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92화
92. 인연과 악연, 그 어딘가(4)
“400리터급 냉장고는 주로 이런 형태입니다.”
말을 마친 윤재원이 노트북을 조작했다.
회의실 화면에 이미지가 떠올랐다. 색상은 다양하지만 한결같은 모습들.
“상부 냉동, 하부 냉장 구조로 전통적인 냉장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죠.”
윤재원의 설명대로였다.
아주 오래전, 세 가족이 함께 살았던 단칸방 한구석을 지키고 있던 하얀색 냉장고, 그 후 20년 이상 훌쩍 지났음에도 400리터급 냉장고의 모습은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판매량도 저조한 편입니다.”
이미지가 사라진 곳에 리터별 냉장고의 전년도 판매량이 떠올랐다. 100부터 300리터까지 유지되던 판매량 그래프는 400에서 500으로 넘어가자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후 700에 다다라서야 상승하기 시작한 그래프는 800 이상에서 최고점을 찍었다.
“재미있는 건 300리터 이하는 나름 선택의 폭이 넓어요. 세련된 디자인을 채택한 제품도 많고 투 도어, 싱글 도어 선택도 가능한 데다가 400리터급보다 훨씬 슬림하거든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1인 가구는 주로 그쪽을 선택하겠네.”
“네, 맞습니다.”
설명을 마친 윤재원이 노트북을 조작해 사진 몇 장을 띄웠다. 400리터와는 확연히 차별되는 제품. 같은 색, 같은 스타일이지만 400리터보다 거부감이 적은 슬림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그리고 그중에 EM의 오형택 차장이 말했던 스메그 냉장고도 있었다.
“사실 원룸이나 자취방에 들여놓는 목적으로 400리터급은 큰 메리트가 없어요. 혼자 쓰기에 300리터면 충분하고 아무래도 옛날 냉장고 형태니까요. 그래서 업계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윤재원이 쓰게 웃었다.
“가정용 냉장고 시장에서 400에서 500리터는 비무장지대라고.”
설명은 한참 더 이어졌다. 모든 설명을 들었을 때 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는 EM전자의 신제품인 쿨리오가 생각보다 어려운 시장에 도전한다는 것.
비무장지대라고 불릴 만큼 경쟁자가 없는 시장이지만 반대로 그만큼 수요층도 얕다.
이미 경쟁자가 즐비한 300리터 이하 시장보다 리스크는 적지만 전략이 실패하면 제품이 무관심 속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윤재원이 꼭 필요한 인재였다는 것.
“그래서 쿨리오에 800리터 시장에서 성공했던 방식을 적용한 겁니다. 상, 하부를 일대일 비율로 조절하고 전면 패널 디자인을 소비자 입맛에 맞춰 원하는 대로 구성할 수 있게 만들어준 거죠. 나름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윤재원의 설명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우린 고작 30분 만에 내수 냉장고 시장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단언컨대 전문가를 초대하더라도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DNP의 눈높이와 상황에 맞춘 것이 아니니까.
“좋은 자료네. 고생했어, 윤재원.”
게다가 윤재원이 이 자료를 고작 한 시간 만에 만들어냈다. 난 진심으로 녀석의 가치와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물론 녀석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지만. 그때 김다미가 물었다.
“그래서 이번 광고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해?”
윤재원이 준비된 답을 내어놓는다.
“네. 역시나 디자인입니다.”
이로써 광고에서 보여줘야 할 핵심 포인트는 잡았다. 물론 그렇다고 좋은 광고 기획이 뚝딱 나오지는 않았다.
“알겠는데 사실 막막하긴 하네요. 뻔한 아이디어만 계속 생각나요.”
김다미의 말처럼. 그저 예쁜 공간에 예쁜 제품을 배치해 놓은 샷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이번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뾰족한 아이디어가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각자 아이디어 구상해서 내일 다시 모이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장판교의 장비처럼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 깜짝이야.”
“못 볼 거 봤어? 뭘 놀라고 그래?”
거긴 이틀에 한 번꼴로 출근해 DNP 직원들의 큰 언니이자 큰 누나로 자리매김한 차혜민이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차 한잔하실까요, 대표님?”
대표라는 직함이 아직 어색하다. 그나마 어린 직원들이 불러주면 덜하지만 차혜민 같은 사람이 부르면 더더욱.
“대표 말고 그냥 이름 불러주시면 안 돼요?”
“싫은데? 공사 구분은 명확해야지. 여긴 회사라고.”
난 온몸에 오소소 닭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 * *
“자. 마셔봐.”
뚝딱 만들어낸 차가 내 앞에 놓인다. 청자색의 두툼한 찻잔, 그 위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모양새도 예쁘고 향도 좋다. 하지만.
“커피나 율무차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없는데?”
차혜민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도 이미래 팀장처럼 차를 힘들어한다는 것을.
물론 원래부터 차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녹차도 마시고 보리차도 좋아하고 홍차에도 거부감은 없다. 편의점에서 판매되는 수많은 차 중 어떤 걸 골라 내밀어도 거부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히비스커스야. 어렵게 구한 좋은 차니까 빼지 말고 쭉.”
“컥.”
하지만 차혜민의 차는 그 레벨이 다르다. 뭔가 몸에 닿자마자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느낄 수 있는 독과 같달까?
“처음엔 다 그래. 참고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푹 빠진다니까?”
그녀는 DNP 직원들의 멘탈을 케어해 주는 중요한 역할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차를 통해 그들을 괴롭히는 역할도 하고 있다.
오죽하면 차혜민이 회사로 들어오기 전 달았던 고문이라는 직함이 차로 사람 고문한다고 해서 붙은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을까.
꿀꺽.
하지만 다 마시지 못하면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고약한 향에 오랜 시간 고통받는 대신 원샷을 택했다.
“잘 마시네. 한 잔 더 줄까?”
“아뇨, 아뇨.”
난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회의는 잘됐어?”
날 부른 게 차를 먹이기 위함만은 아니었던 모양.
“아뇨. 아직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네요.”
“하긴 그럴 거야. 냉장고라는 물건 너무 뻔한 물건이니까.”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번 광고를 해보자고 결심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과거의 광고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예상은 적중했다.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주부거나 쉐프. 그들이 그림 같은 모습으로 요리를 하고 냉장고는 그 한편에서 존재감을 발한다.
세련된 주방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냉장고를 카메라 조망하고 광고의 엔딩신이 나온다.
메인 모델이 냉장고를 쓸어내리거나, 그 옆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그 후 헤드카피가 떠오르고 끝.
모든 냉장고 광고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식이었다.
“나도 생각해 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더라. 게다가 이번 제품 디자인을 강조한 제품이라며.”
차혜민의 말대로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광고에서 빼놓을 수는 없기에 결국 인테리어 된 실내 세트가 있어야 하고 거기서 찍을 수 있는 광고란 더욱 뻔하다.
주목받는 광고 모델을 써서 튀는 광고를 만들 수는 있지만 경쟁 PT에서 발표하는 기획안에 그런 모델을 등장시킬 수는 없다.
콘티에 서이준 같은 배우를 써먹을 수는 없으니까.
“네. 좀 답답하네요.”
“흠.”
손가락으로 턱 끝을 톡톡 두드리던 차혜민, 그 입은 잠시 후 열렸다.
“광고 중에 괜찮은 기법이 하나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차혜민은 아주 오랜 시간 능력 있는 대선배 카피라이터,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 일했지만 난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식의 조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떤 건데요?”
그래서 호기심이 동한다. 난 귀를 활짝 열고 그녀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기대의 배반이라고 들어봤어?”
“……반전 같은 건가요?”
“비슷하지만 달라. 반전은 스토리 진행을 통해 예상되는 결말, 즉 클리셰를 비트는 거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 기법인 기대의 배반은 출발선부터 달라. 예를 들면 지금 막 TV에서 냉장고 광고가 시작돼. 그걸 보는 사람은 어떤 기대를 할까?”
난 눈매를 좁혔다.
“음…… 얼마나 예쁠까, 수납과 편의 사항은 얼마나 좋을까.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지. 냉장고는 정말 기대치가 뻔한 제품이야.”
들어 올린 차로 입을 적시며 말을 잇는다.
“그 뻔한 기대를 배반하는 거야. 익숙한 광고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 그래서 누구나 기대했던 기대를 출발점부터 비틀고 들어간다는 거지. 냉장고 같은 제품이라면 그 효과가 더 클 수밖에 없고.”
“……비튼다? 아!”
그것은 마법이었다. 차혜민의 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내 머릿속에 놀라운 변화를 불러왔다.
오랜 시간 냉장고를 접하며 자연스레 생겨난 통념, 윤재원의 설명으로 알게 된 새로운 정보. 그리고 벼락치기로 본 수많은 광고의 광고들.
그것들은 단단한 껍질에 쌓인 씨앗 상태로 머리 구석구석에 뿌려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차혜민의 말은 하나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하나의 씨앗에서 새싹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동시다발적으로 단단한 씨앗을 뚫고 새싹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
새싹은 무서운 기세로 자랐다. 사람 높이를 넘어, 건물 높이를 넘어 이제는 하늘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솟아오른다.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하는 나무들은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 그리고 먹구름 낀 하늘까지 솟구쳐 오른다. 마치 꽉 막힌 생각의 벽을 뚫어내는 창처럼.
하늘을 뚫린다. 구멍 난 하늘에서 문장 하나가 햇살처럼 흘러나온다.
며칠 전 EM전자 미팅에서 본 제품 자료. 누군가 먼저 본 흔적이 역력해서 대충 보고 치웠던 거기 쓰인 문장.
[신기술 모터와 소음 차폐 기술로 구현된 압도적인 정숙함.]
“뭔가 떠올랐나 보구나?”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차혜민이 웃는다.
“아…… 네.”
대답과 동시에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덜컹.
거친 기세에 테이블 모서리가 다리를 부딪쳤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다.
덜컥.
급히 걸었다. 머릿속에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놀라운 마법을 당장 적지 않으면 당장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급히 찾아 들어간 회의실. 아이디어가 없어 한숨을 내쉬고 있던 김다미와 윤재원이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펜 어디 갔지? 펜.”
다급한 말에 윤재원이 반응했다. 회의실을 빠져나간 급히 보드마카를 구해 내민다.
슥슥.
받자마자 화이트보드에 글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제게 무슨……?”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떠오르는 것을 옮기는 손만 바삐 움직일 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
난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탁.
보드마카를 내려놓고 화이트보드를 살폈다.
큼직한 보드가 글과 그림으로 가득하다. 글씨는 휘갈겨졌고 그림은 알아볼 수 없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도저히 알아보지 못할 지경.
용케 그 안에서 뭔가를 찾아낸 김다미가 중얼거렸다.
“설마 쿨리오 광고 콘티예요?”
“그래.”
“세상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녀석.
“하나도 못 알아보겠어.”
“설마 저 네모가 냉장고예요?”
화이트보드를 가득 채운 정체불명 낙서, 그걸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두 사람. 난 힘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