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 네!”
녀석이 가방에서 후다닥 노트북을 꺼낸다.
“……준비됐어요.”
“등장인물은 60대 남편과 아내, 첫 테이크는 차 안에서 시작해. 지금처럼 아내는 보조석에 남편은 운전대를 잡고 있고, 뒤엔 쓸데없는 짐만 몇 개 뒹굴고 아무도 없어.”
“네……”
“승합차야. 그리고 아주 낡았어. 전면 유리창이 군데군데 깨져서 그중 하나는 길게 금이 가 있는 거지. 그걸 테이프로 붙여 놨어, 더 깨지지 말라고. 군데군데 녹도 좀 슬었고…….”
타닥, 타다닥.
부웅.
달리는 차, 옆에서 열심히 아이디어를 받아 적는 김다미.
곤히 잠든 직원들을 태운 차는 새로운 광고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아슬아슬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