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99화 (99/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99화

99. Accelerando, 점점 빠르게(4)

“새 회사 대표를 맡아주세요.”

웬일로 자신의 집무실에 찾아온 내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다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차혜민.

“뭐?”

그녀가 놀라 뒤돌아본다.

“애드온 말입니다. 이사님께서 신임 대표를 맡아주세요.”

찻잔을 손에 든 채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차혜민,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스튜디오 판타지아 인수 검토를 시작할 때부터 대표 자리엔 차혜민을 생각해 두었다. 이유는 하나.

“이사님의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거든요.”

판타지아는 특이한 회사다. 전 대표의 방만한 경영과 마구잡이 인재 영입 덕에 엉망진창 회사가 되어 있었던 것.

오랜 시간 유원석의 제작팀과 일하면서, 또 그들과 술잔을 들으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내게 판타지아의 현실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좋은 인재들을 가득 모아놓고 안에서부터 썩어들어 가고 있는 회사.]

결국 판타지아가 적자에 허덕였던 이유였다. 이제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

단, 조심스럽게 문제만 정확히 잡아내 잘라내야 한다. 자칫하면 어렵게 모아놓은 인재들이 우르르 빠져나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판타지아가 잘못 만지면 깨져버릴 수 있는 유리잔 같다고 생각한 이유이자 반도 차를 통한 간접인수라는 플랜B가 불가능했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 역할에 차혜민만 한 사람이 없다.

“걔들 나 싫어할 텐데. 전에 그 회사 완전히 뒤집어 놓은 적 있단 말야.”

들어본 적 있다. 촬영 준비 30분 늦었다는 이유로 촬영 중단에 더해 판타지아까지 쳐들어갔다는 이야기.

그건 실수를 일삼는 상대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자 광고 기획사를 우습게 보는 제작사에 날리는 강력한 어퍼컷이었다.

전 대표가 차혜민에게 고개를 숙였고 전례 없던 사건에 판타지아 직원들은 차혜민에게 ‘마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번에도 그래주셨으면 해요. 쉴 만큼 쉬셨잖아요.”

광인 기획이 망하며 은퇴를 선택한 차혜민. 비상근 고문에서 가끔 출근하던 이사로, 어느 순간부터 매일같이 사무실로 출근하는 순간 난 확신했다.

그녀의 은퇴가 끝났다는 것을.

“……하긴 일 년 노니까 더 할 일도 없더라. 근데 무슨 제안이 이래? 내 연봉계약서는 어디 있는데?”

“하하…….”

그렇게 새로운 대표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직원들 앞에 새로운 대표로 소개되고 단상에 서기 전까지만 해도 찌푸렸던 표정은 단상에 서자마자 순식간에 날아갔다.

“차혜민입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광인 기획 본부장 출신이고, 지금은 DNP 이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대표로 마녀가 나타났다. 자유분방하던 직원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걸 보면 과연 마녀라는 별명은 아직 유효하다.

“판타지아는 최고 수준의 영상을 만들어온 회사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높은 역량 때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걱정 없이 지금껏 해온 대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주시면 됩니다.”

대표의 입으로 고용보장이 약속되었다. 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만, 곪은 상처는 잘라내고 갑시다.”

칼같이 단호한 목소리였다.

“전 대표가 왜 회사를 팔아야 했는지, 왜 만성 적자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는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바꿔봅시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고 굵은 취임 인사였다.

짝짝.

누군가의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짝짝짝.

박수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차혜민 대표가 내게 시선을 보내온다.

씩.

난 새로운 대표가 된 마녀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워 보냈다.

* * *

저녁 시간이 되어 시작된 식사 시간, 출장뷔페와 준비된 술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고 DNP 애드온 백여 명의 직원들이 자유롭게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자, 한 잔 받으세요.”

차혜민 대표가 자리에 있을 땐 침묵을 지키더니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최주봉의 목소리가 은근해진다.

“아 네.”

“전에 회사 찾아오셨던 거 기억나요. 그때도 두 눈에 총기가 반짝반짝하는 것이 보통 분이 아니구나 했었는데, 역시 관상이 틀리지 않구나 싶어요.”

잔에 술이 차오른다. 그의 제작팀 직원들이 테이블 위 빈 접시를 채우고 좋은 안주를 깔끔하게 담아놓은 접시를 올려놓는다.

“아 괜찮습니다. 제가 가져오면 돼요.”

아무리 대표에 대한 예우라지만 이런 식은 부담스럽다. DNP에서도 쓸데없는 격식은 빼고 일에만 집중하자는 게 내 원칙이니까.

“됐어. 가.”

눈치 빠른 최주봉의 손짓에 직원들이 후다닥 물러난다. 이제 둘만 남은 테이블, 먹고 마시며 흥을 돋우는 직원들의 왁자지껄함 속에서 그가 시선을 맞춰왔다.

“……대표님.”

“부대표입니다.”

“네 부대표님, 근데 사실 대표님이시지 않습니까? 모회사 대표에 오너시니까.”

그가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다.

“실례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 그러세요.”

오너와 직원이지만 연배는 저쪽이 높다.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원식 감독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의외의 질문을 던져온다. 유원식 감독, 광인 기획부터 오랜 시간 나와 손발을 맞춰온 촬영감독. 관계가 계속 유지된 만큼 나쁜 감정은 없다. 친한 것도 아니고.

“좋은 분이십니다. 특히 자기 일에 진심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랑 오랫동안 같이 일하셨던 걸로 아는데 술도 자주 드셨나요?”

머릿속에 지난 완도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가 유원식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을 마셔본 기억이었다.

일을 마치고 펜션에 도착했을 때 유원식은 이미 취해 있었고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술잔 덕에 그날 밤 난 해변 모래를 이불 삼아 잠이 들었다.

“아니요. 딱 한 번 같이했는데 그 이후로 마셔본 적 없습니다.”

판타지아와 금주령을 내리게 만들었던 날카로운 기억.

“그렇군요.”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두 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닌가 보군요.”

유원식과의 친분을 묻는 그의 의도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래서 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일로 만난 사이죠. 알고 지낸 기간도 2년 채 안 되구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가 더욱 은근해진 목소리로 속삭인다.

“제게 제작부를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상했던 부탁이 흘러나온다.

“사실 저희 팀하고 저 팀 많이 안 좋습니다. 저희 팀은 오리지널 멤버, 저쪽은 경력직원 위주라서 일종의 경쟁 관계가 형성이 됐죠.”

“그렇군요.”

난 짐짓 모르는 척 흥미로운 표정을 꾸며냈다.

“특히 유원석 저 친구가 욕심이 좀 많아요. 자기를 방해한다 생각하는지 글쎄 얼마 전엔 제 멱살까지 잡지 않겠습니까?”

그가 핸드폰을 내민다. 거긴 누군가 촬영한 당시의 현장. 분노한 유원식이 최주봉의 멱살을 잡아 올리는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그건 회사의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잘잘못을 떠나 사내 폭력이라니 안 될 말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제작부 이대로는 안 됩니다. 모래알 같은 조직을 통제할 사람이 필요해요.

“그게 최 감독님이시다?”

“네.”

그가 활짝 어깨를 편다.

“부끄럽습니다만 저 제작부 최고참에 유원석보다 실적도 훨씬 좋습니다.”

그건 마치 출전을 청하는 선봉장의 목소리 같았다.

“한번 맡겨주시면 갈라진 두 팀을 하나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절대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그래요?”

호기심 넘치는 표정을 그려냈다.

“그 영상은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핸드폰을 넘기는 최주봉. 난 동영상을 내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한 회사에 대립하는 두 팀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습니다.”

유달리 크고 우락부락한 얼굴, 그 얼굴이 활짝 웃었다.

* * *

“어디 갔다 와?”

자리를 비운 새 날 찾았는지 양 볼이 벌게진 차혜민이 물어오다.

“아. 볼일이 있어서.”

“취했어? 혹시 또 길에서 자고 온 거?”

“아니거든요?”

술에 대한 아픈 기억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일이 있은 후 내 신조는 첫째도 술 조심, 둘째도 술 조심이 되었다.

“슬슬 마무리하자. 자고 갈 거 아니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모임은 새로운 직원들이 주인공이다. 대표나 부대표는 적당한 타이밍에 빠지는 게 좋다.

“네. 그만 가야죠.”

말을 마치고 연회장을 살폈다. 달아오른 흥에 왁자지껄한 연회장. 가무 행사가 있었는지 마침 사회자의 등 뒤에 화면이 켜져 있다.

[자, 아쉽지만 1차 행사는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때마침 마이크를 잡고 있던 사회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안덕모 부대표님 말씀 한번 들어봐야죠.]

사회자가 박수를 유도한다.

“와아!”

“안덕모! 안덕모!”

달아오른 직원들이 연호하는 내 이름. 난 볼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부대표님 이리 올라오세요.]

“뭐 해? 가봐. 부르잖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단상에 올랐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넘겨준다. 기대 어린 직원들의 눈길을 받으며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재미들 있으신가요?”

“네에!”

“다행이네요. 워크숍을 금요일 저녁에 잡았다고 해서 욕먹겠구나 생각했거든요.”

“하하하.”

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단상 옆 화면을 위해 켜 둔 노트북으로 다가갔다.

“저에겐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다양한 개인이 모이는 회사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싸움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

노트북과 핸드폰을 연결했다. 등 뒤의 화면이 바뀌고 핸드폰 다운로드 폴더가 열린다. 움직이던 마우스 커서가 동영상 하나에 멈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웃으며 일해도 힘든 게 직장생활이지 않습니까. 근데 아쉽게도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더군요.”

최주봉과 눈이 마주쳤다. 내 의중을 간파한 그가 씩 웃어 보인다.

딸칵.

파일을 클릭하자 문제의 동영상이 화면에 떠오른다.

영상 속 조용하던 회의실. 잠시 후 쾅,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 감독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촬영이 코앞인데 직원을 빼돌려?]

분노한 유원석, 코뿔소처럼 한달음에 달려간 그가 최주봉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야. 안 놔? 회사에서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회사야? 회사냐고!]

딸칵.

영상이 멈추었다. 이 영상이 왜 내게 있는지 놀라고 당황한 얼굴들, 그리고 중간중간 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들.

“네……. 이 일은 여러분들이 저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회사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죠. 그런데 전 싸움 당사자인 두 사람보다 다른 데로 눈이 가더군요.”

난 노트북 옆을 뒹굴고 있던 레이저 포인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멈춘 영상의 배경처럼 등장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하나하나 동그라미를 그렸다.

“두 감독이 싸움을 하는데 수수방관하는 동료들.”

그중 한 직원의 얼굴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화면 속 그의 입꼬리는 길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비웃는 직원도 있네요.”

움직이던 레이저 포인터가 최주봉의 얼굴로 향한다. 입은 놓으라고 말하고 있지만 시선은 화면을 향한 채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고 멱살 잡힌 상황인데 이분은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네요? 다시 보니 각도와 구도도 뭔가 준비된 티가 나네요.”

딸칵.

영상을 처음으로 돌렸다. 영상 속 다시 펼쳐지는 조용한 회의실, 그리고 몇 초 후 쾅 하고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

“동영상을 촬영한 사람은 유원석 감독이 화낼 걸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탁.

던져놓은 레이저 포인터가 노트북 옆에 떨어졌다. 왁자지껄했던 연회장은 이제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그래서 가벼운 포인터가 떨어지는 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두 감독의 싸움, 싸움을 미리 알았던 사람들, 그걸 수수방관하는 직원들…….”

이제 흥은 완전히 깨어졌다. 떨리는 눈동자들만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어제는 판타지아였지만 오늘부터는 애드온입니다. 그래서 부대표의 직권으로 인사 명령을 내립니다.”

내 목소리는 준엄한 심판의 칼이 되어 직원들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갔다.

“지금부터 애드온 제작부엔 팀도 직위도 없습니다. 팀 조직을 해체하고 감독부터 직책장까지 모든 직위를 일괄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타악.

누군가 맥주캔 떨어뜨리는 소리만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제작부는 이제 모두 똑같은 사원입니다. 당분간 촬영은 임시조직을 만들어 하도록 하고, 향후 조직 구성은.”

차혜민을 바라보았다. 애드온의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경악한 그녀의 얼굴.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며 짧은 문장 하나를 만들어낸다.

[미치겠네.]

“신임 대표님께 맡기겠습니다.”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단상에서 내려왔지만 아까와 같은 박수는 고사하고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창백해진 얼굴 중 유난히 큰 최주봉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피식.

그리고 당황한 그에게 보내줄 수 있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그만 가시죠.”

“에휴.”

긴 한숨을 내쉬는 차혜민, 난 그녀와 함께 흥 깨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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