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90화 (90/180)

광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90화

90. 인연과 악연, 그 어딘가(2)

8월, 해가 져도 낮의 열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딱 열 걸음만 걸어도 땀이 차오르는 밖, 덕분에 에어컨으로 시원해진 실내는 한결 더 쾌적해진다.

창 너머 오늘도 열대야가 찾아든 거리에서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부모님 반대 엄청 심했죠.”

난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렸다.

“뭐가 못나서 그런 코딱지만 한 회사 직원으로 들어가느냐고.”

내 앞 테이블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손대지 않은 조각 케이크가 올라와 있다. 그리고 그 너머 양 볼을 붉힌 김다미가 보인다.

오늘 저녁 약속을 지켰다. 이건 얼마 전 생일, 생일선물 대신 녀석이 요구했던 것이었다.

1차로 분위기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고 지금은 부른 배를 한 채 커피를 나누는 중. 녀석과의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그 결과 다다른 곳은 동남풍 애드 솔루션을 창업했을 때, 그때 만사 재껴두고 직원 1호로 내 옆에 서주었던 당시에 대한 이야기.

“근데 이젠 그런 말씀 안 하세요. 제가 만든 광고가 TV에 나오고 팀장 달고 그러니까 그제야 제 결정을 이해하는 눈치시더라구요. 뭐 지분 사야 하니까 돈 빌려달라고 해서 또 한소리 하시긴 하셨지만요.”

녀석의 눈매가 예쁜 호선을 그린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나였어도 그랬을 거 같네.”

“참, 대표님 부모님은 뭐라 안 하셨어요?”

“안 그러긴? 엄청 반대하셨지.”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잘 다니던 KJ를 때려치우고 중소기업인 광인 기획에 입사하겠다고 했을 때. 정직원도 아닌 6개월 인턴 계약직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하셨던 말.

“그리고 나 어머니밖에 없어.”

“아…… 미안해요.”

녀석의 밝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진다. 저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말해주고 싶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아버지 오래전에 떠나신 분이라 별 감흥 없거든.”

우물쭈물 할 말을 고르던 녀석이 조심스레 나와 눈을 맞춰온다.

“그럼 기왕 미안한 김에 궁금한 거 하나 더 물어볼게요.”

“그래.”

녀석답다. 김다미는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있으면 조심하고 돌아가기보다 들춰보는 쪽이니까.

“돌아가신 거예요?”

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 아주 어릴 적에 집 나가셨어.”

“아.”

내 앞에 있는 녀석이 김다미였을까? 자라오면서 한 번도 남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기억, 난 부끄럽기보다는 그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분노와 증오, 그것들과 하나로 똘똘 뭉쳐 가슴 한구석에 오랜 시간 처박아 두었던 기억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재미없는 얘긴데 한번 들어볼래?”

“네. 듣고 싶어요.”

녀석이 상체를 숙여온다. 난 시원한 커피로 입을 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아버지. 난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제 막 유아기를 벗어나 어린이가 될 무렵 홀연히 집을 떠나셨고 당시 배속에 안주미를 가졌던 어머니가 그 남자에 대한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의 냄새와 감촉은 기억한다.

그의 몸에 풍겼던 흐릿한 담배 냄새, 그가 날 품에 안았을 때 손을 뻗으면 닿았던 볼, 걸림 없이 매끈했던 볼과 손에 묻어났던 독특한 화장품 냄새.

그걸 기억하기에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당시 어머니는 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았다.

이모집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어느 날. 적당히 술에 취하신 어머니가 들려주지 않았다면 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죽었는지 또는 살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우였다고 하더라.”

“연기하는 배우요?”

“그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인기 없는 무명 배우였데. 근데 덜컥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거야. 생계가 막막했겠지……. 배우 짓 계속하기 힘들 만큼.”

무명 배우는 고민했다.

가족을 위해 배우 짓을 포기하느냐.

배우 짓을 위해 가족을 포기하느냐.

결국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한때 사랑했던 아내에게 뒤집어씌우는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무명 배우의 선택엔 흔들림은 없었다.

“이제 우리 가족은 그냥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미워하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분노와 미움은 옅어진다. 그래서 그날 밤 어머니도 말할 용기를 내셨을 거고 그건 자식들 역시 마찬가지.

풀리지 않던 의문 때문에 들끓던 분노와 미움, 그에 대해 남아 있던 기억들을 똘똘 뭉쳐 가슴 한구석에 밀어둘 수 있었던 것.

“아…… 그런.”

이야기가 끝났을 때 김다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며 눈가를 비비는 걸 보니 감정을 이입해 버린 모양. 그 모습이 괜히 미안하고 안쓰럽다.

“야야, 그러지 마. 말했잖아? 옛날얘기라고.”

후다닥 눈가를 훔쳐낸 녀석이 히죽 웃는다.

“아뇨, 아뇨. 눈에 뭐가 들어가서.”

녀석이 허겁지겁 커피를 들이켠다. 짧은 순간 감정을 지워낸 녀석이 물어온다.

“그럼 누군지는 아세요?”

“아니. 몰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가 얘기해준 건 딱 거기까지만. 이름은 듣지 못했다. 없었던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으니 그 후론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지금도 배우 생활 하고 있을까요?”

“글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알아봐야 쓸데없는 정보다. 뒤늦게 서로를 알아본 부자가 감격의 상봉을 할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입가엔 희미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자기 꿈 좇겠다고 가족 버리고 간 사람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동료고 뭐고 다 버렸겠지. 그런 사람 절대 롱런 못 해.”

광고를 만들다 보면 피치 못하게 연예인의 세계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연예계에서의 성공은 재능과 노력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난 이미 알고 있다.

시작은 재능과 노력이지만 롱런의 비결은 결국 인성과 관계.

어제까지 사랑받던 가수가 불법행위 논란에 휩싸인다.

국민배우라고 칭송받던 자가 갑질로 손가락질받는다.

오늘도 수많은 인기 연예인이 구설에 오르고 뉴스를 타고 내일은 무명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거긴 그런 바닥이니까.”

김다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성이 안 씨겠죠?”

“그렇겠지? 성을 바꾸진 않았으니까.”

“안 씨라, 안…….”

녀석이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다.

“어……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요.”

괜히 진지한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슬슬 일어날까?”

“아직 시간이 이른데.”

아직 9시가 되지 않은 시간.

“우리 좀 걸을까요?”

“더울 텐데?”

“굳이 밖에서 걸어 다닐 필요 있나요.”

녀석이 손을 뻗는다. 그건 카페의 건너편이었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녀석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헬로우마트?”

“네. 데이트 끝났으니까 일하러 가자구요.”

“하하.”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데이트라는 말, 하지만 그 말에 아무런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테이블을 정리하려 바라보니 커피는 다 비웠다.

그런데 조각 케이크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심지어 둘러싼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상태.

“이거 괜히 시켰네.”

“네. 배불러서 못 먹겠네요. 아. 대표님 카드 주세요.”

“카드? 왜?”

“환불되나 물어봐야죠.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럼 그냥 둬. 내가 물어볼게.”

녀석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뇨. 주세요, 대표님.”

단호한 목소리, 난 무의식중에 카드를 녀석에게 내밀었다. 조심스레 쟁반에 케이크를 올려 카운터로 다가가는 녀석.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얼굴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 * *

며칠 후.

EM전자와의 미팅이 잡혔다. 광고 모델에 대한 설명과 일정을 듣기 위한 자리였지만 난 일정을 조정해 이번 미팅에 참석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차를 몰았고 마침내 수원에 위치한 EM전자 본사에 도착했다.

“와 멋지다.”

외부 업체와 미팅을 위해 준비된 라운지.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인테리어에 김다미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통유리로 꾸민 내부 인테리어, 열대우림을 연상시키는 큼직한 활엽수 화분들. 입맛대로 커피를 뽑아먹을 수 있는 카페테리아에 각종 음료수가 가득 채워진 베버리지 부스까지.

화려함과 안락함으로 한껏 멋을 부린 라운지 한편 미팅룸. 우린 10분쯤 늦게 미팅룸에 도착한 이번 광고의 실무자, 마케팅팀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광고, 기획사 선정까지 끝난 일이었거든요. 근데 재검토 지시가 내려왔어요. 그래서 DNP 쪽에 연락을 드렸구요.”

테이블 맞은편 직원이 쓰게 웃었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한때 마케팅에서 일해본 적 있습니다. 곤란하셨겠어요. 세팅 끝난 거 뒤집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담당자, 오형택 차장.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드릴 수가 없어요.”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초기 세팅에 들어간 시간, 재검토를 위해 소요된 시간. 하지만 광고 시기는 미룰 수 없다. 그러니 중도 난입한 DNP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

“다음 주 금요일에 양사 기획안 발표가 있습니다. 방식은 경쟁 PT고 내부 회의 거쳐 그다음 주 화요일쯤 업체 선정하는 일정이에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촉박한 건 촉박한 거고 광고주가 기획사에 제공해야 할 기본적인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품 자료는 없습니까? 마케팅 자료나 EM 측이 생각하고 있는 홍보 전략도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아. 참.”

그제야 테이블 한쪽으로 짐덩이처럼 치워놓은 서류뭉치에서 자료를 찾아 내민다. 그걸 받아 드는 순간 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 광고 모델은 400리터급 중소형 냉장고, 쿨리오입니다. 디자인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명한 스메그처럼 인테리어 소품으로서의 가치를 내세운 제품이고요……. 아, 죄송합니다.”

마침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급한 통화라서.”

“네. 괜찮습니다.”

그가 황급히 미팅룸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미 네 생각은 어때?”

“음…….”

오형택 차장이 뒤늦게 내밀었던 자료. 두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올리는 김다미.

“왠지 대표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랬다. 오형택 차장은 광고주를 대변하는 일개 직원일 뿐이지만 그의 행동거지를 보면 EM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첫 미팅에 지각, 반드시 제공해야 할 제품 정보보다 일정이 촉박함부터 들이미는 태도, 게다가 우리를 위해 출력되었다고는 볼 수 없는 누군가 먼저 본 흔적이 역력한 자료까지.

그렇다 보니 미팅을 끊고 통화를 하는 모습조차 뭔가 왜곡되어 보인다.

“저쪽은 우리가 이미 오케이 했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보수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

어느 정도 예상했고 우려했던 일이었다. 나 역시 한때 광고주 대행인의 입장이었기에 잘 알고 있다. 한번 세팅된 판을 뒤집는 건 실무자로서 무척 탐탁지 않은 상황이다. 실무자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는 이번 경쟁은 일방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결과 역시 기존의 세팅대로 갈 확률이 높다.

이번 경쟁의 상대, 초기 세팅에 참여했던 업체에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없다면.

“참. 상대 업체는 어딘지 들었어?”

“아뇨.”

녀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마음속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운다. 이런 식이라면 제아무리 EM이라도 DNP가 열흘이나 투자할 가치가 없다.

“아, 죄송합니다.”

그때 오형택이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저희 경쟁 업체는 어딥니까?”

“경쟁 업체요?”

돌아오자마자 질문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녀석이 몇 번 눈을 깜빡인다.

“아…… 성수 기획입니다.”

고요한 수면에 바위가 떨어졌다. 그로 인한 파장은 호수를 뒤집어 놓을 만큼 큰 것이었다.

“성수 기획?”

입 밖으로 흘러나간 목소리, 되묻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오형택이 웃는다. 난 웃음 속에 숨겨진 조소를 놓치지 않았다.

“네. 상대치곤 체급 차이가 좀 많이 나죠?”

파장에 넘실대던 호수, 불규칙하게 꿈틀대던 물결이 한 방향을 향해 거칠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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