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96화
96. Accelerando, 점점 빠르게(1)
“그래. 그쪽 분위기는 좀 어때?”
전화기에서 김다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좋아요. 메이킹 샷이랑 이미지 뽑아야 할 게 많아서 모델이 짜증 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받아주시네요.]
녀석은 지금 EM 냉장고 광고 촬영 현장에 있다. 이번 광고의 결과로 가을 주력 라인업의 냉장고 광고의 승패가 결정되기에 내가 촬영에 참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지만 녀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맡겨주세요. 정말 잘 만들어 볼게요.’
어디서 그리 승부욕이 일어나는지 녀석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못해 전투적이기까지 했다.
“문제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 늦게라도 넘어가 볼게.”
[아뇨, 대표님 바쁘시잖아요. 이번일 어떻게든 제 손으로 마무리해 볼게요.]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컸지? 진지한 녀석의 대답이 무척 대견하다.
바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EM 경쟁 입찰 때문에 역량을 쏟아부은 덕분에 쳐내야 할 일들이 가득 쌓였다. 이럴 때 대응해 줄 직원이 있다면 좋겠지만 DNP의 대부분은 새로운 직원들.
결국 쌓인 일을 쳐내야 하는 건 내 일이 되었다.
“그럼 맡길게. 잘해봐.”
이제 김다미라면 등을 맡길 수 있다.
[감사합니다. 어? 촬영 시작하네요. 그만 끊어요.]
“그래.”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는데 때마침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차혜민.
슥.
도착한 메시지를 보니 그녀가 추진했던 일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결과는 순조롭다.
톡톡.
고생하셨고 감사하다는 답장을 적어놓고 있을 때였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낯선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난 재빨리 적어놓은 메시지를 전송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아 제약 마케팅팀장 주석훈입니다.”
“김다정입니다.”
쌓여 있던 일들 중 가장 급한 건.
난 새로운 광고주인 조아제약 직원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DNP 애드 안덕모입니다.”
* * *
광고 기획사의 스타일은 가지각색이다. 그중 대부분의 기획사가 까다롭게 광고를 검토한다.
광고 한 번 찍기 위해 광고주의 마케팅 전략부터 USP까지 세심한 검토를 거치고 방향에 맞는 기획을 만드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TV 광고의 경우 기획사의 평판을 좌지우지하기에 대부분의 기획사가 까다롭게 광고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
반면 어떤 기획사는 전혀 까다롭지 않다. 광고주의 요구에 자신을 맞춰 뚝딱뚝딱 광고를 만들어내며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열흘 안에 실질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광고엔 문제점이 많다.
회사의 전략과 USP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광고가 따로 노는 상황이 펼쳐지며 때론 광고주를 아연하게 하는 결과물일 경우가 많다.
기획 컨펌까지 끝나고 들어가는 촬영에서 광고주와 기획사 간 싸움이 난다? 그건 백이면 백, 그런 경우다.
하지만 DNP는 다르다. 우린 광고주의 전략을 세심히 따르면서도 비슷한 급의 광고 기획사보다 훨씬 빠르게 기획과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런 쪽의 스페셜리스트였던 광인 기획의 경험과 마케팅 실무자였던 대표의 경력이 만나 이루어낸 DNP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 중 하나였다.
‘광고주가 원하는 결과물을 빠른 시기에.’
회사를 창업한 이후 광고주들의 뇌리에 아로새겨진 DNP에 대한 평가였고 덕분에 분야를 확장하고 있는 우리에게 납기가 급한 광고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일정이 아주 급합니다. 필요한 건 뭐든 지원할 테니 빠르게 촬영에 들어갔으면 합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신속을 요하는 광고의 경우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을 확률이 높다. 찍던 광고가 모종의 문제로 엎어졌거나, 제품 자체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거나.
그래서 그 이유를 확인하는 건 일종의 불문율.
주석훈 팀장이 김다정과 눈을 맞춘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다정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대표님의 변덕과 최악의 날씨가 만났죠.”
김다정이 설명을 시작했다.
성아 제약은 중간 규모의 제약회사다. 다양한 약품의 제조를 하고 있지만 그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살충제. 그중에서도 모기를 대상으로 한 제품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성아를 대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력 사업은 해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위생이 개선되며 모기를 잡아야 할 필요는 대부분 사라졌다. 모기 유충이 자랄 수 있는 웅덩이는 대부분 사라졌고 사람들은 고층 아파트에 살게 된 데다 촘촘한 방충망의 보호까지 더해져 한해 여름을 모기 한번 물리지 않고 보내는 경우도 많아졌다.
시장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게다가 글로벌 브랜드까지 국내 사업을 본격화했다. 덕분에 성아 제약은 살충제 사업을 접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최악의 고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날씨. 올해 날씨는 참으로 특이했다. 하루 비 오고 하루 쨍하고. 7월 장마에도 퐁당퐁당 비 오고 개고를 반복한 덕에 뉴스도 모기 개체 수 증가에 대한 뉴스를 다루기 시작했다.
“뭐 봄까지만 해도 사업 철수 쪽으로 가닥 잡고 계셨으니까, 광고 생각도 안 했죠. 이번 성수기만 대응하고 설비 매각까지 검토하고 있었으니까요.”
살충제의 수요가 급증했다. 물론 대부분의 과실은 글로벌 회사로 넘어갔다. 사업 철수를 고민하며 사업을 축소하고 있던 성아 제약 입장에선 아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 대표님이 갑자기 결정하신 거예요. 광고를 하기로. 근데 그걸 열흘 안에 만들어야 해요.”
한숨 같은 목소리. 마케팅 입장에선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부터 광고 기획사를 향한 필사의 구애가 시작되었다. 수십 곳의 광고 기획사에 무척 좋은 조건을 걸었지만 열흘 안에 TV 광고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연락에 연락이 닿아 DNP에 대한 정보를 얻었던 것.
“……이게 가능할까요?”
주석훈 팀장이 기대 어린 눈빛을 한 채 물었고.
“음.”
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광인 기획 시절 급하게 광고를 만들기 위해 눈길을 뚫고 달려갔던 대관령 양떼목장.
“쉽지 않은 일입니다.”
돌아간 대답에 주석훈의 눈썹이 축 처진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죠.”
금세 바뀌는 얼굴,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그의 모습이 조금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상황은 명확하다. 광고 계약에서의 갑과 을이 뒤바뀐 상태. 판을 좌우하는 키는 내 손에 있으면 난 그걸 호락호락 광고주에게 넘길 생각이 없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면 모든 조건이 그림처럼 맞아야 합니다.”
난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러려면 우선 계약서에 사인부터 해야겠지요.”
두 사람이 종이로 들어갈 것처럼 집중한다. 계약서 말미에 쓰여 있는 광고 금액을 확인한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진다.
“금액이 이렇게나 많이 드나요?”
“네. 물론입니다.”
아쉽지만 이 금액은 사기도 과장도 아니다.
“촬영 장소, 촬영팀, 모델, 편집까지 미리 예약된 일정 다 뒤로 미루고 우리 일정에 맞춰야 합니다.”
“아…….”
헤벌레 벌어지는 두 광고주를 보며 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결국 다 돈이거든요.”
광고주의 급한 일정에 맞춰주는 것도 험난한 일인데 이익까지 희생할 순 없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감안한 견적이어서 상황이 잘 풀리면 우리 쪽 마진으로 돌아오는 조건이지만.
지금 DNP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종합 광고 기획사가 되기 위한 중요한 분기점에 와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광고주를 바라보는 내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리고 그걸 조금 다른 뜻으로 해석한 주석훈 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금액 조율은…… 아닙니다. 힘들겠지요.”
내 할 말까지 미리 해주는 거 보면 이 게임은 끝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결재는 받아야 해서.”
주석훈이 김다정에게 계약서를 넘겨준다. 그걸 받아 든 김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후다닥 사라진다.
그사이 성아 제약의 살충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나하나 소중한 광고 포인트가 될 것들이었기에 노트북을 두드리는 내 손길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팀장님.”
돌아온 김다정이 결재판을 내민다. 그걸 받아 든 주석훈의 입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린다. 결재판이 열린 채 내 앞에 놓인다. 거긴 성아 제약의 도장이 찍힌 광고계약서가 끼워져 있었다.
“승인 났네요. 바로 시작하시죠.”
잘하면 보통의 광고를 찍었을 때보다 세배 이상의 마진이 확보되는 광고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난 자꾸만 흘러나오려는 미소를 힘껏 억눌렀다.
성아 제약에서 다음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내내 통화를 했다. 나름 업계에 오래 있다 보니 이제 전화로 세부 사항을 조율하는 건 일상처럼 되어버린 상태였다.
성아 제약 살충제 광고 기획은 이미 머릿속에 완성된 상태. 필요한 촬영장과 모델, 촬영 스태프를 조율하는 동안 내가 운전한 차는 어느새 강남 한복판의 거대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지잉.
회사를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온 경비. 창문을 내리니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어떻게 오셨나요?”
보조석 창문 높이로 허리를 숙인 그의 가슴팍에 익숙한 엠블럼이 눈에 들어온다. 미국에서 광고를 만들 때 좋은 영감을 떠오르게 만들었던 바로 그 모양.
통일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대로 따온 반도 자동차의 엠블럼.
“안덕모라고 합니다. 김형준 부회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아! 네.”
그가 그렇지 않아도 잔뜩 굽히고 있던 허리를 더욱 숙였다.
“비서실 지시가 있었습니다. 지금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차를 세우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큰 실례라도 한 사람처럼 두 손을 흔든다.
“제가 주차하겠습니다. 그냥 가시면 됩니다.”
반도 자동차의 사옥. 이곳의 광고를 담당하면서 몇 번 와본 곳이지만 내 위치가 달라져서였을까? 거대한 빌딩 전체를 자신의 직원들로 채운 반도 차의 모습이 오늘따라 참 부럽다.
손님 안내를 전담하는 인포메이션도, 출입구를 지키며 눈을 번뜩이는 경비도, 거대하다 못해 공허하게까지 느껴지는 멋진 로비도.
“야! 안덕모.”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
거긴 김형철과.
“안 대표님. 더 멋져지셨네요.”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 반도 차의 부회장 김형준이 있었다.
* * *
“안 그래도 차혜민 이사님한테 얘기 들었어.”
반도 차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회의실. 난 김형철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회의실 내부를 살폈다.
“솔직한 내 생각은 반반이야. 중원 놈들 냄새 맡을 게 기정사실인데 굳이 지금 시기에 투자를 해야 할까?”
보통 회의실은 아니다.
가성비를 최우선으로 하는 일반적인 회의실 테이블과 재질부터가 다르다. 한눈에 봐도 거대한 나무를 그대로 깎아 만든 고급 테이블.
바닥의 고급스러운 카펫은 고급스럽다 못해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회의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저 의자.
저건 절대 직원이나 임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인수를 해야 한다면 반도가 일차 인수를 하고 추후에 DNP로 인계하는 방식도 가능해요.”
김형준의 목소리.
“그래. 어떤 방식이든 DNP 입장에서 결과는 같아.”
“아니요.”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인수는 DNP에서 직접 해야 합니다.”
이번 일에 플랜B는 없다. 상대는 아주 조심스럽게 만져야 할 약하디 민감한 유리잔 같은 존재니까.
“에휴. 내 그럴 줄 알았다.”
김형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결정하세요. 두 분이라면 그렇게 부담스러운 투자도 아니잖아요?”
“네?”
김형준의 두 눈에 경악이 스친다. 미간을 찌푸린 김형철이 대꾸한다.
“얘가 대표 됐다고 돈 30억이 우스워진 모양이네?”
“빨리 결과나 알려주세요. 이럴 시간 없어요.”
30억이 우스운 게 아니다. 반도 차 오너 2세인 두 형제가 만만해서도 아니다. 다만 지금은 모든 결정은 빨라야 한다.
“인수 소문나면 중원이 가만히 있겠어요?”
“알았다 알았어. 할 거야 투자. 근데 그전에…….”
그가 말끝을 흐린다.
덜컥.
회의실의 가장 깊숙한 고급스러운 의자, 그 옆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두 형제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아버지.”
“오셨어요?”
“그래.”
거긴 휠체어에 앉은 반도의 오너. 김석만 회장이 있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이는 날 번뜩이는 눈빛으로 관찰하는 노인.
“그래. 그 카피라이터로군.”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