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100화
100. Accelerando, 점점 빠르게(5)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던 올해 여름도 어느새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DNP 애드 월례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실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회의실. 이미래 팀장의 회의 선언과 함께 준비한 자료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먼저 미디어팀 진행 상황 보고 드리겠습니다.”
월례회의는 각 팀의 현안과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 미디어팀을 이끌고 있는 조영찬의 목소리엔 묘한 긴장감이 묻어났다.
“공식 채널 구독자 수가 안정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추세대로라면 10월엔 50만 명을 넘길 걸로 추정됩니다.”
애드온 합병 이후 가장 탄력을 받은 사업 분야가 바로 미디어팀이었다. 과거의 미디어팀은 회사가 만든 광고를 업로드하고 관리하는 것이 업무의 전부였다.
하지만 애드온이라는 전문 미디어 제작회사가 한 식구가 되었다. DNP만의 오리지널 콘텐츠는 물론 외부의 너튜브와 온라인 영상제작 의뢰를 통해 미디어팀은 가장 큰 성장을 이루고 있는 팀이 되어 있었다.
“다음 주에 크리에이터 매니지먼트 회사 두 곳과 제휴 미팅이 있습니다. 결과는 별도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영찬의 발표가 끝났다. 이어지는 발표는 이미래.
“지금 디자인팀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내 알 수 있었다. 화면에 떠오른 미디어팀의 업무 건수, DNP 창업 후 단 한 번도 줄어든 적 없어 업무 건수가 최근 한 달간 수직상승 하고 있었던 것.
“일에 치여 죽기 일보 직전이에요. 저희 좀 살려주세요.”
애원하는 이미래의 목소리,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격식 없는 그녀의 언사는 늘 딱딱한 회의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마력이 있다. 이미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장점이다.
“그렇겠네요. 다들 아시겠지만 디자인팀의 업무가 무척 과중한 상태입니다.”
자신의 노고를 인정해 주는 목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크게 끄덕인다.
“지원팀장님께서는 디자인 2팀 신설을 서둘러 주세요. 그전에 현재 처리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는 업무는 애드온 쪽에 넘겼으면 하는데…….”
고개를 돌렸다. 거긴 진한 갈색의 비즈니스 정장을 차려입은 애드온의 신임 대표, 차혜민이 있었다.
“차 대표님 괜찮으시겠지요?”
“네…… 물론이죠.”
고개를 돌린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 건은 본사에서 애드온에 정식으로 의뢰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이관 업무에 대한 의뢰비는 빠른 시간 안에 산정해서 올리도록 할게요.”
“하하…….”
칼 같은 업무 정리. 그녀가 애드온의 신임 대표가 된 지 이제 고작 보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완벽한 애드온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그래야죠. 두 회사는 엄연히 독립적인 회사니까요.”
자신의 회사에 이익이 되는 건 한 조각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고작 보름 만에 애드온을 완벽하게 휘어잡은 차혜민의 참모습이었다.
미디어팀, 디자인팀의 발표가 끝나고 기획팀의 발표가 이어졌다.
“보시는 바와 같이 저희 광고가 성수 기획의 광고가 선호도 조사에서 1% 내외의 각축을 벌이고 있습니다. 광고 종료 시점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큰 변화가 없다면 다가올 가을 냉장고 광고 역시 양사의 경합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김다미의 똑똑 부러지는 목소리,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늦여름 방송을 시작한 EM전자의 쿨리오 광고, DNP와 성수 기획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각각 제작된 광고는 한날한시에 전파를 탔다.
신선함과 아이디어 측면에서는 우리 광고가, 영상미를 바탕으로 제품을 부각하는 데는 성수 기획, 경하나의 광고가 우세할 거라는 내 예상은 적중했다.
가을 대형 냉장고 광고를 위해 광고 온라인 조회 수, 제품을 구매해 준 고객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종합한 광고 선호도 조사가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던 것.
“알겠습니다. 경합의 가능성도 있지만 선호도가 반반이면 저쪽으로 넘어갈 공산이 높아요.”
회의 참석자들의 고개가 작게 끄덕였다.
“우리 입장에선 EM에 과하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다미 팀장은 성아 제약을 비롯한 다른 쪽 광고 기획에 더 신경 써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발표를 마치고 단상에서 물러서던 김다미, 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참, 중요한 보고가 있는데.”
난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주에 신한 제약, 그리고 다음 주에 아주 식품하고 미팅 잡혔습니다.”
‘아!”
직원들의 두 눈이 후욱 커진다. 언급된 두 회사는 우리에겐 무척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지금은 사라진 광인 기획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몇 안 되는 대형 광고주. 이후 각자 새로운 파트너와 일하던 그들이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
“알겠습니다. 두 회사 미팅엔 제가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스케줄 조율되는 대로 별도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각 부서의 보고가 끝났다. 하지만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보고를 마친 DNP의 직원들이 빠져나가고 자리엔 차혜민과 지원팀장 성재호만이 남았다.
“애드온은 좀 어떻습니까?”
“어떻긴요? 최주봉 감독은 며칠 못 버티고 때려치우고 나갔고, 그 뒤로 다들 눈치 보느라 죽을 맛이죠, 뭐.”
지난 워크숍 연회장에서 애드온 제작팀 해체를 선언한 이후, 며칠이 지나 유원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결정, 섭섭하세요? 감독님.”
-섭섭하긴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는 일종의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부대표님께서 절 감싸셨다면 아마 분위기 더 엉망 됐을 거예요. 지금은 오히려 분위기 좋아요. 차 대표님이라는 공통의 대악마가 등장했으니까.
애드온의 내부 소식은 다양한 경로로 접하고 있다.
차혜민 대표는 동등하게 평사원의 입장 이 된 제작팀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직원들 간 유대감 다지기에 한참이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광인 기획 악마는 이제 대악마가 되어버렸다.
지금 애드온 제작부는 신병훈련소와 같다. 선후배도 계급도 사라진 동급 한 입장의 훈련병들, 그런 훈련병들은 조교가 매섭게 몰아칠 땐 공포를 느끼지만 반대로 조금만 잘 대해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낀다.
지금 차혜민이 바로 그 조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하시는 데 문제는 없구요?”
“아직까지는요. 애드온 직원들 생각한 것보다 역량이 높아요.”
당면한 영상 제작을 임시조직을 구성해 쳐내고 있다. 덕분에 현장마다 메가폰을 잡는 사람이 달라지고 있지만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베테랑들답게 어렵지만 문제없이 잘 헤쳐 나가고 있는 것.
“슬슬 조직 구성 들어가야겠네요.”
“아뇨.”
차혜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이대로가 좋아요. 뭐 감독, 부감독 했던 녀석들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위가 고이는 바람에 밑에서 썩어가던 직원들 크는 게 보인단 말이죠.”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계급장 다 떼고 밭 한번 갈았으니까 이제 어떤 게 좋은 싹인지 나타나기 시작할 거예요.”
“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차혜민을 대표로 임명하면서 애드온의 전권을 넘겼다. 그녀의 지휘가 계속된다면 애드온이 전례 없이 강한 회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성재호 팀장?”
부름을 받은 안경의 사내, DNP의 내부 관리를 맡고 있지만 얼마 전 특별한 지시를 받아 조사를 마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네. 조사된 사항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자료로 만들어서는 안 될 내용, 성재호의 은색 안경테가 반짝 빛을 발했다.
* * *
“결국 중원이 움직였습니다.”
조용한 성재호의 목소리, 차혜민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재호, 확실해?”
“네. 그쪽 기조실이 직접 움직인 모양이더군요.”
지원팀장 성재호는 특별한 인재다, 대한민국 최대 기업 감사팀 출신인 동시에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 출신, 차혜민이 아니었다면 끌어안을 수 없던 인물이자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소유한 사람이다.
“은행 쪽부터 조사를 했답니다. DNP의 자금부터 뒤져본 거죠.”
“역시.”
“조사 결과도 이미 보고됐을 겁니다. 이제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는 사실 뻔하죠.”
“사람이겠네요.”
되돌아간 대답, 성재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당분간 직원 관리를 더 타이트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굵직한 광고 활동의 결과 중원이 나와 DNP를 눈치챘다. 이광배의 지시를 받은 기획조정실이 움직여 은행을 조사했다. 하지만 공격할 틈은 찾을 수 없었을 거다.
광인 기획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린 오랜 시간 공들어 기반을 쌓아왔다. 이제 같은 공격법은 통하지 않는다. 이광배의 다음 수는 정확히 예상할 수 없지만 가능한 수단은 이미 리스트업을 끝냈다.
그중 가장 유력한 다음 수는 인력 빼돌리기.
공들여 키운 직원을 빼돌리는 건 우리같이 작은 회사에게 엄청난 타격이 되니까.
“알겠습니다. 직원별 면담 늘리고 처우에 대해서도 재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성재호가 시선을 맞춰온다.
“우리 준비가 완벽해질 때까지 저쪽을 자극할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는 나와 이광배, 광인 기획과 중원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조언은 적절하고 정확하다.
“EM 광고 같은 게 그렇겠군요.”
“그렇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DNP는 올해 초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지만 그렇다고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더구나 한참 커나가는 시기이기에 타격을 받는다면 그 영향은 더욱 클 터.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보고를 마친 성재호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차혜민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생각엔 말이야.”
둘만 남았을 때만 편해지는 그녀의 말투, 전처럼 항상 들을 수 없게 된 그녀의 편한 말투가 반갑다.
“EM도 EM이지만 칸 라이언스도 같아. 출품하면 분명 미디어를 타게 될 텐데 틀림없이 저쪽을 자극하겠지.”
“흠…….”
난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았다.
“게다가 반도 차 광고야. 중원 입장에서 더 민감한 사안이라고. 이번 출품은 보류하자. 광고제가 칸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오랜 시간 고민했다. 중원의 움직임을 지켜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수없이 반복된 고민이었다.
“아뇨.”
수 없는 고민의 결과는 늘 하나였다.
“그래도 출품할 겁니다.”
차혜민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난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칸 입상은 자유로운 회사가 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에요. 입상한다면 그때부터는 이광배도 우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래, 알아. 수상한다면 대한민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회사가 되겠지. 제아무리 이광배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야. 근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주먹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칸 입상이 쉽니?”
그녀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간다.
“칸이고 클리오고 뉴욕 페스티벌이고 심사위원 싹 다 서구 애들인 거 알잖아. 하이라이트는 변함없이 북미와 유럽이라고. 아시아에서는 겨우 태국 정도나 주목받는 게 현실이야.”
흘러나오는 대한민국 광고의 현실.
“대한민국 여전히 광고 약소국이야. 출품했다가 무관으로 끝나면 저쪽만 자극하는 일이 될 수 있어.”
“알아요……. 그런데.”
웃었다. 계산 따윈 없는 순수한 미소였다.
“그래도 하고 싶어요.”
그것은 분명 내 안을 가득 채운 열정이 피워 올린 불꽃.
“에휴…… 그래, 더는 못 말리겠네.”
차혜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